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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백두산과 한라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새해가 되면 한국에서는 새해맞이 산행을 많이 하지요? 멀리도 가고 가까운 산에도 갈 텐데, 오늘 이 시간에는 새해 정취를 느끼면서 백두산을 오르고 한라산을 오르는 대신 두 산에 얽힌 역사와 문학예술적인 향기에 대해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이야기 나눕니다.

임채욱 선생: 네, 좋은 생각입니다. 새해 초가 되면 저도 새해맞이 산행을 많이 했습니다. 백두산도 오르고 한라산도 올랐지만 적설기, 그러니까 눈 오는 시기의 백두산이나 한라산은 올라보지 못했지요. 그래서 오늘은 상상으로나마 한 번 올랐으면 싶군요. 겨울의 백두산은 눈으로 덮인 장대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천지호반은 얼어붙었고 초목은 숨을 멈춘 듯 하지요. 눈 쌓인 적설기 한라산도 백록담 설경을 포함해서 장관이지요.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이라 하고 한라산을 신선이 사는 산이라고 하는데 두 명산의 이름부터 새겨볼까요?

임채욱 선생: 백두산은 <산해경>이란 중국 문헌에 불함산으로 나옵니다만 우리나라 책으로는 <삼국유사>에 태백산으로 나오지요. 그밖에도 개마대산, 도태산, 백산 등등으로 나오다가 고려 광종왕 때 “여진족을 백두산 바깥쪽에 살게 했다”면서 백두산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나옵니다. 백두산이란 이름은 산꼭대기가 사계절 내내 흰 눈으로 덮여 있을 뿐 아니라 산 정상부근이 흰색 나는 돌로 돼 있으니 백두란 이름이 맞는 것이지요.

한라산은 금강산, 지리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이지요. 그 이름 한라는 은하수를 끌어당긴다는 뜻입니다. 산꼭대기에 서면 은하수를 끌어당길 것 같이 신비스럽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지요. 한라산이란 이름 이전에도 영주산, 부라산, 혈망봉 등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백두산이나 한라산은 역사상 어떻게 기록됐으며 인식됐습니까?

임채욱 선생: 백두산은 이제 말했듯이 <삼국유사> 기록처럼 태백산으로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 온 산으로 인식되지요. 그러니까 단군신화가 태어난 성산이 되고 신화대로라면 우리민족이 태어난 발상지가 되는 것이지요. 백두산을 둘러싸고는 동쪽에 옥저, 서쪽에 부여, 북쪽에 읍루, 동북쪽에 숙신, 서남쪽에 고구려가 있었다고 보겠습니다. 이후 대체로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있었고 발해 영토 안에 있었지요. 우리민족뿐 아니라 거란족이나 여진족도 백두산을 자기민족 발상지로 신성한 곳이라 여겨왔지요. 그런데 고구려가 망한 뒤 통일신라나 고려에서 백두산을 강역밖에 두고 있었지요. 하지만 백두산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고려 광종 때 백두산이라 한 것처럼 백두산을 인식했으며 조선조에서는 세종대왕 때 6진을 개척하면서 백두산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최근 북한에서는 천지호반 향도봉 소분지에서 조선시대 제단을 발견했다고 합니다.(천리마 2018년 12월호) 36m 정도의 사각형에 윗면은 길이 15m, 너비12m, 높이 9m가 되는 제단 터에 20여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조선조 초에 여기에서 나라 힘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발견입니다.

한라산에 대한 역사기록은 어떻게 나옵니까?

임채욱 선생: 한라산은 지리상 제주도 전 지역을 지배하는 거나 같지요. 역사기록으로는 중국 역사책 <사기>에 서기전 200년쯤 영주산을 비롯한 삼신산에 불로초라는 약초를 구하려 서불이라는 신하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영주산이 한라산이지요. 한라산은 11세기 초에 두 차례에 걸쳐 화산폭발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 뒤 몽골군이 고려 삼별초군을 뒤쫓아 한라산록까지 따라 붙은 패배의 기록도 있습니다. 한라산은 태풍의 길목에서 우리나라 남부내륙지방을 지켰지만 정작 산언저리 주민들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 이 땅 주민들에 의한 고려, 조선조 때 민란만도 수 십여 차례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백두산을 오른 산행기록, 등정기록은 어떤 것이 있나요?

임채욱 선생: 백두산을 오른 산행기록은 지금으로부터 한 255년 전이 되는 조선시대 영조왕 때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서기 1764년이 되는데 함경도에 살던 선비 박종이란 사람이 백두산을 직접 오른 뒤 남긴 기록이 있습니다. <백두산유록>이라고 하는 이 글에는 이 해 여름 그러니까 음력으로 5월 14일에 함경북도 경성군, 지금으로 치면 김책시가 되겠는데 이 경성군에 사는 박종 이 사람이 집을 떠나 부령, 무산, 풍파, 천평 등을 거쳐 23일에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랐고 6월 2일에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말을 타고 움직였으나 18일이 걸렸고 1322리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남겨서 그렇지 이 사람 이전에도 백두산을 오른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역사가 되기 어려운 것이지요.

제주 한라산 정상부 백록담에서 등산객들이 경관을 감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라산에 대한 문학적 기록, 등정기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조선시대 김상헌(金尙憲)이란 사람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스리려고 왔다가 기록한 <남항일지>(南航日誌)가 있습니다. 그때가 1601년 9월인데 한라산에 올라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글을 짓기를 “금강산과 묘향산은 이름만 높을 뿐, 한라산의 기이하고 수려함에는 따라오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선조왕의 일곱째 아들인 이건이 글을 남기기를 “한라산에는 곰, 호랑이, 이리 같은 짐승은 없고 소나 말은 자라고 사슴은 놀랍게도 번식을 잘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조선조 말 항일을 한 면암 최익현은 1875년 3월 한라산을 오른 뒤 <한라산기>라는 글을 남겼는데 그는 산은 도중에서 포기하면 뜻을 이룰 수 없으므로 인고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백두산의 시적 묘사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시로 표현된 백두산은 고려 때 문인 이색으로부터 나타납니다. 이색은 “솟아오른 장백산과 험준한 철령관이 수천리에 가로놓여 있으니...”라는 표현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육진개척의 주역이던 김종서장군이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라는 시구를 읊고 남이장군은 “장검을 빼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라고 읊었습니다.

한라산에 대한 시적묘사도 언급해 주시죠.

임채욱 선생: 임관주란 사람이 귀양에서 풀려 돌아가기 전 한라산을 오릅니다. 그때가 영조왕 때, 1767년입니다. “푸른 바다는 넓고 넓어 아득한데/ 한라산은 그 위에 떠있네/ 흰사슴과 신선이 기다리는/ 이제야 그 상봉에 올랐네.

광복을 전후하여 백두산이나 한라산을 현대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은 언급되지를 못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한 번 다뤘으면 좋겠군요.

임채욱 선생: 네, 좋지요. 아주 많은 작품이 소개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단 문학뿐 이겠습니까. 음악도 있고 회화작품도 있고 연극 작품도 있을 것입니다. 백두산이 온 민족의 산이듯이 한라산도 제주도 주민만의 산이 아니라 이제는 세계 사람의 산이 됐습니다. 사실 지난 9월 남쪽 대통령 일행이 백두산을 북한쪽에서 오른 것을 보고 부러웠습니다. 당초 남쪽 대통령은 퇴임한 뒤 백두산과 개마고원을 걷고 싶다고 말했는데, 소원이 빨리 이뤄진 셈이지요.

마지막으로 중요한 지적 한 가지 하겠습니다. 한라산을 말할 때 보통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호남정맥으로 연결되고 그 호남정맥상의 무등산, 월출산을 거쳐 해남에서 남해바다를 건너 한라산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이익이란 학자가 백두산을 우리 산의 근원을 백두산이라고 하면서 부터인데 사실상 한라산은 지질학상 육지의 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바다위에 솟은 한라산은 그 자체로 존엄한 산이지 백두산에 종속될 없는 산입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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