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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진리는 때로 부담스럽다”(Truth Is Often Burdensome)-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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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8(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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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맺는 교회의 다섯 가지 습관>
네 번째 습관: ‘위험을 감수하는 선교와 봉사’(Risk-taking Mission and Service)
“진리는 때로 부담스럽다”(Truth Is Often Burdensome)
--마가복음 12:38-44


                                                           (김 영봉 목사)

1.

“지난 한 주일 동안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며 살았습니까?”
저는 지난 세 주일 동안 이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에 부담을 드렸습니다.
오늘로 마감되는 Grocery Card Drive를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미국 교회에서는 보통 이 기간
동안에 통조림 음식을 모아서 food bank나 food pantry에 가져다 줍니다만, 저희는 통조림 음식
대신Grocery Card를 모으고 있습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뉴저지에서 만난 리카르도(Ricardo)라는 라티노 형제를
통해섭니다. 당시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 작은 food pantry가 있었습니다. 리카르도는 두 주에
한 번씩 food pantry에 와서 양손 가득 통조림 음식을 담아 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6개월이 넘어서 그 형제가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알고 보니, 심장마비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 받고 나오는 길이랍니다.

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너무 오랫 동안 염분과 방부제가 많은 통조림 음식를 먹고 살았기 때문에
심장 질환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그에게, 더 이상 통조림 음식을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통조림 음식을 모으는 것보다 Grocery Card를
모으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현금(Cash)을 주면 담배나 술 혹은 마약을 위해 사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Grocery Card가 더 안전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미국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헤어나갈 수 없는 올무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지구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뚱뚱한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지난 경제 침체 기간 동안 미국인들의 평균 허리 치수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저도 가끔 fast food 음식점에 들릅니다. 그곳에서 목격하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은 참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들의 옷차림이나 몸집을 보면 그들의 삶의 정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그저 한 끼 양식을 얻는 것, 지금 당장의 허기를 때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몸은 망가지고, 몸과 함께 정신과 영혼도 망가지고, 그로 인해 가정도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자업자득입니다. 그들이 좀 더 부지런히
일하고 규모있게 살았더라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기들이 좋아서 그렇게 살기로
선택한 것인데, 그들을 동정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 이 말씀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난에 대한 두 가지의 진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는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도 헤어나올 수 없는, 늪지 같은 가난의 상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늪지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멀찌감치에 서서 늪지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둘째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기로 선택한 것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가정 환경 때문에, 혹은 자라면서 몸에
배인 습성 때문에, 혹은 그들이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전해받은 가치관 때문에, 혹은 자라는
과정에서 이미 망가져버린 정신과 영혼 때문에, 그렇게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2.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합시다”라고 말씀드리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떨지,
저는 잘 압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은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도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실로, ‘가난’은 우리 모두에게
생각도 하기 싫은 일입니다. 나 스스로 선택하여 살아가는 ‘청빈한 삶’은 즐거운 것일지 모르나,
억지로 ‘내몰린 가난’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일입니다. 그같은 가난은 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거의 ‘악마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을 싫어합니다. 가난한 상황에 있으면 어떻게든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일단 가난에서 빠져 나가고 나면 더 이상 가난에 대해 생각도 하기 싫어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합시다”라는 말로 인해 부담이 생깁니다. 10달러 혹은 20달러짜리
Grocery Card 한 장이 부담스러운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부담은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의식적인 책임감이
있습니다. 특히, 믿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이 내 ‘소유’가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음성이 자꾸 들립니다. 그 음성을 못 들은
척, 안 들리는 척 외면해 왔기 때문에, 누군가 그 음성을 대변하면 부담스럽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합시다”라는 말을 들을 때 마음에 부담을 느낀다는 사실은
우리의 양심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아직도 어느 정도는 정직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부담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여,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이 거룩한 부담감을 적극적으로 끌어 안으십시다. 진리는 때로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부담을 없애려고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 선택은 우리에게 큰 불행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 입어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해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성령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내 삶의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성령과 동행할 때, 우리는
신령한 내적 기쁨을 누리게 되며, 삶의 조건이 변화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에 있어서 ‘받는 차원’입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받는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자라가면서 ‘주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그분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은 삶은 나누는
삶이며 주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있던 곳에 우리의 마음을 두고, 그분의 눈길이 닿았던
곳에 우리의 눈길을 두고, 그분이 생명을 바치셨던 그 일에 우리의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두셨고
눈길을 두셨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눈길도
같은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3.

성서 일과에 따라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두 가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하나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38-40절)이고, 다른 하나는 헌금에 대한
가르침(41-44절)입니다. 이 두 개의 본문을 하나로 볼 때,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유형의
믿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학자들과 같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통해 이익만을 얻으려는 유형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평신도들을 지도해 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그들 중에는 권위있게
보이기 위해 치장하기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즐기며,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위해
하나도 희생하거나 손해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종교를 빌미로 하여 이득을 얻으려
두리번 거립니다.

우리 중에도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로서 말하기 거북한 말씀입니다만,
목회자들 중에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교인들에게는 헌신을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습니다. 선교와 구제에 열심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생활비에서는
한 푼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같은 위선이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두렵고 떨립니다. 평신도들에게서도 이런 유형의 믿음을 발견합니다. 믿음을 위해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얻을 것이 없는지 찾아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같은 ‘받기만 하려는 유형’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40절).

두 번째는 헌금함에 많은 돈을 넣은 부자들과 같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 보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겉으로 보기만 해도 돈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근히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헌금하는지 과시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판정은 달랐습니다.
64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번역한 <메시지>에는 이 구절의 의미가 더 잘 드러나 있습니다.
“All the others gave what they’ll never miss.”(“다른 모든 사람들은 아깝지 않을만큼만 내었다”).

이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 자기 실속만 챙기려는 첫 번째 유형보다는 훨씬 좋아
보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을 위해 나누는 일에 마음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아깝지 않을만큼만, 부담이 되지 않을만큼만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생활에 불편이 생기지 않을 정도만큼만 드린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볼 때 그들이 낸 돈은 큰 돈이었지만, 그들의 금고에 있던 돈에 비하면 그 돈은 없어도
상관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과부와 같은 믿음입니다. 이 여인이 헌금하는 모습에 대해 4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이 구절을
오늘날 미국 상황에 맞게 고쳐 쓰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쿼터
네 개 곧 1달러를 넣었다.” 액수로 따지면 이 여인의 헌금은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준에서는 이 여인이 가장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44절).

부자들과 이 여인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헌금한 돈의 액수에 있지 않았습니다. ‘부담’이
차이였습니다. 부자들은 하나님께 많은 돈을 바쳤지만, 그 돈으로 인해 그들의 삶에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 여인은 비록 액수는 보잘 것 없었지만 그가 가진 전부를
바쳤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살림은 돌보지 않고 돈이
생기는대로 헌금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어 표현으로 하자면
‘Giving until it hurts’ 즉 부담이 될 정도로 드리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 가지 유형 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유형인지 한 번 살펴 보십시다.
믿음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율법학자의 유형인지, 믿음을 위해 부담되지 않을만큼만 희생하는
부자들 유형인지, 아니면 믿음을 위해 희생의 부담을 기꺼이 끌어 안는 과부의 유형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혹시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믿음은 아닙니까? 믿음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앙적으로 좋은 말은 다 해 가면서 혹은 자신의 믿음을 선전하기에 열을 내면서, 자신의 물질은
하나도 손해 보려 하지 않는 ‘신앙적 스쿠루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나 부자들의 믿음과 같은 유형은 아닙니까? 불편한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 아깝지 않을만큼만
나누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아닙니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을 나누면서 대단한 것이라도
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사람까지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모두가 세 번째 유형에 속하면 좋겠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기꺼이
끌어 안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그 부담을 적극적으로 껴안을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같은 거룩한 부담감 그리고 뜨거운 사랑 때문에 때로 부담이 될
정도로 드리고 나누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부담을 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부담을 끌어
안을 수 있는 믿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그 부담을 끌어 안고 부담이 될 정도로 내 손을 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자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이같은 유형의 믿음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들 앞에 설 때마다 목사로서 저는 자신을 돌아보며 저 또한 부담을
끌어안는 삶을 살고자 결단하곤 합니다. 동시에, 거룩한 부담을 끌어 안고,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생명을 기꺼이 나누려는 참된 제자들이 우리 교회에 더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로 우리는 네 주일에 걸쳐 <열매맺는 교회의 다섯 가지 습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슈네지 감독이 제안한 네 번째의 습관은 Risk-taking Mission and Service입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선교와 봉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슈네지 감독이 강조하려는 포인트는 ‘risk-taking’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교회가 선교하고 봉사하되 안전지대를 벗어나 위험과 불편과 부담을 기꺼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따지고 재어 나에게 위험이 안 될 만큼만, 나에게 불편과 부담이 없을
정도까지만 나누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라고 할 수 없고 봉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열매맺는 교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부담과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이며, 열매맺는 교회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부담과 위험을 감수하고 선교하고
봉사하기를 추구하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많아지면 자연히 교회가 그렇게 될 것이며, 또한
교회가 그런 방향으로 나가면 교인들이 자연히 그런 심정을 품게 될 것입니다. 불편하고 부담스럽지만
자꾸만 가난을 이야기하고 선교를 이야기하며 이웃 사랑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나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게 살고, 하나님에게는 마음 다해 헌신하며,
이웃을 위해 넉넉하게 베푸는 변화가 더 깊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5.

오늘은 연합감리교회에서 제정한 Organ and Tissue Donor Sunday, 즉 ‘장기기증주일’입니다.
장기 기증은 위험과 불편을 감수하고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나누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작년 이맘 때,
우리 교회 교우 중에서 다른 사람의 장기를 기증받아 건강하게 살고 있는 교우들 네 분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설교 준비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장기를 기증 받은
이야기만 있는데, 언제쯤 장기를 기증한 사람의 이야기가 생겨날까? 장기 기증 면에서도 우리는
아직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작년의 장기 기증 캠페인 이후 약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첫 번째 기증자가 나왔습니다.
2009년 1월 21일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여인승 군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열 세 살, 그 어린
소년이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장기 기증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 소년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잠시 그 이야기를 보시겠습니다.

(영상)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총명하고 밝고 명랑한 아이, 누구를 만나든, 최고를 주고 싶어하는 아이였습니다! .
2004년,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는 특유의 명랑한 성격으로 잘 적응했고,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그리고 선생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앞날은 마냥 밝고 빛나 보였습니다.
든든한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고, 명석한 두뇌와 맑고 밝은 성격이 있었으니, 무엇이 그 앞길에 장애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이듬 해부터 그가 가끔 약간 이상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체가 두 개로 보인다고
하다가, 이상한 몸짓을 하기도 했습니다.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회수가 잦아집니다.
혹시나 싶어 병원을 찾습니다. 정밀 진단을 한 다음, 의사가 한 말은 청천 벽력이 따로 없었습니다.
뇌종양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수술이 불가능한 부위에 종양이 자라고 있으며, 3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날로부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합니다. 아울러, 혹시나
다른방도가 없을지 싶어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전전합니다. 그러던 중, 시험중에 있는 약물을 시도해
보자는 제안을 받습니다. 한 가닥의 희망을 잡는 마음으로 그 약물을 투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종양으로 인한 고통이 적지 않았는데, 또한 약물 투여 후의 후유증이 적지 않았는데, 인승이는
늘 밝고 명랑하게 지냈습니다. 오히려 그를 치료하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웃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의사의 말)

인승이의 상태가 한참 안 좋아지고 살 가망이 점점 희미해 질 즈음에 그는 가족들에게 형을통해
보낸 유서에 이렇게 적어습니다.

“요즘 내가 Useless 해진 사람같이 사는것 같아. 화장실 혼자가는것도 힘들고 ……. 참 약해졌다.
그치……이제 아무것도 혼자 못하는 나. 나 병원에서 수술하면않돼? 살 찬스가 1%라도 그래두
 하고싶다. 병원에서 수술받다가 죽으면 그래도 기쁘게 죽을것 같은데”

유서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형, 손톱만큼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마지막으로 수술을 한 번
받아보고 싶어. 수술을 못 받으면, 다른 사람에게 심장같은 것이라도 주고 죽고 싶어.” 알고 보니,
작년 11월에 교회에서 장기기증을 위한 캠페인을 했는데, 인승이가 그것을 보고는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열 세 살짜리의 어린 아이가 자신의 죽음을 내다 보면서 장기를 기증할 결심을 하다니! 그는
어리지만 성숙했고, 믿음의 초보에 있었지만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 병원에서 그의 시신을 옮겨 심장과 신장과 각막과 연골을 떼내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시술했습니다. 그는 죽어서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렸고, 두 사람의 앞 못 보는 사람에게
광명을 안겨 주었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제, 인승이가 떠난지, 두 달이면 1주기가 됩니다. 인승이가 떠난 다음, 그 아버지는 여전히 새벽
제단을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목숨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것을 나누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죽고 나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인승이가 그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승이가 세상을 떠나고 병원에 실려간 지 이틀 후, 그의 시신은 말끔한 모습으로 funeral home에
안치되었습니다. 주요 장기를 기증한 상태이지만, 그를 그리는 모든 이들이 말끔하게 정돈된
그의 모습을보며 viewing을 마쳤고,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우리는 앏니다. 그의 심장은 지금도 누군가의 몸 속에서 힘차게 약동하고, 그의 각막은 누군가의
눈 안에서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밝게 웃으며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물질로 아낌없이 사랑하고, 죽어서
남은 것을 다 주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7.

어린 인승이의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줄 믿습니다. 아직도 그를 생각하며
눈물짓는 부모님 그리고 형제 그리고 가족들에게 하늘의 위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인승이의
이야기는, 죽고 나서까지 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내놓기를 꺼리는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의 짧은 생애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는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인승이의
부모님이 기꺼이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자식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내준다는 것이 막상 닥치면 부담스럽고 불편하며 피하고 싶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본능적인 거부감을 억누르고 아들의 뜻을 따른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여인과 같이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부담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이 말씀은 저 자신에게도 부담스럽습니다.
우리에게는 죽기 전에는 결코 완전히 뿌리 뽑히지 않는 이기심이 있기에 이런 말씀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부담을 불편해 하고 벗어 버리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성부 하나님,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지금도 진실한 신자들을 깨워 일으키셔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돌보도록 이끄시는 성령,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고 또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거룩한 부담을 떨쳐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부담을 끌어
안으셨기에 우리가 오늘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 거룩한 부담 앞에서 거북해 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탐욕의 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했던
그 ‘거룩한 영’이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임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안고 우리에게 주신 것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마음껏 나누며, 죽고 나서도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주신 주님,
저희를 이기심의 감옥에서 해방시키소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일이,
이웃을 돕는 일이,
저희에게는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오, 주님,
십자가를 묵상하며
십자가를 통해 배우게 하소서.
낮아지고
섬기고
베푸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