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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국제영화제와 남북한 영화

한국영화 최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기생충'이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기생충'은 전날 112만7천152명을 불러들이며 압도적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누적 관객은 237만2천317명. 사진은 이날 서울의 한 영화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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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이번에 봉준화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이라는 큰 상을 받은 것은 칸 영화제입니다.

지난 달 말과 이달 초 한국 국민들은 아주 좋은 소식을 연이어 접했지요? 야구선수 유현진, 축구선수 손흥민, 영화감독 봉준호, 그리고 가수 방탄소년단이 큰 뉴스를 던졌습니다. 이즈음의 한국을 보면 가히 가무왕국, 스포츠 강국으로의 면모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국제영화제와 남북한 영화에 대해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이야기 나눕니다.

임채욱 선생: 네, 말씀대로 유현진은 미국에서 야구로 손흥민은 스페인에서 축구로 방탄소년단은 영국에서 웸블리 대형공연으로, 그리고 봉준호는 프랑스에서 큰 영화상을 받은 것으로 한국국민을 기쁘게 했습니다.

오늘은 봉준호감독 영화상 수상을 계기로 남북한 국제영화제 참가 이야기를 한 번 해보기로 하지요. 먼저 이번 수상내용부터 들어볼까요?

임채욱 선생: 네, 이번에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이라는 큰 상을 받은 것은 칸 영화제입니다. 세계에서 영화제는 많지만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는 유럽에서 이뤄지는 3개입니다.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 프랑스 칸 영화제,독일 베르린 영화제입니다. 베니스가 가장 오래돼서 1932년에 생겼고, 다음 칸영화제로 1946년에 생깁니다. 그리고 베르린 영화제는 1951년에 생깁니다. 이 셋 가운데서 영화발상지 프랑스 칸에서 열리는 칸영화제가 가장 권위가 있다고 하지요. 올해가 72회째인데 황금종려상은 감독상이니 주연상이니 각본상이니 하는 여러 상들 중에서 가장 윗자리에 있는 상이지요. 이건 한국영화가 세계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더욱이 올해가 우리나라 영화100년이 되는 해라서 더욱 뜻이 있다고 봐야지요.

세계적으로 국제영화제는 아주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하다는 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정말 대단한 성취라고 하겠습니다. 봉준호감독의 이번 작품 <기생충>의 스토리는 어떤 내용입니까? 수상이유도 언급해주시죠.

임채욱 선생: 국제영화제는 참으로 많습니다. 미국 아카데미영화제, 르카르노영화제, 도꾜영화제, 베이징영화제, 토론토영화제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 중 가장 권위 있는 칸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다섯 번 받았고 중국은 아직 없습니다. <기생충>의 스토리는 고급저택에 사는 부자집과 반지하방에 사는 두 집안에서 일어난 일을 줄기로 해서 빈부격차문제를 건드리지만 재미가 있는 오락적 요소도 보태져서 웃으면서 눈물이 찔끔나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심사위원 9명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영화라는 평에 의견일치를 봤다고 합니다.

한국영화로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이나 배우는 많지요?

임채욱 선생: 칸영화제에서는 이미 2002년에 임권택감독이 감독상을 받은 일이 있고 2004년에는 박찬욱 감독이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연기부문에서는 2007년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지요. 베니스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의 작품 <피에타>가 2012년 최고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지요. 베르린 영화제에서는 재작년 2017년 김민희가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북한에도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도 있지 않겠습니까?

임채욱 선생: 네, 북한영화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수상한 일이 있지요. <소금>이란 작품인데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인 영화지요. 그게 1985년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북한에서는 <소금>이란 영화작품을 제작했다는 기록은 지워졌습니다. 이 작품을 만든 신상옥감독과 주연 최은희가 탈북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북한영화도 칸 영화제에 문을 두드린 일이 있습니다. 2007년 <한 여학생의 일기>란 작품이 초청돼서 상연된 일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영화제는 앞에서 말한 영화제 외에도 남북한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도 있지요?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는 부산영화제, 전주영화제, 부천영화제 등이 있지요. 이 중 부산영화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북한이 여는 국제영화제는 평양국제영화제가 있습니다. 1983년부터 시작됐는데 1990년부터는 2년에 한번씩 열리고 있습니다. 작년 9월에 제16회가 열렸으니 올해는 열리지 않겠군요.

앞에서 한국영화 100년이라고 했는데 100년의 기원은 어떻게 됩니까?

임채욱 선생: 우리나라에서 영화사의 첫 시작을 알린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서울 단성사에서 상영된 <의리적 구토>란 영화입니다. 이 영화 이전에도 활동사진이란 이름의 외국영화가 1897년부터 상영돼 왔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제작비를 대고 감독을 하고 배우로 연기하면서 제작을 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었지요. 물론 소리가 없는 무성영화라서 변사가 해설을 따로 했지요. 그런데 북한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를 1921년에 나온 <월하의 맹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존재를 모르는지 아니면 다른 관점으로 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어느 것이 정확한지 검증돼야 할 일이군요.

임채욱 선생: 먼저 <월하의 맹세>에 대해 말하면 이 영화는 1923년 4월 9일 상영됐는데 첫 극영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앞에 말한 <의리적 구투>라는 영화는 연극을 공연하는 가운데 연극으로 나타내기 어려운 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도중에 삽입하려고 만든 것이고 <월하의 맹세>는 처음부터 다 영화로 찍은 극영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의리적 구투>는 당시 단성사 사장 박승필이 돈을 대고 김도산이 주연과 감독을 맡은 흥행을 목적으로 한 영화라면 <월하의 맹세>는 윤백남이 감독한 극영화지만 저축을 장려하려고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제작비를 댄 계몽목적의 영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극장에서는 상영되지 않고 지방 공회당 같은 곳에서 상연됐다고 하지요.

듣고 보니 어느 쪽에 점수를 줘야할지 어렵습니다.

임채욱 선생: 하지만 비록 연극의 삽입을 위해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우리나라 사람 손으로, 우리 돈으로 처음 만들어 진 것은 역시 <의리적 구투>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북한에서 <월하의 맹세>가 1921년에 제작됐다고 하는데 1922년에 제작되고 1923년 4월 9일에 개봉됩니다. 당시 경성호텔에서 시사회를 가졌고 한 1년간 관계기관에 선보인 뒤 지방에서 순회상연 됩니다. 한국에서는 그래서 <의리적 구투>를 최초 영화로 보고 1966년부터1919년 10월 27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10월 27일을 ‘영화의 날’ 정하고 기념합니다.

앞으로 남북한 영화인들이 다시 논의해 볼 수도 있는 문제군요.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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