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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2)-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2. 공산 반란 토벌과 6.25 전쟁으로 확장된 군의 정치 영향력

 

  군사 쿠테타를 이해하는데는 한국군의 창군 과정과 한국전을 통해 확장된 군의 정치적 영향력과 박정희 장군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 정치를 타부시한 국방경비대와 좌익 세력의 은신처

  한국을 점령한 미군은 경찰의 보강 장치로 1946 1 14 소위 국방경비대 (Korean Constabulary) 창설하였고 국군준비대 학병동맹등 사설 좌경보안 부대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처음에는 각도에 1 중대식 그리고 미군이 철군시는 1 연대식의 국방 경비대를 창설하며 이를 지휘하기 위한 간부 양성을 위해 만드러진 기관이 1945 12월에 창설된 소위 군사 영어학교이다. 과거의 장교 경력자들을 선발 학교에서 군사후련 대신 군사영어를 가르처 부대 창설 수요에 따라 조선 경비대 장교로 임관 배출하였다. 독립된 정통 조국의 군사제도의 핵심을 자처할려든 광복군 간부 출신이 기피된채 군사 영어학교에는 주로 일본군과 만주 학도병 장교출신이 주축이었으나 일본군에 자원한 지원병 출신도 포함되었다. 군사영어 학교는 단기 육군 사관학교(1-10) 시작되는 1946 5 전까지 계속 되었고 재교 기간도 경비대 창설시기와 수요에 마춰어저 수일에서 수개월로 차가 있었다. 군영 출신의 총수는 120명이며 나는 국방경비대 가담을 지연시키다 군사 영어학교가 페교될 무렵 임관을 결심하여 1946 5 1일부로 군번10100 (100) 번으로 조선 육군 경비대 참위(현재 명칭 소위) 임관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습성에 따라 군은 정치에 초연한다는 사고 방식과 미군의 군내에서의 정치 성분 가리기를 기피한 탓인지 당시 경비대 입대시의 사상검토는 이루어 지지 아니하였다. 때때로 경찰에 의해 좌익활동에 연류된 자의 색출 의뢰가 있었음 불구하고 협조가 되지못한게 사실이었다. 좌익 활동이 금기시 되기 전에도 군을 장악하기 위한 좌익 세력의 군내 침투가 있었던 같다. 군이 군내 좌경세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구 제주도 폭동 사건과 제주도 폭동 진압 출동을 앞두고 여수의 14연대 일부가 부대를 이탈 반란군이된 사건이 촉진제가 되었다. 대구 사건 당시의 연대장 촤남근 중령 대전 연대장 김종석 중령이 남노당 뿌락찌로 검거되었 제주도 연대장 박진경 중령은 남노당의 뿌락찌로 있던 중대장 문상길 중위의 지령을 받은 하사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당시의 국내 사상대결과 군내 잠복된 좌경 세력의 활동을 설명해 준다. 군은 시민 폭동 진압과 좌익 세력이 가세한 좌익 게리라 소탕을 위해 잠복된 군내 좌경세력을 색출하지 아니할 없게 되었다. 남노당의 군내 활동책으로 포섭된 박정희 당시 소령과 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검거 되어 생명을 잃케 되었다. 소령도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군내 공산 뿌락찌 색출을 협조하는 대가로 무기로 감형되고 6.25 전쟁으로 장교 부족으로 전과 장교들의 등용 기회를 얻어 다시 복무가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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