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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재미 과학자 박윤수 박사의 삶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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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과학자 박윤수 박사가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반도체 물리학회 명예의장으로 추대돼 연설하고 있다.
사진 제공: 박윤수 박사

미국에 한미장학재단 전국 이사장과 워싱턴 지역 이민 100주년 기념 사업회 회장을 역임한 재미 과학자 박윤수 박가가 최근 ‘노만 빈센트 필 상’(Norman Vincent Peale Award on Positive Thinking)에 선정됐다. 이 상은 블랜튼-필 연구소와 상담센터의 공동 설립자이자, 적극적 사고(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라는 책으로 유명한 노만 빈센트 필의 이름을 따서 제정됐다. 과거 수상자 중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 엘리자베스 돌 상원의원 등이 있다. 박윤수 박사는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뜻밖에 상을 받게 돼서 영광스럽게 생각되고 기쁘기 짝이 없다고 술회하고 하나님이 주신 삶을 열심히 살아왔으며, 또 힘차게 값있게 살아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남은 삶도 참되고 값있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재미 과학자 박윤수 박사의 삶의 여정으로 함께 한다.

박윤수 박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64년을 해외에서 살아왔지만 깊은 마음으로 조국을 사랑했다고 들려준다.

박윤수 박사: 이제 84세를 맞이하면서, 제가 정든 고국을 떠난 지도 벌써 61년이 됩니다. 그중 3년은 캐나다에서, 1년은 독일 백림대학에서, 3년은 미국 극동 사무국 국장으로 일본에서 생활하였고 2년은 서울 대학에서 1년은 삼성 고문으로 지냈습니다. 돌이켜보니 3년만 한국에서, 나머지 52년을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외국에서 보낸 세월이 더 긴 인생이지만 저에게는 한국의 넋이 가슴 깊이 살아 있고 모국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 싶은 충동을 늘 억제할 수가 없어서, 그런 마음 때문에 매년 휴가(annual leave)를 이용해서 조국을 방문하고 한국과학발전에 기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박윤수 박사의 학창시절 이야기 들어본다.

박윤수 박사: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을 때, 저는 중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그때는 고등학교 제도가 아직 시작되기 전이라, 4년제 중학교를 마치고 나면, 대학 예과에 응시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저의 희망은 현 서울 대학교의 모체인 경성대학 예과에 입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골 김천중학교에서 경성대학 예과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척 힘든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응시하여 경성대학 예과에 드디어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시골 중학교에서 경성대학에 입학한 저는 김천 여학생들 사이에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방학 때 김천에 내려가면 경성대학의 망토를 걸치고 김천 여자 중학교를 한 바귀 돌곤 했습니다. 그런데 김천 여고 출신은 만나지 않고 이화여고 출신이 걸렸습니다.

박윤수 박사가 625전쟁으로 부산서 피난 대학에 다닌 이야기와 기독 학생으로서의 활동도 들어본다.

박윤수 박사: 1948년에는 군정부에서 추진하던 국립대학 안이 설립되어 저는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학부 3학년 때에 6, 25사변이 일어나서 동료들과 교수들이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피난 와서 전시대학에 다녔는데요, 당시에 오후가 되면 미군 항만 부대에서 항만 장의 보조관으로 취직되어 통역하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서울에 있을 때에부터 맡아서 해오던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 회장 일과 또한 강원용 목사님이 돌보시던 전국기독학생회 총무로서의 일에도 열심을 내었습니다. 또 황성수 의원이 인도하시던 전국기독청년회 일도 도와 드렸습니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도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기독교 강좌와 기독교 학생 행사에 쫓아다녔고, 창경원과 한강이 어디에 붙어 있는 줄도 모른 채 공부나 교회행사에만 몰두했었습니다. Emil Brunner, Reinhold Niehbur, Paul Tilich, Karl Barth 등의 유명한 신학자들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박윤수 박사는 1952년에 캐나다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박윤수 박사: 저는 캐나다 Alberta대학의 기독학생회(Student Christian Movement of Canada)에서 6,25사변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장학생을 한 명 선발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응시를 했는데 다행히 선발되어서 저는 1952년 8월에 유학의 장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 Alberta 대학에서는 원자핵 물리학 석사 학위를 마쳤고요, 오하이오 주 Cincinnati 대학에서는 고체물리학 박사학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Dayton, Ohio 미 공군 연구소에 취직되어 반도체 연구실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 데 대해 죄책감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동료와 후배와 과학계를 위해서 봉사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실험장비와 자료를 한국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또 일 년에 한 명씩 제 연구실로 한국의 교수들을 초청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박윤수 박사 가정은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박윤수 박사: 저의 부모님은 일찍이 이북 평안남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독실한 장로와 권사셨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도운 탓으로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요, 그 후에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경북 김천에 정착하셨습니다. 경북 김천에서의 저의 어린 시절은 부모님의 신앙생활 영향을 받아, 마치 저의 전 삶이 교회생활에 푹 젖어 있는 듯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참고로 제 어머님은 김천 황금동 장로교회에서 여선교회장을 18년 동안 연속으로 장기집권 하셨던 분이셨으니 온 가족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겠습니까? 그런 독실한 신앙의 부모님 밑에서 자랐기에, 저희 형제 4남 3녀는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행가도, 함부로 부르지도 못했고요, 찬송가나 학교에서 배운 동요 만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형제끼리 화투도 치지 못했습니다. 저의 어릴 적 삶을 돌이켜 볼 때, 생각나는 것은 교회와 목사님, 그리고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과 선배, 그리고 신앙의 친구들이 전부였습니다.

박윤수 박사는 어린 시절부터 사회봉사를 철칙으로 알고 살아왔다고 들려준다.

박윤수 박사: 저는 지난 84년 동안, "믿는 자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고린도후서 5장의 말씀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마가복음의 12장의 말씀을 제 개인 신앙의 모토(motto)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을 통해서 자연히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믿음과 실천이 조화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과연 참되라면, 그는 교회봉사뿐만 아니라 사회봉사와 사회정의에도 관심을 두어야 하지요. 이런 생각들 때문에 저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한 것들은 우리와 같이 죽어 버리지만 남을 위해서 또 세계를 위해서 한 일들은 영원히 남고 불멸하다”라고 했던 Albert Pine의 말을 참 좋아합니다. 또 “하나님께 가장 수용될 수 있는 봉사는 이웃에게 선행하는 것이다”라고 한 Benjamin Franklin 의 말도 좋아합니다.

박윤수 박사에게 미국서 봉사활동의 이야기 들려달라고 했다.

박윤수 박사: 미국에서 45년이나 역사를 가진 한미장학재단에 이사로서 또 한미장학재단 전국 이사장으로서 오랫동안 봉사해 왔고 지금도 한미장학재단에 이사로서 아직도 일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이가 84살이니까 이제는 은퇴할 때도 훨씬 지났는데 계속하고 있고 우리 젊은이들의 장래 학업을 위해 도와야겠다는 의미에서 한미장학재단에 봉사하는 것을 굉장히 뜻있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제가 열심히 했던 것은 2002년부터 2003년 까지 워싱턴지역 이민 100주년 기념 사업회에 회장을 한 것입니다. 당시 10개 사업을 제정해 놓고 열심히 한 결과 아주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 지금 생각되는군요. 하나는 미국에서 제일 처음 대학교를 나왔다고 하는 변수 선생 묘지가 워싱턴 인근에 있는데 그 묘를 우리가 다시 미화하는 그런 작업을 했고, 그다음에 대한민국제국에 공사관 건물을 일본에 빼앗겼는데 이 건물을 되찾는 그런 일도 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모금 행사를 하고 또 한국정부에서 도와줘서 이 건물을 매입하게 됐고요. 또 한가지는 이민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여러 분야를 종합해서 아주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이것도 상당히 기억에 남는 일이고요. 그 다음에 제일 마지막으로 이민 100주년 기념만찬을 가졌어요. 2003년 힐튼 호텔에서요. 그때 1,500명이라는 한인 동포들이 모여서 우리가 성대한 기념식을 했습니다. 워싱턴 디시에서 1,500명의 한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역사상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해서 이런 큰 성대한 행사를 가졌다는 것은 정말 감개무량한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한국 1세나 2세들이 성취한 업적을 우리가 회고하고 또 치하하는 이런 행사들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다음 100년을 위해서 더 열심히 뛰어서 젊은 세대로 하여금 미국 주류 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박윤수 박사는 최근 노만 빈센트 필 상에 선정됐다. 어떤 상인지 설명해 달라고 했다.

박윤수 박사: 제가 뜻밖에 이 상을 받게 됐는데, 이 연구소에서 저에게 통지를 줄 때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이 상은 믿음과 깊은 배려로 적극적인 사고의 힘을 명백하게 보여주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개선하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사는 이들에게 수여된다, 하면서 제가 과학계에 봉사한 삶, 연구와 교육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선한 영향력, 또 장로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를 섬긴 헌신, 다음 세대 지도자들을 위해 장학금 지원 등은 적극적 사고의 삶을 명백하게 보여준 것이라며 저에게 이 상을 수여한 것입니다. 라고 전해 왔습니다.

박윤수 박사가 과학자로서 한인 2세들에게 주는 당부나 충언의 말이다.

박윤수 박사: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창의적인 그런 부문으로 여러분이 많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늘 우리가 명기해야 할 것은 우리 이웃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일들을 택해야 하겠고, 또 한가지는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같이 (try not to become a man of success rather become a man of value) 즉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라!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물리학은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닙니다. 그 학문 자체를 좋아해야 해요. 학문 자체를 좋아해야지 물리학을 할 수 있지 돈 벌 생각하면 못하는 학문인데 여러분도 여러분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재미 과학자 박윤수 박사의 삶의 여정으로 함께 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