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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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2
우리 가족은 여덟 식구에서 3명이 살아서 탈북 했고,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다. 저의 아버지는 6형제를 키우기 위해서 굶어 죽어가는 우리 모습을 지켜보다가 목숨 걸고 중국에 가 식량을 가져온 것이 죄가 되어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할머니와 저의 두 남동생이 제 옆에서 굶어 죽었다. 저의 언니도 아버지 대신 저의 형제들 살리기 위해서 식량을 구하려 떠났다가 행방불명이 되어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것이 탈북자 조진혜 씨 가족의 슬픈 이야기다.
조진혜 씨는 이렇게 들려준다.’시골에서 양을 몰던 어린 소녀 아이가 미국까지 오게 됐고요. 이 미국에서 자유스럽게 내가 하고 자 했던 공부를 할 수 있고 또 내가 마음껏 소리 지르면서 전하고 싶었던 북한 안의 실태를 전할 수 있는 그런 준비가 된 사람이 됐다고 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탈북자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지금은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자유인이 된 것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 탈북인 조진혜의 미국 삶의 이야기 2부 ‘탈북자가 자유를 찾았어요.’를 함께한다.
조진혜 씨는 언제 자유를 향해 미국에 왔을까? 그리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진혜: 제가 10살에 처음 탈북 해서 4번이나 강제북송 당하면서 중국에서 10년 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도 3월 21일 드디어 동생,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도착했고요. 그때 딱 도착했을 때는 당황했어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까 나무들이 많고 사이에 몇 개씩 집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탈북자라고 시골에다 데려다 주는 게 아닌가 하는 겁난 생각도 나고요. 비행장에서 내려 번쩍거리는 비행장 구경하면서 윤요한 목사님이 뛰어와서 울면서 저희를 안고 너무 잘 왔다고 그러실 때 너무 뭉쿨 했고 너무 감동적이고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진짜 미국이라는 나라에 오기는 왔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들떠 있었습니다.
조진혜 씨가 그렇게 그리던 자유의 나라 미국땅을 밟았을 때 소감을 어떠했을까?
조진혜: 미국이라는 것이 내려서 실감이 안 났어요. 울면서 담담한 기분이었는데 차를 타고 윤 목사님하고 같이 가면서 양 옆에 거리에 미국말로 된 매점들 북한말로는 상점들이 있는 거예요. 보면서 지나가면서 미국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식당 들어가니까? 미국 사람들이 영어로 대화할 때 그때 정신이 드는 것 같았어요. 아, 내가 진짜 중국이 아니고 진짜 미국에 왔구나! 이제는 여기서 소리 질러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잡혀갈 수 있는 그런 위험은 없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제일 미국에 왔다고 느껴진 게 한 1년 지나선 가 자동차 속도를 위반해 경찰에 걸렸어요. 걸렸는데 어머니가 옆에서 울상이 되어서 어떻게 하느냐고 잡혔다고 야단하시는 거예요. 제가 어머니를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웃으면서 그랬어요. 어머니 여기 미국인데요.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그렇지 잡힐 것 없겠구나! 그러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때 경찰이 와서 운전면허증을 달라고 할 때 제가 지갑을 열고 운전면허증을 경찰에게 주고 보험카드도 주면서 그분이 이름을 적고 물어볼 때 내가 진짜 자유가 됐구나! 나도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게 속해있고 신분이 있는 사람이구나 누군가가 누구냐고 물어봤을 때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뭔가를 줄 수 있구나! 그때가 제일 미국에 왔다고 느껴졌고 자유라고 생각했을 때인 것 같아요.
조진혜 씨는 미국에 온 지 한 1년 지나서 2009년도에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것으로 기억된단다.
조진혜: ID라는 사진을 찍고 메일로 받았을 때 딱 받고선 저는 혼자서 울었었어요. 그 ID를 쥐고 나도 모르게 쓸쓸하게 울고 싶었어요. 울면서 평생에 20여 살 살면서 처음 이런 증명을 받았거든요. 아 나도 미국 사람이 됐구나! 그런 기분 때문에…왜 울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울었었어요.
조진혜 씨에게 어린 시절 북한에서 어떻게 공부했는지 물어봤다. 저의 형제들은 머리가 비상했다고 자랑한다.
조진혜: 네 학교는 제가 참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자랑이라면 자랑이겠는데 저의 6형제가 머리가 비상했어요. 저의 언니도 항상 1등만 했고, 저의 오빠도 그랬고 저도 공부는 혼자서 집에서 자습하면서 굉장히 잘했었거든요. 그렇지만 공부라는 거에 대해서 학교에 간다는 것은 저에게는 사치였어요.
조진혜 씨의 미국에서 주경야독의 이야기는 자랑스럽다!
조진혜: 지금 미국에 와서 참 신기하고 감사한 게 나이가 많아 공부할 기회가 지났음에도 갈 수 있는 학교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사는 주위에서 제 수준에 맞게 시험을 봐서 공부할 수 있는 그런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있고요. 지금은 방학이라 잠시 쉬고 있는 중이고 일은 낮에 9시 반부터 5시까지 일하는데요. 저의 할머니가 제 옆에서 굶어 돌아가신 게 항상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여기서 할머니들을 보면 마음 한구석에 슬픈 게 있어요. 그런데 마침 미국에 와서 일자리를 잡은 게 할머니들 노년에 병이 있으시거나 혼자 은신하기 힘든 할머니들을 돕는(Care) 회사에요. 그래서 직접 할머니 집에 가서 돕는 일을 시작해서 지금은 승진해서 사무실(Office)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고요.
조진혜 씨는 죽음의 길목에서 살아나 이제 자유인이 되었고 몇 년 전에는 부시 대통령을 만난 이야기는 을시년스럽다. 부시 대통령에게 탈북자 강제 북송을 중단하게 해 달라고 호소했단다.
조진혜: 만나는 그 순간까지, 부시 대통령이 들어오는 순간까지 조금 떨렸어요. 뭐 대통령이니까 무시무시하고 그렇지 않을까 많이 생각했는데 사실 보니까 너무 따뜻하고 너무 인정이 있으신 분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이것이 기회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는데 주어진 시간이 2분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하다가 단도직입적으로 한마디를 했지요. ‘탈북자 강제 북송 중단해 주시고… 쭉 이야기했더니’ 다 들으시고 눈물이 글썽하시면서 안아 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당근과 채찍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많이 노력할 거다 라고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또 저의 가족사항을 간단히 여쭤보셔서 말씀 드렸는데 원래 2분이란 시간을 받았었는데 거의 4-5분 동안을 할애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간단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말을 드렸더니 노력해 주시겠다던 그 말씀이 너무나 감사했던 것 같아요.
조진혜 씨는 계속해서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와 미국의 수도에 있는 중국대사관 앞에서 단식 투쟁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진혜: 헤어지고 한 2백 명 앞에서 연설하시면서 모하메드라는 다른 나라 인권유린을 당한 분하고 저를 소개해 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났는데 저한테 손짓하시면서 하신 이야기가 ‘우리는 인권유린을 당한 북한동포들 편에 서고 북한 김정일이가 벌인 악한 행동에 조준에 선에 설 것이다.’라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통역원이 번역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감사했어요. 눈물이 나고 그렇게 헤어졌는데…. 부시 대통령이 며칠 만에 중국에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걸 들으면서 생각을 했어요. 정말 이분이 중국을 가시는데 이때 중국이 올림픽을 하다고 굉장히 들떠 있는 상황인데 솔직히 탈북자로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있는 중국에 숨어 사는 탈북자들은 정말 두렵고 떨리고 무서운 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중국에서 올림픽 때문에 탈북자들을 강제로 북송 시키는 게 많아졌고, 불법체류자들을 체포하는 데 더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생각하는 게 기도를 하자! 기도해서라도 하나님이 움직이시면 뭔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중국에서 친구한테 연락이 왔어요. 몇 명이 잡혔고 자기 친구들이 잡혀서 북송 되는데 이번에 북송 되면 가망이 없을 것 같다. 두 번째로 잡혔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힘도 부족하고 하니까 동복 같은 거 하나 쓰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중국대사관(미국 수도 워싱턴 소재) 앞에 가서 앉아라도 있자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희문 목사님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밤에도 오시고 박영걸 목사님이라고 제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인데 24시간을 저를 지켜 주셨어요. 그러면서 금식기도로 단식 투쟁을 시작했고, 그 단식 투쟁을 하면서 많은 기도 응답을 받았고 하나님이 살아 역사 하신다는 것도 느끼면서 거기서 보름 동안을 있었습니다. 지나가고 오는 사람들이 텐트를 사줘서 텐트 안에 들어가 있게 됐고 이불 사다 주시는 분들, 매일 물 사다 주시는 분들, 햇볕이 뜨겁다고 비가 온다고 우산 가져다 주시고 밤이면 미국 목사님들 한국 목사님들 오셔서 기도해 주시고 해서 그 덕분에 따뜻한 사랑 많이 받았어요. 또 단식 투쟁 끝나고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해서 이희문 목사님이 계셨던 하나 교회에 있을 때 신문이 났어요. 그 신문에 보니까? 부시 대통령이 다른 동남아시아에 갔을 때 탈북자 강제 북송을 공개적으로 거론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게 기도 응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조진혜 씨의 소망은 이렇다. 전 세계 지도자에게 인권 부재에 있는 탈북자들을 위해 힘써 달라고 부탁한다.
조진혜: 인간으로서 다른 부탁이 없고 탈북자들은 단지 먹고 살 수 있고 내 가족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정말 자유가 어떤 것인지 느끼면서 살고 싶어서 하는 그런 소원밖에 없는데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초보적인 이런 소원 하나 이루지 못하는 탈북자들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시고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면서 도와주시는 분이 대통령이 되시고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진혜 씨는 신참 탈북자들을 위해 봉사할 것도 다짐한다.
조진혜: 미국에 정착한 탈북 인들이 언어도 다르고 하니까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힘들게 정착을 하면서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까? 제가 살고 있고 경험했던 그 경험을 가지고 탈북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주위의 탈북자 분들을 조금씩 도와주고 있고요. 또 헌금으로나 여유가 되시는 분들이 누군가를 돕고 싶어하신 분들을 만나게 되면 탈북자 분들과 연결해 드려서 조금씩 급할 때, 차가 고장이 났는데 수리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 이런 상황일 때 도와드리는 그런 일을 하고 있고요.
조진혜 씨의 또 다른 꿈은 북한에 자유가 도래되도록 기도하고 있단다.
조진혜: 제가 미국에 온 목적은 나 같은 탈북자 나 같은 동생의 입장이 됐고 나 같은 자식의 입장이 된 탈북자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어요. 왜냐면 제가 어린아이들을 보면 굶어 죽은 동생이 생각나고 중년 남자분을 보면 우리 아빠도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 할머니도 항상 보고 싶고 언니도 보고 싶고 해서 항상 꿈을 꿔도 아직은 북한에 있어요. 그래서 아직도 무서워서 식구들 굶어 죽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그런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육체는 자유를 가졌지만, 아직 정신적으로 마음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아직 못 얻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탈북자들이 너무나 많고 하니까 그런 탈북자가 더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크게 소개해 드릴 수 있는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수잔 숄티나 이희문 목사님 윤요한 목사님들의 하시는 일에 같이 동참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나 북한을 모르는 분들에게 북한을 알리고 그분들의 마음이 북한 쪽으로 향해서 북한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기도라고 더 해 주실 수 있도록 그분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고 조금씩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 탈북인 조진혜의 미국 삶의 이야기 2부 ‘탈북자가 자유를 찾았어요.’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조진혜 씨는 이렇게 들려준다.’시골에서 양을 몰던 어린 소녀 아이가 미국까지 오게 됐고요. 이 미국에서 자유스럽게 내가 하고 자 했던 공부를 할 수 있고 또 내가 마음껏 소리 지르면서 전하고 싶었던 북한 안의 실태를 전할 수 있는 그런 준비가 된 사람이 됐다고 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탈북자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지금은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자유인이 된 것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 탈북인 조진혜의 미국 삶의 이야기 2부 ‘탈북자가 자유를 찾았어요.’를 함께한다.
조진혜 씨는 언제 자유를 향해 미국에 왔을까? 그리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진혜: 제가 10살에 처음 탈북 해서 4번이나 강제북송 당하면서 중국에서 10년 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도 3월 21일 드디어 동생,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도착했고요. 그때 딱 도착했을 때는 당황했어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까 나무들이 많고 사이에 몇 개씩 집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탈북자라고 시골에다 데려다 주는 게 아닌가 하는 겁난 생각도 나고요. 비행장에서 내려 번쩍거리는 비행장 구경하면서 윤요한 목사님이 뛰어와서 울면서 저희를 안고 너무 잘 왔다고 그러실 때 너무 뭉쿨 했고 너무 감동적이고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진짜 미국이라는 나라에 오기는 왔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들떠 있었습니다.
조진혜 씨가 그렇게 그리던 자유의 나라 미국땅을 밟았을 때 소감을 어떠했을까?
조진혜: 미국이라는 것이 내려서 실감이 안 났어요. 울면서 담담한 기분이었는데 차를 타고 윤 목사님하고 같이 가면서 양 옆에 거리에 미국말로 된 매점들 북한말로는 상점들이 있는 거예요. 보면서 지나가면서 미국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식당 들어가니까? 미국 사람들이 영어로 대화할 때 그때 정신이 드는 것 같았어요. 아, 내가 진짜 중국이 아니고 진짜 미국에 왔구나! 이제는 여기서 소리 질러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잡혀갈 수 있는 그런 위험은 없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제일 미국에 왔다고 느껴진 게 한 1년 지나선 가 자동차 속도를 위반해 경찰에 걸렸어요. 걸렸는데 어머니가 옆에서 울상이 되어서 어떻게 하느냐고 잡혔다고 야단하시는 거예요. 제가 어머니를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웃으면서 그랬어요. 어머니 여기 미국인데요.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그렇지 잡힐 것 없겠구나! 그러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때 경찰이 와서 운전면허증을 달라고 할 때 제가 지갑을 열고 운전면허증을 경찰에게 주고 보험카드도 주면서 그분이 이름을 적고 물어볼 때 내가 진짜 자유가 됐구나! 나도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게 속해있고 신분이 있는 사람이구나 누군가가 누구냐고 물어봤을 때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뭔가를 줄 수 있구나! 그때가 제일 미국에 왔다고 느껴졌고 자유라고 생각했을 때인 것 같아요.
조진혜 씨는 미국에 온 지 한 1년 지나서 2009년도에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것으로 기억된단다.
조진혜: ID라는 사진을 찍고 메일로 받았을 때 딱 받고선 저는 혼자서 울었었어요. 그 ID를 쥐고 나도 모르게 쓸쓸하게 울고 싶었어요. 울면서 평생에 20여 살 살면서 처음 이런 증명을 받았거든요. 아 나도 미국 사람이 됐구나! 그런 기분 때문에…왜 울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울었었어요.
조진혜 씨에게 어린 시절 북한에서 어떻게 공부했는지 물어봤다. 저의 형제들은 머리가 비상했다고 자랑한다.
조진혜: 네 학교는 제가 참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자랑이라면 자랑이겠는데 저의 6형제가 머리가 비상했어요. 저의 언니도 항상 1등만 했고, 저의 오빠도 그랬고 저도 공부는 혼자서 집에서 자습하면서 굉장히 잘했었거든요. 그렇지만 공부라는 거에 대해서 학교에 간다는 것은 저에게는 사치였어요.
조진혜 씨의 미국에서 주경야독의 이야기는 자랑스럽다!
조진혜: 지금 미국에 와서 참 신기하고 감사한 게 나이가 많아 공부할 기회가 지났음에도 갈 수 있는 학교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사는 주위에서 제 수준에 맞게 시험을 봐서 공부할 수 있는 그런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있고요. 지금은 방학이라 잠시 쉬고 있는 중이고 일은 낮에 9시 반부터 5시까지 일하는데요. 저의 할머니가 제 옆에서 굶어 돌아가신 게 항상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여기서 할머니들을 보면 마음 한구석에 슬픈 게 있어요. 그런데 마침 미국에 와서 일자리를 잡은 게 할머니들 노년에 병이 있으시거나 혼자 은신하기 힘든 할머니들을 돕는(Care) 회사에요. 그래서 직접 할머니 집에 가서 돕는 일을 시작해서 지금은 승진해서 사무실(Office)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고요.
조진혜 씨는 죽음의 길목에서 살아나 이제 자유인이 되었고 몇 년 전에는 부시 대통령을 만난 이야기는 을시년스럽다. 부시 대통령에게 탈북자 강제 북송을 중단하게 해 달라고 호소했단다.
조진혜: 만나는 그 순간까지, 부시 대통령이 들어오는 순간까지 조금 떨렸어요. 뭐 대통령이니까 무시무시하고 그렇지 않을까 많이 생각했는데 사실 보니까 너무 따뜻하고 너무 인정이 있으신 분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이것이 기회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는데 주어진 시간이 2분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하다가 단도직입적으로 한마디를 했지요. ‘탈북자 강제 북송 중단해 주시고… 쭉 이야기했더니’ 다 들으시고 눈물이 글썽하시면서 안아 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당근과 채찍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많이 노력할 거다 라고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또 저의 가족사항을 간단히 여쭤보셔서 말씀 드렸는데 원래 2분이란 시간을 받았었는데 거의 4-5분 동안을 할애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간단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말을 드렸더니 노력해 주시겠다던 그 말씀이 너무나 감사했던 것 같아요.
조진혜 씨는 계속해서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와 미국의 수도에 있는 중국대사관 앞에서 단식 투쟁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진혜: 헤어지고 한 2백 명 앞에서 연설하시면서 모하메드라는 다른 나라 인권유린을 당한 분하고 저를 소개해 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났는데 저한테 손짓하시면서 하신 이야기가 ‘우리는 인권유린을 당한 북한동포들 편에 서고 북한 김정일이가 벌인 악한 행동에 조준에 선에 설 것이다.’라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통역원이 번역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감사했어요. 눈물이 나고 그렇게 헤어졌는데…. 부시 대통령이 며칠 만에 중국에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걸 들으면서 생각을 했어요. 정말 이분이 중국을 가시는데 이때 중국이 올림픽을 하다고 굉장히 들떠 있는 상황인데 솔직히 탈북자로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있는 중국에 숨어 사는 탈북자들은 정말 두렵고 떨리고 무서운 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중국에서 올림픽 때문에 탈북자들을 강제로 북송 시키는 게 많아졌고, 불법체류자들을 체포하는 데 더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생각하는 게 기도를 하자! 기도해서라도 하나님이 움직이시면 뭔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중국에서 친구한테 연락이 왔어요. 몇 명이 잡혔고 자기 친구들이 잡혀서 북송 되는데 이번에 북송 되면 가망이 없을 것 같다. 두 번째로 잡혔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힘도 부족하고 하니까 동복 같은 거 하나 쓰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중국대사관(미국 수도 워싱턴 소재) 앞에 가서 앉아라도 있자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희문 목사님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밤에도 오시고 박영걸 목사님이라고 제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인데 24시간을 저를 지켜 주셨어요. 그러면서 금식기도로 단식 투쟁을 시작했고, 그 단식 투쟁을 하면서 많은 기도 응답을 받았고 하나님이 살아 역사 하신다는 것도 느끼면서 거기서 보름 동안을 있었습니다. 지나가고 오는 사람들이 텐트를 사줘서 텐트 안에 들어가 있게 됐고 이불 사다 주시는 분들, 매일 물 사다 주시는 분들, 햇볕이 뜨겁다고 비가 온다고 우산 가져다 주시고 밤이면 미국 목사님들 한국 목사님들 오셔서 기도해 주시고 해서 그 덕분에 따뜻한 사랑 많이 받았어요. 또 단식 투쟁 끝나고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해서 이희문 목사님이 계셨던 하나 교회에 있을 때 신문이 났어요. 그 신문에 보니까? 부시 대통령이 다른 동남아시아에 갔을 때 탈북자 강제 북송을 공개적으로 거론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게 기도 응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조진혜 씨의 소망은 이렇다. 전 세계 지도자에게 인권 부재에 있는 탈북자들을 위해 힘써 달라고 부탁한다.
조진혜: 인간으로서 다른 부탁이 없고 탈북자들은 단지 먹고 살 수 있고 내 가족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정말 자유가 어떤 것인지 느끼면서 살고 싶어서 하는 그런 소원밖에 없는데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초보적인 이런 소원 하나 이루지 못하는 탈북자들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시고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면서 도와주시는 분이 대통령이 되시고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진혜 씨는 신참 탈북자들을 위해 봉사할 것도 다짐한다.
조진혜: 미국에 정착한 탈북 인들이 언어도 다르고 하니까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힘들게 정착을 하면서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까? 제가 살고 있고 경험했던 그 경험을 가지고 탈북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주위의 탈북자 분들을 조금씩 도와주고 있고요. 또 헌금으로나 여유가 되시는 분들이 누군가를 돕고 싶어하신 분들을 만나게 되면 탈북자 분들과 연결해 드려서 조금씩 급할 때, 차가 고장이 났는데 수리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 이런 상황일 때 도와드리는 그런 일을 하고 있고요.
조진혜 씨의 또 다른 꿈은 북한에 자유가 도래되도록 기도하고 있단다.
조진혜: 제가 미국에 온 목적은 나 같은 탈북자 나 같은 동생의 입장이 됐고 나 같은 자식의 입장이 된 탈북자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어요. 왜냐면 제가 어린아이들을 보면 굶어 죽은 동생이 생각나고 중년 남자분을 보면 우리 아빠도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 할머니도 항상 보고 싶고 언니도 보고 싶고 해서 항상 꿈을 꿔도 아직은 북한에 있어요. 그래서 아직도 무서워서 식구들 굶어 죽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그런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육체는 자유를 가졌지만, 아직 정신적으로 마음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아직 못 얻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탈북자들이 너무나 많고 하니까 그런 탈북자가 더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크게 소개해 드릴 수 있는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수잔 숄티나 이희문 목사님 윤요한 목사님들의 하시는 일에 같이 동참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나 북한을 모르는 분들에게 북한을 알리고 그분들의 마음이 북한 쪽으로 향해서 북한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기도라고 더 해 주실 수 있도록 그분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고 조금씩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 탈북인 조진혜의 미국 삶의 이야기 2부 ‘탈북자가 자유를 찾았어요.’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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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재미 탈북인 조진혜의 미국 삶의 이야기 1부 ‘자유통일 감사 상을 드려요’ (0) | 2012.02.25 |
[세계의 한국인] 세계북한인총연맹 안찬일 총재의 삶의 역정 ③ '자유의 북한으로 창조하련다' (1) | 2012.02.20 |
[세계의 한국인] 세계북한인총연맹 안찬일 총재의 삶의 역정 ② '젊음으로 박사 학위를 따냈다' (0) | 2012.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