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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5)-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2. 공산 반란 토벌과 6.25 전쟁으로 확장된 군의 정치 영향력

  ) 4.19혁명후 민주당 정권하의 청치불안과 군의 숙군 회오리

 

  4.19 학생 혁명은 지휘관들의 선거부정 개입에 대한 군내 장교 특히 중령급 장교들의 비판과 군의 쟁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송요찬 참모총장의 퇴역을 요구 하는 소위 하극상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쟁화를 위해 중장이상은 군에서 물러 나야 한다는 여론의 압력은 종국에는 송요찬 총장을 비롯 야저군 사령관(유재흥 중장) 합참의장(최영희 중장) 은퇴로 이어젔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경제사정   국민 뿐만 아니라 장교들게도 우려의 대상이었다. 학생 혁명으로 들어선 민주 정권은 내각제로 신구파로 대립되고 독재후의 정권임으로 북측 학생들과의 통일 협상을 휴전선에서 하자고 주창하는 학생들의 과격 행위를 위시해 분출되는 국민 욕구를 처리해 나가는데 강할 없는 정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새로운 경제 계획아래 방향이 정립되기 시작하였으나 정권의 예산을 답습 정권 독자적 예산을 갖일 기회조차 없었든 환경이었다. 그러고 정권내 파벌투쟁은 군과 일반에게도 강한 정부로서의 인상은 주지 못하였으라 생각된다.   

 

  정권이 불안정한 가운데 민주당 정권은 휴전에 따른 2개사단 감군계획을 들고 나오게 되었다. 감군에는 많은 직업 군인이 군을 떠나야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군은 1차적으로 과거 사고로 형을 받았던 기록 소유자를 숙군의 의미를 겸해 에서 보내기로 하였으며 장성급 장교에 앞서 일차적으로 영관과 위관급을 예편 시키기로 하였다. 하급 장교가 먼저 퇴역하게된 것은 해당 장성급들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였나 생각 되었다. 작업은 1960년말 내가 6군단장으로 부임하자 이루어 젔다. 다음은 장성들의 예편 차례였으며 박정희 장군도 당연이 여기에 해당되어 떠나야 입장에 있었다. 5.16 쿠테타의 시기도 이와 무관하지 아느리라 생각된 . 하극상 사건으로 군에서 나간 장교들도 쿠테타에 가담되었음은 물론이다. 5.16 으로 감군 계획은 실시되지 아니하였다.

 

  여담이 되겠으나 내가 6군단장에 부임하게 됨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4.19 이후 숭요찬 참모 총장이 최영희 중장으로 교체되었다. 나는 군수 참모 부장으로 당시로 서는 4년을 근무했으며 자리에서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때마치 3 장군 이상은 군에서 나가야 한다는 하급 장교들의 압력도 무시못할 주장이었다. 4.19 관련되었던 자유당 장관들에 대한 형이 선고되는 날부터 나는 같은 세대를 살고 있던 지휘관으로서 반성의 자극을 얻기 위해 머리를 짤게 깍고 머리 기름을 바르지 않키 시작하였다. 덕택에 지금은 머리가 빠저 기름이 필요없게 되었다. 나는 다년간 위장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신임 총장은 나와는 친구지간 이었다. 총장은 나에게 군단장으로 나갈 것을 종용하였으나 나는 고급장교들이 비난을 받고 있는 때가 나의 반성과 건강을 돌아 보는 좋은 기회로 생각 군단장 대신 9월에 개강되는 국방 연구원(대학)에서 1년간 공부 수양의 기회를 요청하 였다. 그러는 최총장은 차장인 최경록 장군으로 교체되었고 나는 신임 총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 기한의 국방 연구원에 입교하였다. 나는 기간 동안 국방 전략과 운영을 위한 나라와 국제적 제한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노력을 하였다. 국방 연구원 생들은 약간명의 육해공군 장성외 대령급 장교가 주가 되었으며 중앙 정부 과장급도 수명 있었다. 교과목 중에는 대학 교수들에 의한 정치 외교 경제의 원론적 강의와 장관을 포함 정부 고급 공무원들의 소관 분야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 . 발전 초기이며 전후의 어려운 정부의 현실을 놓고 자연적으로 비판적이고 실망 주는 분위기가 되기 마련이었다. 학생들의 행학렬은 대단했으며 국가 문제에 졸업 논문들을 택했다. 나는 국방연구원 교육이 장교들로하여금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데 자신과 격례를 준바 많았으리라는 생각을 후에 갖이게 되었다.

 

  어느날 학교 강의 시간중에 참모 차장 김형일 중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내가 6군단장으로 임명되었으니 부임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약속과 다르다고 였더니 그렇치 않아도 8 사령관으로부터 건강을 위해 학교에 사람을 임명 했는가라는 질문이 있어 그것은 내가 학교 가기 위한 핑계였으며 진급을 위해 군단 장에 입명했다고 답변했다는 것이다. 군단장 후보 물색이 곤란하니 자기네를 살려 준다는 생각으로 부임해 달라는 간청이었다. 6군단은 1군단에 작전지휘상 배속되었기에 군단장 인선에 있어 8 사령관의 동의가 필요한 때였다. 나는 이리   해서 2개월여의 국방 연구원 교육도중 육사 교장으로 전직하는 강영훈 중장의 후임으로 6군단장에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 6개월 남직한 재임중 5.16으로 군단장 으로서 중장의 기회를 받지 못한채 소장으로 예편을 하게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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