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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두 개의 영적 전립선-와싱톤 한인교회 김영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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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6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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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영적 전립선”
(Two Spiritual Prostates)
--야고보서 2:14-17

                                                             
                                                           (김 영봉 목사)

1.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플로리다의 잭슨빌에서 열린 The Leading Edge 컨퍼런스에
다녀 왔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오늘 목회 칼럼에 썼습니다만,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미국 내에 있는 연합감리교회 중에서 제일 큰 교회 100교회의
담임목사들의 모임입니다. 캔사스시티에 있는 부활의 교회(The Church of Resurrection)
담임 목사, 아담 해밀톤(Adam Hamilton)이 주도하는 모임입니다.

아담 해밀톤 목사는 1990년, 그의 나이 26세 때, 장례식장(funeral home)의 예배실을 빌려 가족과
함께 교회를 개척합니다. 아직 20년의 역사도 채 되지 않는 그 교회가 지금은 주일 예배 출석
7천명의 교회로 성장했으며, 아담 해밀톤은 미국 연합감리교회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아담 해밀톤 목사는 연합감리교회를 갱신하고 부흥시키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모인 The Leading Edge 컨퍼런스는
그가 연합감리교회의 미래를 위해 시작한 모임입니다.

저는 이 컨퍼런스를 향해 가면서, ‘만일 큰 교회 목사들끼리 모여 어떻게 하면 더 커질까를
두고 논의하는 모임이라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컨퍼런스의 초점은 1) ‘큰 교회로서 작은 교회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2) ‘교단 갱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3) ‘미래의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4) ‘큰 교회의 담임자로서 직면하게 되는 유혹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등이었습니다. ‘우리가 큰 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은 우리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 때문인데,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우리 교회가 지난 8월에 열었던 ‘목회자 영성 수양회’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교우들의 헌금으로 작고 어려운 교회 목회자 25명을 초청하여 2박 3일간
기도와 쉼과 강의로써 재충전할 시간을 마련해 주었으며, 앞으로도 매 년 그렇게 할
생각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 수양회가 끝나고 난 후, 한 목회자가 “제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던 것, 그리고 또 다른 목회자가 “제가 연합감리교회
목사라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을 나누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나눌 때, 좌중에는 “아!”라는 감탄사가 울렸습니다. 전체 참석자 중 한인 목사는
저 하나였고, 흑인 목사가 여섯 명,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백인 목사였는데,
우리 교회의 예가 시간마다 모범적인 예로 거론되었습니다.

2.

그런가 하면, 이 컨퍼런스로 향하는 저의 마음 한 편에서는 저 자신의 목회에 대해 그리고
우리 교회의 영적 상황에 대해 깊은 반성을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지난 8월 한 달을
‘영적 여정에로의 초대’라는 제목으로 정하고 전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 각자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전도할 사람의 이름을 적어 내자고 청을 드렸습니다.
플로리다로 떠나기 전, 지난 월요일,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러
 ‘초청자 봉헌 카드’를 살펴 보았습니다. 봉헌된 카드의 숫자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적지 않게 실망스러웠습니다.

그 이후, 공항에서, 비행기 안에서,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동안에도, 내내, 제 마음
한 공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반성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뭘까? 내가 무엇을
잘 못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반응이 없는 것일까?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
이러한 의문들이 제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현상은 저 자신의 목회와
우리 교회의 영적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불편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씨름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몇 가지, 그 이유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저 자신의 부족함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성도들에게 불러 일으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이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일에도
부족했습니다. 사실, 목회 전략 면에서 저는 아마추어입니다. 저의 부족함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저 자신에게 몹시 부끄럽고 죄송했습니다.

둘째, 저와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의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왔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구령의 열정’(passion for winning souls)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은 목회자의 허물이지만, 그 책임을 모두 목회자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연히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면, 우리의 믿음이 건강한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한 관심은 있는데, 아무리 돌아 보아도 주변에 믿는 사람들
뿐이어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모릅니다. 진실로 그렇다면, 그 사실은 우리가 우리에게
편한 사람들과만 상대해 왔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어쨋든 상관 없고, 나와 내 가족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말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 세 가지의 이유 모두 담임목사인 제게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설교와 목회를
통해 우리가 이미 받은 구원이 나 혼자 누리기에는 너무도 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리지 못했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교회의 본질을 두고 고민하는 컨퍼런스 기간 내내 이 문제를 두고 반성했습니다.
틈틈히 기도할 시간에는 이 문제를 두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해 제가 바른 길을 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3.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들을 저의 반성과 회개에 초청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한 열정에 있어
우리가 부족하다면, 가장 큰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각자에게도 각각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 못한 탓이지, 내 잘못은 없다’는 말로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청합니다. 저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반성과 회개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목회를 ‘영성 목회’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영성 목회’란 개인 개인의
영적 변화와 성장에 초점을 두는 목회를 말합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영성’
즉 영적 차원에 있다고 믿고, 그 차원을 계발시키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서로 사귀고 돕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개인적인 영성 생활과 교회에서의 공동체적인
영성 생활을 통해 개인의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면, 그 결과로써 그 사람의 모든 면에
 변화가 나타날 것이며, 그 사람이 연루된 모든 관계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그 사람이 관련된 모든 영역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한 가지 초점에
집중하는 목회가 영성 목회입니다. 저는 이 목회가 가장 성서적이며 가장 건강하다고
믿습니다. 저의 간절한 바램은 이같은 노력을 통하여 우리 교회가 진정한
‘영성 공동체’가 되고 우리 교회에 속한 교우들 한 분 한 분의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저와 목회자들 모두를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같은
영적 성장과 성숙을 통해 마침내 가정이 변화하고 직장이 변화하며 우리가 속한
사회가 변화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같은 후속적인 변화가 꼭 원리대로, 당연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그같은 변화가 일어날
경우가 많습니다. 막연히 영성 생활을 하다 보면, 오도되기 십상입니다. 바로 여기에
영성 운동의 위험이 있습니다. 잘 못 하면 혼자 ‘도사’가 되고 맙니다. 사실은 도사도
아니면서 도사처럼 행세합니다. 잘 못 하면, 자기 혼자서 영적 황홀경을 즐기고
그것을 전부로 아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현세를 더 깊이
사랑하고 끌어 안는 결과를 가져와야 하는데, 사이비 영적 성장은 현세를 탈피하고
외면하게 만듭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욕심을 내려놓게 하며 소유욕을 포기하게
하고 권위주의를 벗어버리게 만듭니다만, 사이비 영적 성장은 그같은 욕구를 교묘하게
치장하고 즐기게 만듭니다.

오늘의 성서 일과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아주 명쾌하게
밝혀 줍니다. 특히, 17절에서, 예수님의 동생이며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 사도는 분명하게 단언합니다.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영성’을 가리킵니다. ‘행함’은 영성의 변화와
성장에 수반되는 변화를 가리킵니다. 내면의 변화로 인해서 생기는 외면의 변화,
삶의 변화, 관계의 변화, 가정의 변화, 직장 생활에서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같은 변화가 없다면, 그 믿음, 그 영성은 죽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영성이 살아 있다면, 뭔가 삶에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비판하는 일에 이 말씀을 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다. 내게는 믿음의 분량에 맞는 혹은 영성의 깊이에 맞는 외적 변화가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다른 한 편, 이 말씀을 우리 교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에는 믿음의 분량에 맞는 혹은 영성의 깊이에 맞는 외적 변화가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4.

믿음의 분량 혹은 영성의 깊이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외적 변화는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두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이 두 영역은 마치 인간의 장기 가운데
전립선과 유사합니다. 어느 의사분의 말씀을 들으니, 인간의 장기 가운데 약효가 가장 잘
미치지 않는 것이 남성의 전립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 염증이 생기면 항생제
투약 기간을 두 배 정도로 늘려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 중에도 믿음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이 두 영역에서 변화가 나타나면 진실로
영성이 깊어졌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영역이 물질에 대한 태도입니다. 물질이야말로 우리의 ‘영성의 전립선’과
 같습니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욕심은 참으로 뿌리 깊은 것이기 때문에 영성 생활의
깊이와 강도에 비례하여 물질에 대한 태도가 자동적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점점 더 밝히 본다는 뜻이며, 삶의
본질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점점 더 굳게 믿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어려움 중에 있는 이웃을 돌아볼 마음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생기면 의당 자신의 소유에 대한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변화가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가 주일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집을 나서는 아이에게 엄마가
백원짜리 동전을 두 개 쥐어 줍니다. “하나는 헌금 하고, 하나는 과자 사 먹어라.”
아이는 동전 두 개를 손에 꼭 쥐고 룰루 랄라 노래하며 예배당으로 갑니다. 예배당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저 앞에 좋아하는 친구가 보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뛰어가다가,
그만 돌뿌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순간, 손에 쥐었던 백원짜리 동전 하나가 떼구르
굴러 하수구에 빠져 버립니다. 그 동전을 바라보면서 엎어진 아이가 소리칩니다.
“아이구, 내 헌금할 돈이 하수구에 빠졌네!”

참 귀여운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그 날 헌금을 드리지 않고, 나머지 백원으로 과자를
사먹었다 해도, 하나님은 빙긋이 웃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하면서도 물질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칭찬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의 결과는 마땅히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하면서 내 몫의 물질을 다부지게 움켜쥐고 인색한 마음을
풀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에 있어서 전혀 변화가 없다면,
내 믿음이 진실한지 어떤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지갑을 열기에 인색하다면, 내 영성이
건강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4년 전에 참석했던 Spiritual Formation Forum에서 World Vision의 첫 번째 여성
의장이었던 Roberta Hestenes 박사가 한 말이 아직도 제 귀에 메아리칩니다.
“가난의 문제에 대한 태도에 변화를 만들어 내지 않는 영성 운동은 그 어떤
형태의 것이든 속은 것이거나 속이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도 진실이요,
교회적으로도 진실입니다. 영적 성장에 대해 간절하다면, 물질 문제에 있어서
태도를 달리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면, 물질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나의 씀씀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교회와 어려운 이웃을 위한 지출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수입이 증가하고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집도
커지고 자동차도 고급스러워지고 휴가는 점점 더 사치스러워지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뚜렷한 변화가 없다면, 믿음의 맥을 한 번 짚어볼 일입니다.
죽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영성 목회를 제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물질의
부족함을 느끼지 말아야 하며, 교회 바깥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큰 목회를 감당하기 위해 물질이 넘쳐나야 하니다. 우리 교회가
영성 목회에 있어서 어느 정도 결실을 보았다면, 사회의 가난의 문제에 대해 뭔가
구체적인 일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속고 있는 것이거나,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5.

영성의 성숙도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꼭 점검해야 할 두 번째 영역은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것이 또 다른 ‘영성의 전립선’입니다. 믿음이 깊어지고
성숙해지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자라나야 합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지면 그분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분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픔은, 그분을 모르고 그분을 무시한 채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찾게 하고 그분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 관심사를 내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영혼에 이르는 열매’가 되도록 돕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리입니다.

하지만 그 원리가 작동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기심으로
물들어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라면서 사람을 냉정하게 대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천적 이기심과 후천적 무관심을 고치는 일은 말기 암세포를 제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믿음으로는 그 약효가 미치기 어렵습니다.

지난 월요일, 덜레스 공항 대합실에서 잭슨빌 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자리를 잡고는 연락할 곳이 있어서 전화 통화를 하면서 주위를 둘러 보았습니다.
하나같이 다른 사람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책 읽는 사람, 눈 감고 자는 사람, 컴퓨터를 하는 사람, 혹은 휴대 전화로 문자를 보내는
사람 등. 마치, 누구도 내 영역에 침범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 앞에는 어느 백인 남자가 썬글래스를 가방 위에 얹어 놓고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풍채와 옷차림에서 돈 냄새가 풍겼습니다만, 표정은 금방 화를 터뜨릴 것 같아
보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탑승 수속이 시작되었습니다. 1등석에 대한 탑승이 먼저
시작되었는데, 제 앞에 있던 백인 남자가 벌떡 일어나 입구를 향했습니다.
썬글래스를 가방에 그대로 얹어 놓은 채로 끌고 갑니다. 저는 얼른 그 사람 뒤를
따라가 “죄송합니다만, 썬글래스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표정하게 가방에 얹어놓은 썬글래스를 짚어들었습니다. 썬글래스를
뗄 때 보니, 그 가방에는 썬글래스를 떨어지지 않게 붙여놓는 ‘찍찍이’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런 것도 모르는 놈이 무슨 참견이냐?”는 듯,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입구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저는 순간 아주 머쓱해졌습니다. 문득 제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친절 하나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그 사람이 불행해 보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렇습니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나도 마음의 문을 닫고
오직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오직 내 앞가림만 하며 살아야겠다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웬만큼 영적으로 성장해도 잘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왕왕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배 드리러 교회에 왔으면서도
아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아무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아무도 내 눈에는
차지 않는다는 듯, 도도하게 행동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가늠하는 좋은 척도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영혼에 이르는 열매’를
위해 서로를 돌보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잘 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영원에 이르는 열매가 되게 하는 일에 얼마나 잘 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있어서 긍정적인 대답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성 목회는 실패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 서로 사귀고 섬기고 돌보는 따뜻한 분위기가 충분히 조성될 때,
그리고 우리 교회 교우들이 바깥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진실하게 대하는 변화가 충분히 일어날 때, 비로소 우리의 영성 목회가 열매를
맺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진실한 믿음 안에 살기를 원하는 점에서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깊고 풍요로운 영성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우리 교회가 큰 목회를 이루어내는 거룩한 교회,
성숙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점에서 저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함께
이 두 가지의 ‘영적 전립선’을 검토하면서 우리의 영성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가늠해
보십시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그동안 얼마나, 어떻게 변했습니까?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일에 있어서 변화가 있었습니까?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더 너그러워지고 더 기꺼워졌습니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피는 일에 얼마나,
어떻게 변했습니까?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있습니까?
그 관심 때문에 교회에서 사귀고 섬기는 일에 참여하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그 관심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의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내 주변에 믿는 사람들밖에 없으면,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애정과 관심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는 일에 얼마나 시간과 정성을 기우렸습니까?

저는 The Leading Edge 컨퍼런스에 다녀 오면서, 우리 교회가 잘 하고 있는 부분도
많이 있고, 자랑할 것도 많지만, 두 가지의 영적 전립선에 있어서는 아직도 많은 성장이
필요하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가장 큰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한
저의 반성과 고민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 의식을 공유하시는
교우들께, 저의 반성과 회개에 참여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붙들고 씨름하기를 청합니다.

아, 진짜이고 싶습니다. 제대로 믿고 싶고, 제대로 살고 싶고, 제대로 목회하고 싶습니다.  
나 자신에게 아픔이 되고 손해가 되더라도, 제대로 믿는 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걸어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믿고 이렇게 경건의 모양이 요란한데, 정작 “네 믿음은 죽었다”고
판단 받는다면, 저는 얼마나 딱한 사람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렇게 외적으로 잘 되는
것 같고 좋은 소문이 나 있으며 주일마다 북적이는데, 성령께서 사대 교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계 3:1)라는
판단을 받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딱한 사람들이겠습니까?

이 딱한 운명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진실하게 통회하고 회개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희망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을 힘 입어 힘쓸 때, “네 믿음이 살았구나!”
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희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믿음이 부족합니다.
아니, 저희에게 믿음이 없습니다.
저희의 믿음이 죽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물질에 인색하고
영혼에 눈 멀어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소서.
저희의 믿음을 살리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