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30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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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에 이르는 열매”
(The Crop for Eternal Life)
--요한복음 4:3-9
(김 영봉 목사)
1.
영성 신학자 헨리 나우웬 신부가 노틀담 대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그는 예고도 없이 불쑥 연구실로 찾아와 스케줄을 흐뜨러 놓는 방문자들로 인해 자주 짜증이 났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예고에도 없는 방문객들로 인해 하루 일정이 완전히 망가져 매우 불편한 심기로 교정을 걷고 있었습니다. 인상을 구기고 걷는데, 친구 교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묻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 있나? 자네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군.” 헨리가 대답합니다. “아침 나절에 예고도 없이 몇 사람이 찾아와 하루 일정이 완전히 망가졌다네.” 그러자 그 친구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방해받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우엔은 순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자신의 계획과 일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 이후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일정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방해 받는 것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예고도 없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이라 믿고 그를 기쁘게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람들을 맞다 보니, 그것이 바로 전도요 목회임을 깨달아 알 수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읽은 나우엔의 이 일담은 저에게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는 제 스스로 세운 일정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오랜 습관이다 보니, 그렇게 사는 것이 제게는 편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제 삶의 영역들이 모두 제 손아귀 안에 쥐어져 있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적어도 저의 세계 안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일정에 방해를 받으면 심기가 불편해집니다. 함부로 남의 영역에 침입하여 일정을 흐뜨러 놓는 사람에 대해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렇듯, 저에게도 ‘사람’보다 ‘일’을 우선하는 습성이 있었고 지금도 그 습성은 완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태도가 얼마나 불신앙적인지, 저도 인정합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주님으로 모셔 들였다면, 제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세계 안에서 주인이 되도록 해야 옳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세계를 제 통제력 안에 틀켜 쥐고 있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의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낯선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짠 일정에 개입하기도 하시며 그 일정을 흐뜨러 놓기도 하십니다. 제가 짠 일정보다 더 기가막히는 계획이 그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해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받아들이면 제가 기대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신비한 일이 일어납니다.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별히, 그 일이 사람을 위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방향도, 목적도 모를 일을 위해 아무 생각없이 몰두하고 질주하곤 합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가족도 희생시키고, 친구와 이웃도 희생시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도 희생물로 만듭니다. 목적없는 일, 방향없는 일에 몰두한 결과는 늘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보다 사람을 앞세우도록 힘써야 하며, 일을 하면서 ‘이것이 사람을 위한 일이냐?’를 질문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삶의 초점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2.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양식은 밥과 빵과 고기만이 아닙니다. 끼니마다 산해진미로 배를 채우고도 허기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이것 때문에 산다!’는 뿌듯한 보람이야말로 우리를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보람 있는 일을 할 때는 음식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삶의 보람이 고갈될 때에야 우리는 좀 더 맛난 것이 없는지 두리번 거립니다. 보람이 없어서 생긴 허기를 음식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어디, 산해진미로 그 허기가 채워지던가요? 저도 여러 번 경험해 본 일이지만,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얻은 포만감은 오히려 삶을 더 권태롭게 만들지 않던가요?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보람을 안겨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무엇을 통해 삶의 보람을 찾으십니까? 이 지점에서 우리 대부분은 오답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우리는 그 대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 35절 이하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 추수하는 사람은 품삯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 들인다.
예수님의 삶에 보람을 안겨 주었던 일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일이었습니다. 즉, 전심으로, 진심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마음 다해 귀 기울여 들어주고, 함께 웃고 울어주며, 당신에게 있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삶의 보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긴 일의 초점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분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자신의 일정을 빠짐없이 소화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세계 안으로 침범하여 들어오는 사람 하나 하나를 전심을 다해 만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엔의 친구 교수의 말대로, ‘방해받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본질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삶의 진실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성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매일 씨름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전심으로 만나기 위해 ‘방해받는 것’을 환영할 뿐아니라, 사람을 찾아 만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일정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만나고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의미이며 보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세운 성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 홀로 고립되어 살아가게 될 지 모릅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홀로 자신의 일정과 계획과 기호대로 사는 삶이 참으로 평화롭고 안전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실은 우리 자신을 독방에 감금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독방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 바깥으로 나아가 사람을 만나라 하십니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방해자’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서 뭔가 뜻이 있어서 보내주시는 사람으로 여기라 하십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사람을 찾아 나서라 하십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서 일어나는 이적을 경험해 보도록 초청하십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삶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유도 없이, 방향도 없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잡담을 나누도록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출세를 위하여 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을 만나 명함을 수집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같은 만남들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더욱 고갈시킬 뿐입니다. 많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여 자연히 보람이 들어차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되 나의 이익과는 전혀 상관 없이 만나야 합니다. 아니, 때로 나의 이익을 손해 보면서 만나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안고 만나야 합니다. 그 만남을 통해 진실하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하여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맺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고갈되지 않는 보람이 우리 삶에 들어찹니다.
3.
이렇게 살고 싶다면, 그리고 이같은 보람을 먹고 살고 싶다면, 꼭 명심하고 살아야 할 ‘삶의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주신 것이다’라는 진실입니다. 나와 함께 50년 혹은 60년 함께 살아가는 배우자도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나에게 붙여주신 사람이며, 공항 대기실에서 잠시 옆 자리에 앉았던 사람도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보내 주신 사람이고, 직장에서 자주 만나는 고객도 실은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보내 주신 사람입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가 만난 사람이든,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든, 예고도 없이 나를 찾은 사람이든,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나에게 붙여준 사람입니다.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분이 사람들을 만나신 이야기들을 살펴 보면, 그분이 이같은 삶의 진실에 충실한 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조차도 소홀히 하지 않고 전심을 다해 만나주셨던 이유는 성부 하나님께서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만들기 위해 그 사람을 붙여 주셨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오늘 읽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그분이 유대 지방에 가셨다가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해 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는 “그렇게 하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실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갈릴리 지방과 유대 지방의 중간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갈릴리와 유대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그들로부터 차별을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 갈 때, 때로 사마리아인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여 유대인들은 요단강 주변에 있던 광야길을 걸어 이동하기를 택했습니다. 시간은 훨씬 더 많이 걸렸지만, 그것이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광야길을 마다하고 사마리아로 들어가십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그 길에서 위험한 일을 만날 가능성도 없지 않았지만, 그분은 그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사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늘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특별히,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위험의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위험의 가능성을 감수할 것이냐, 안전을 택할 것이냐를 두고 선택해야 합니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 어느 정도의 위험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는 또한 예기치 않은 선물도 들어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한 그 선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붙여주실 사람들이 누구일지를 생각하며 마음이 설레였을 것입니다. 그분은 분명히 믿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누군가를 준비해 두고 계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간절히 목말라 있는 사람, 어둠 속에서 절박하게 빛을 찾고 있는 사람, 권태와 무의미의 감옥 속에서 참다운 생명수를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여행에서 예수님은 여러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 이야기들 중 하나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수가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의 일입니다. 때는 땡볕이 가장 뜨거운 정오.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느 우물가에 남겨 두고 음식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중동지방에서 정오는 모두가 휴식을 취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물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우물가에서 잠시 쉬면서 제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떤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로 걸어 옵니다. 그 여인은 우물가에 남자가, 그것도 유대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아마도, 잠시 망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모른체 하고 물을 길어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 여인이 우물에 당도하여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러 하자, 그 낯선 유대 청년이 말을 건넵니다. “아주머니, 제게 물을 좀 주시겠습니까?” 그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그것도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누구기에 그 대단한 유대인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겁니까?
4.
알고 보면, 그 여인은 별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 여인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 보면, 그 여인이 다섯 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지금은 또 다른 남자를 만나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이력으로 인해 지난 2천년 동안 그 여인은 ‘섹스광’으로 오인되어 왔습니다.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여러 남자를 전전한 여자라고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여자를 ‘사마리아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덟 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경력에는 한 참 못 미치지만 말씀입니다.
하지만 당시 여성들의 지위와 권한을 생각해 본다면,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여인은 다섯 번 남자를 갈아치운 사람이라기보다 다섯 번 남성들에게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보아야 더 상황에 맞습니다. 어쨋거나, 그 여인은 그 지역에서 ‘질 나쁜 여인’으로 혹은 ‘재수 없는 여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곱지 않은 눈길로 그 여인을 쳐다 보았습니다. 모두가 오수를 취하고 있는 정오 시간에 그 여인이 물을 길러 왔다는 사실은 그가 동네 사람들을 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여인은 아무에게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던 ‘기피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좀 주십시오”라고 부탁함으로써 그를 사람으로 대접합니다. 유대인 남자의 자존심을 내려 놓고 유대인들로부터 개처럼 취급받고 있던 사마리아 여자에게, 그것도 소행이 좋지 못하여 모두들 회피하는 ‘재수없는 여자’에게 도움을 청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진행되는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듯, 예수님도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환히 꿰뚫어 아셨습니다. 그 여인의 숨겨진 문제들을 몰라서 사람 대접해 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기에 더 친근하게 대했습니다.
인종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결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그랬던 것처럼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대했습니다. 그분이 믿고 따랐던 ‘삶의 진실’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성부 하나님께서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만들기 위해 붙여주신 것이라는 진실,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볼 때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부였습니다. 그분은 그 여인의 겉모양과 함께 내면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갈증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듭 거듭 버림 받으면서 깊고 깊게 패인 ‘참 사랑에 대한 갈증’이 그 여인의 마음 안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 여인의 현재만을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후에 변하게 될 미래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오랜만에 사람 대접을 받은 그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분 앞에서 무장해제되었습니다. 자신의 속 마음을 내어 놓게 되었고, 부끄러운 내면을 드러내 놓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 여인은 과거의 상처로부터 치유되었고, 참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 끝에 그 여인은 동네로 뛰어 들어가 만나는 사람들을 붙들고 말합니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자신을 왕따시킨 동네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사람 대접 한 번 해 주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경험한 놀라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 여인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던 동네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의 말 때문만은 아니요. 우리가 그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오”(42절).
알고 보면, 이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 여인의 개인사를 놓고 보면, 여기서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버림받고, 왕따 당하고, 외면 당하고, 멸시 당하던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되고, 자신을 버리고 외면하고 멸시하던 사람들에게 찾아가 그들도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되라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그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 이상 남자들의 사랑에 목숨 걸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고 하나님께 사랑 받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되었음을 알기에 더 이상의 다른 사랑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살아갔을 것입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같은 삶에 이르도록 도왔습니다.
5.
일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이라고 믿는 것, 그러기에 사람을 대할 때 전심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대하고, 그 사람의 내면을 보아 숨겨진 갈망을 찾아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눔으로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되도록 돕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요 이유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진실로 살게하는 양식입니다. 전도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열매’가 되도록 돕는 것이며, 교회에서의 사역은 이미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된 사람들 무르익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뿌듯한 보람이 들어차게 하려면, 이 삶의 진실을 늘 기억하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깨닫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간, 한국을 방문하고 온 어느 교우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허락을 받고 여러분과 나눕니다. 집사님은 한국 방문 중에 어느 신앙 집회에 참여하여 그동안 사모하던 성령의 은사를 받고 하나님의 성령의 강한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늦은 밤, 집회가 끝나고 바깥에 나오니 비가 오고 있었고, 집사님은 급히 택시를 잡아 탔습니다.
택시 안에서 자리를 잡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자 택시 기사가 집사님에게 말을 던집니다. “껌이 향기가 좋은데, 혹시 하나 주실 수 있습니까?” 그 때 그분은 딸기 향이 나는 껌을 씹고 있었습니다. 30대 초반의 젊은 기사였습니다. 마지막 한 개 남은 껌을 입에 넣었던 기억에, 집사님은 “어머, 어쩌죠? 남은 게 없는데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기사가 응답합니다. “됐습니다. 저는 재수 없는 놈이거든요. 오늘 하루 종일 재수가 없었는데, 껌 하나 얻어먹을 재수도 없군요. 이렇게 재수 없는 놈 보셨어요?”
집사님은 기사의 반응에 당황했습니다. “아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혹시 있을지 모르니.” 그렇게 말하고 가방을 뒤져 보았더니, 마침 껌 하나가 물건들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껌을 건네며, 집사님은 “자, 이거 보세요. 기사님은 재수가 없는 분이 아니세요”라고 위로했습니다. 껌을 받아 입에 넣으면서 그 기사는 계속하여 신세 한탄을 합니다. 자신은 그동안 내내 재수가 없었다고. 할아버지도 농약을 먹고 자살했고, 아버지도 농약 먹고 자살했으며, 형마져도 몇 년 전에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젊었을 때 당한 사고 때문에 자신은 택시 기사 밖에는 할 일이 없다고. 뿐만 아니라, 몇 년 전에 아이가 태어나면서 큰 병에 걸려 고생했었고, 지금은 아내가 정신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다고. 시키지도 않은 말을 술술 풀어내면서 집사님에게 묻더랍니다. “아주머니, 이렇게 재수 없는 놈 보셨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집사님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그 기사를 자신에게 붙여 주셨다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삶을 비관하며 청년기를 살아왔고 스스로를 ‘재수 더럽게 없는 놈’으로 규정하고 암흑같은 인생을 살던 그 사람에게 성령께서 그 밤에 자신을 보내셨다고 믿어졌습니다. 집사님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스스로를 저주하며 살고 있는 그 젊은이에 대한 긍휼한 마음에 사로잡혀 대화를 나누었고,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 그 기사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그 청년은 ‘재수 없는 놈’이 아니라 ‘재수 있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교회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노라고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집사님은 헤어지면서 그 기사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가지고 내렸고 지금까지 매일 그분의 이름을 불러가며 중보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온전하게 자라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도 전도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잘 되지 않았는데, 그날 밤에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고, 집사님은 고백했습니다. 저는 그 집사님께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께서 집사님을 그 기사에게 천사로 보내신 것입니다. 집사님이 성령의 임재 안에 계셨고, 그 사람을 집사님께 붙여주신 것임을 믿으셨기에 그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머물고 있는 그 성령의 임재가 식지 않도록 더욱 영적 생활에 힘 쓰십시오.”
6.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던지는 진실한 관심과 애정이 때로 이같은 놀라운 이적을 만들어 냅니다. 이같은 일은 예수님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 우리같은 보통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적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만들어 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사람이라고 믿고, 내가 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관심과 사랑과 행동을 사용하셔서, 나로서는 꿈도 꾸어보지 못할 일을 행하십니다. 그 사람을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만드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은 이같은 신비와 이적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나의 작은 관심과 어눌한 말과 어색한 행동이 하나님의 성령의 손에 잡혀 누군가의 아픈 가슴을 위로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데 사용된다면, 그리고 그의 삶을 절망과 무의미의 무덤 안에서 구해내는 데 사용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신비롭고 신나고 가슴 벅차는 것이 되겠습니까? 저는 택시 기사를 전도한 그 집사님의 얼굴 빛에서 신선한 보람으로 충만해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식 투자로 대박이 난다고 그런 보람이 생기겠습니까? 자식이 바라고 바라던 대학에 들어간다고 그런 기쁨이 생기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 한 번 우리 삶을 돌아 보십시다. 길지도 않지만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누구에겐가 진실한 삶의 돌파구를 열어 주는 일에 쓰임 받아 본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과연 나 자신의 손익과 아무 상관 없이, 누군가를 마음 다해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이름 석자도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그 사람이 오직 사람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내 시간을 쪼개어 진실하게 대하고 마음 다해 귀 담아 들어 준 일이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전심을 다해 누구 한 사람이라도 맞아 본 일이 있으며, 그 사람이 자신의 속내를 풀어내고 싶을만큼 진실하게 대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여 한 사람이라도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맺혀진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의 본성은 자꾸만 그 반대로 가도록 이끕니다. 몇 년 전에 헨리 나우엔의 글을 읽고 대오각성한 다음, 저는 일보다는 사람을 우선하며, 누구든 내게 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으로 알고 전심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대하여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되도록 하기 위해 나름대로 힘써 왔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저는 요즈음도 매일 이 문제와 씨름합니다. 사람보다 일을 더 앞세울 때가 있습니다. 내 앞가림을 하기에만 몰두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내면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으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요즈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기회들을 얼마나 많이 흘려 보내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매일 무릎 꿇습니다. 그래서 매일 회개합니다. 그래서 매일 은총을 구합니다.
7.
우리는 8월 한 달 동안 ‘영적 여정에로의 초대’라는 주제를 걸고 전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매 년, 한 달 동안 전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며 이 문제와 씨름할 것입니다. 전도가 그토록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요 이유이며 또한 우리의 양식입니다. 우리의 삶을 진실로 보람되게 해 주는 일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씨름하며 기도하고 실천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전도를 잘 못 해 왔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우선하는 삶의 습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전도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주신 사람들이라고 믿고 전심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전도는 사람을 만날 때 겉 모습뿐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까지 들여다 보고 그 사람의 숨겨진 아픔과 열망을 읽어내는 깊은 관심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전도는 나의 손익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 사람을 도우려는 진실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전도는 그 사람이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되기까지 사랑과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교회에서의 사역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서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익어가도록 지속적으로 돕는 일입니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께서 붙여주시는 사람들을 전심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대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같은 진실한 태도가 없이 전도하는 것은 오히려 전도를 막는 일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에 많은 열매를 맺고 싶으십니까?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식당에서, 골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주신 사람으로 여기고 그렇게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내 책임은 그것 뿐입니다. 일관되게, 그렇게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대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를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거두어 들이실 것입니다. 혹시, ‘전도’라는 말만 들어도 거부감이 드십니까? 그러면 ‘전도’라는 생각을 지워 버리시기 바랍니다. 다만,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만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무어라 이름을 붙이든,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사는 동안 해야 할 일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보람으로 배 부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셔서 이 ‘삶의 진실’에 늘 깨어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각자가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무르 익어가며, 다른 사람들을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되게 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진실로 살게 하는 양식이 우리 인생의 창고에 가득 쌓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잘 못 살아왔습니다.
저희가 헛 된 것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저희의 욕심에 눈 멀어
이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일에 팔려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주님의 마음을 주소서.
주님의 눈을 주소서.
주님의 믿음을 주소서.
저희 자신이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익어가도록
그리고
저희의 이웃을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되게 하도록
저희를 축복하소서.
그리하여
창고에 쌓아둘 수 없는 참된 양식이
저희 삶에 가득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