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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6.25전쟁 교육자료 발간한 김봉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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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대한 지키기 국민운동본부 미 서부지부 김봉건 회장이 최근 6.25 한국전쟁에 관한 책자를 발간했다. 이 자료는 한인 2세 3세 젊은이들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잘 알도록 확실한 자료와 자신이 겪은 전투일지 자료들로 구성했다.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3년 1개월여간 최일선 보병 중대장, 대대장의 직분으로, 실전 지휘관으로서 중요 전투 전쟁일지 자료들과 한국군 포로에 관한 자료, 또 국군포로들의 비참한 삶 등 한국전쟁에 잊을 수 없는 각종 6.25 전쟁의 자료들로 가득 채웠다. 바로 노병 김봉건 선생 자신의 생애를 담았다고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다.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6.25 한국전쟁 교육자료를 발간한 노병 김봉건 선생을 만나본다.

김봉건 선생에게 왜 6.25 한국전쟁에 관한 교육자료집을 만들게 됐는지 여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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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 김봉건 선생 (사진제공:김봉건).

김봉건 선생: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됐지요. 북한의 소위 불법 남침으로 인해서 우리는 아무 준비 없는 불의의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3일 만에 서울 수도가 인민군에게 함락됐지요. 이러한 불우한 우리 한국에서의 역사를 저 자신이 몸소 지키면서, 이것을 그대로 후세들에게 잊혀진 전쟁으로서 보내서는 안 되겠다 해서 이런 한국전쟁에 관한 자료를 발간하게 된 것입니다.

 


노병 김봉건 선생은 미국에 있는 공공도서관과 한인 2세들이 활동하는 곳에 이 책자를 보낸다며 2세 3세들이 6.25 전쟁에 관해 새로운 인식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김봉건 선생: 2세, 3세들을 위한 자료로, 앞으로 미국 내 각 지역 도서관과 공공 기관에 배포하고자 해서 제가 1,000부를 제작했습니다. 그래 앞으로 이 자료를 통해 우리 후세들이나 관심 있는 분들이 이 자료로 6.25 전쟁에 관해 새로운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책자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김봉건 선생은 자료 수집을 위해 많은 노력도 했다고 한다.

김봉건 선생: 제가 왜 이 책자를 만들게 됐냐 면은 우리 6.25전쟁 참전 자들도 잘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 저는 6.25 전쟁에 우리를 도와준 나라가 몇 개 나라이냐! 이거 모두 알아야 하겠다. 이거에요. 우선 병력을 파견한 나라가 16개 국가, 의료지원한 나라가 5개 국가, 물자 지원한 나라가 47개 국가입니다. 자세한 자료는 국방부 전사 편찬실에서 정식으로 통보받은 자료입니다. 그래서 6.25 때 우리를 지원해준 나라는 68개 국가입니다. 그래 한국을 포함해서 69개 국가가 인민군과 중공군, 소련군이 세 나라와 전쟁을 치른 거지요.

김봉건 선생은 6.25 전쟁 당시도 회고해 준다.

김봉건 선생: 소련에서는 미그기를 띄운 적도 있었고 중공군은 병력과 물자 등을 제공하면서, 우리가 다 이긴 전쟁을, 압록강까지 들어간 전쟁을 중공군에 의해서 이렇게 3.8선에서 한반도의 허리를 끊어 놓고 이산가족을 만들어주는 이런 원인 제공은 중공이 한 거지요. 이런 점을 우리가 잊을 수 없다는 후세에 남기고 저 해서 이 책의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김봉건 선생은 오늘의 한국이 있는 것은 한미상호조약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봉건 선생: 우리는 1953년에 미국과 한국이 한미상호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이 손을 굳게 잡고 한미상호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한미상호조약체결이 우리 한국을 살린 겁니다. 한국 번영의 기초가 바로 이 한미상호조약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1953년 10월 1일 이 기념일을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런 점을 우리 후세들에게 강조해 줘야겠다는 그 의무감에서 이런 책자로 만든 이유도 있습니다.

김봉건 선생은 국군포로 이야기만 하면 가슴이 아프단다.

김봉건 선생: 6.25전쟁에서 5만 2천3백 십8명이라는 포로가 북한에 잡혀갔어요. 5만 2천3백 십8명 이 숫자는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저와 가깝게 지나던 사람들도 연대장급이 5명이나 잡혀갔지요. 그러나 이분들의 생사는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전우들 이 사람들 생각 하면은요. 그야말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정말 가슴이 미어져요. 왜 우리 고국은 반세기가 지났지만, 전쟁 처리를 못 하느냐! 포로처리를 왜 못 하느냐! 이것이 가슴 아픈 참전용사로의 심정입니다.

김봉건 선생은 64년 지나온 동안 북한의 행태를 보며 참 원망스럽다고 말한다.

김봉건 선생: 북한의 악독한 이 사람들은 전쟁 처리를 안 하고 이걸 가지고 결국에는 소위 남한으로부터 어떤 경제적 도움을 자꾸 우려내고자 하는 이런 속셈, 이런 짓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 사람들에 대한 원망은 더욱더 깊어 가지요. 이것을 우리 2세 3세들에게도 알리고 싶은 심정에서 저는 이 책자를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김봉건 선생은 국군포로로 잡혀갔다 구사일생으로 탈북한 조창호 중위의 이야기 들려준다.

김봉건 선생: 조창호 중위는 43년 만에 고국을 찾았습니다. 육군 소위로 북한에 포로로 잡혀가서 탄광 막장에서 탄을 캐는 노역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탈북했습니다. 중국을 거쳐서 대한민국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탄광에서 석탄 가루를 너무 많이 마셔서 호흡기가 고장이 났어요. 그래 규폐증이 심해져서 작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은 생각하면 참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조창호 중위를 하늘나라에 보낸 데 대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김 선생은 북한은 국군포로들을 탄광 막장에서 일하게 해 다 죽게 만들었다고 들려준다.

김봉건 선생: 국군포로들을 건설사업에 투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곳의 복구를 포로를 데려다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래 포로수용소에 있다. 어디에 배치했느냐 면은 북한은 탄광이 많습니다. 평안북도 초산만 해도 화북 탄광이 있습니다. 바로 조창호 소위가 내 고향 초산 화북 탄광에서 석탄을 캤습니다. 한 5만여 명의 포로들이 제일 고생스런 탄광 광부로서 막장에 들어가서 정으로 망치로 탄을 캐는 일을 시켰다고요. 그래 우리 국군포로들은 거의 다 생명이 단축됐고 전부 규폐증에 걸려서 다 죽었어요.

김봉건 선생은 참전용사로 마지막 소원으로 국군포로의 뼈라도 가져다 가족에게 주도록 노력해 달라고 호소한다.

김봉건 선생: 저도 세 번이나 총을 맞았어요. 이걸 생각하면 나도 포로 됐으면 탄광 막장에 가서 탄을 캐다 규폐증에 걸려 나도 죽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 참 안타깝지요. 안타까운 일인데 박근혜 대통령께서도 이 안타까운 이 심정, 참전용사의 마지막 호소, 이것을 꼭 들어줬으면 하는 제 심정입니다. 저는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서 건재하는 88세의 노병이지만, 이 전쟁 처리를 못 하는 우리 정부, 국방부, 보훈처, 국회의원, 국회의장님 이분들에게 저는 원망스럽습니다. 반드시 전쟁 처리를 해 주시고 살아 있으면 이분들을 데려오는 방법을 강구해야 되고 죽은 사람은 뼈라도 그 부인들에게 또는 그 자식들에게 그 후손에게 내 고향 동산에 와서 묻히도록 해 주시는 그런 역할을 해 줬으면 하는 것이 제 마지막 죽기 전에 소원입니다. 이제 88세로 며칠 더 살려는지 몇 년을 더 살러는지 모르지만, 이런 마지막 소원을 한국 정부에서는 들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참전용사의 한마디를 드립니다.

김봉건 선생은 살아생전 김일성에게 충성하던 윤성철 등이, 반동분자로 몰려 소련으로 망명한 이들을 LA로 초청해 6.25는 북한이 남침한 전쟁이라는 확실한 증언을 들었던 것이 가장 보람됐었다고 들려준다.

김봉건 선생: 저는 미국 와 잘 지내면서 뜻이 있어서 소위 북한의 김일성에게 충성해 소련에 가서 스탈린의 남침 결재를 맡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불법 남침 작전 명령을 작성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윤성철 중좌입니다. 이 분이 김일성에게 충성했지만, 그 후에 반동분자로 몰려서 소련에 망명했어요. 그때에 반동분자로 몰려서 소련으로 망명한 분들이 작전국장 남침명령의 제1호를 작성한 윤성철 중좌이고 정상빈이라고 소련군 대위, 이분은 조선 인민국 문화선전 부장으로 있다. 소련으로 또 망명했고, 조선 인민군 총 사령부 강상호 대위 이 사람도 소련으로 망명했지요. 그래 뜻이 있어서 소련으로 망명한 이분들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초청한 바 있습니다. 이분들이 LA에서 강연했습니다. 6.25 전쟁은 어떻게 일어났느냐! 그 작전명령은 어떤 연유로 자신이 작성했느냐! 그런 것들을 다 증언하고 이분들은 분명하게 6.25는 남침이고 그 작전명령을 윤성철이 내가 작성 한 거요. 그래서 김일성과 같이 스탈린에게 가서 결재를 맡아서 남침한 겁니다는. 것을 분명히 증언해주고 연설해 줬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죽기 전에 잘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봉건 선생은 올해 88세의 노병이시다. 생애 가장 큰 기억은 1950년 평양비행장을 점령했던 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들려준다.

김봉건 선생: 공산당이 싫어서 북한으로부터 1946년에 단신 월남해서 서울에서 서북 청년회 호림 대원의 한 사람으로서 일해 오다가 내 뜻이 있어서 군대에 입대했지요. 그래서 육군사관학교 제7기생으로 졸업해 육군 대위로 중대장으로서 6.25전쟁에 임했고, 전쟁에서는 제 하나의 남아 있는 공훈은 평양을 제일 먼저 들어가서 점령했다는 것, 저에게 남아 있는 제일 큰 공헌입니다. 바로 1950년 10월 19일 새벽 4시 30분에 평양 비행장을 제일 먼저 말을 타고 들어가서 평양비행장을 점령한 것이 우리 보병 제1사단에 공적이 됐지요.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6.25한국전쟁 교육자료를 발간한 노병 김봉건 선생을 만나봤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