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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누가 성령을 두려워하는가?-워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참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히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는 믿고 싶은데 성령은 피하고 싶다"고 말하는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성령을 피하고는 예수를 제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드리는 감명깊은설교 시간입니다.
전세계와 미국에 있는 목회자들의 "감명깊은설교"를 모아서 보내 드리는 시간,
오늘은 세번째 시간으로 '영성 목회로 성숙되는 교회' 워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의
2008년 5월 25일 주일 2부 설교내용 입니다.
기독교인들 교회생활의 참뜻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꼭 놓치지 마십시요.
감명깊은설교 시간에 참가했으면 좋겠다는 목사님들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처 메일은 john_lee_rfa@hotmail.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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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목사

2008.5.25 (김 영봉 목사)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98)
"누가 성령을 두려워하는가?"
(Who Is Afraid of the Holy Spirit?)
요한복음 John 20:22

1.

‘성령’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 여러분에게는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이런 말들을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지면서 외면하고 싶은 느낌을 받는 분들이 계십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비정상적이고 극단적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광신자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어느 교우께서는 기독교에 대한 첫 경험이 매우 부정적이어서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기를 망설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 친구의 권유로 생전 처음 기독교인들의 집회에 갔었는데, 그 모습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열광적이었다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아, 저렇게 되기는 싫다"고 생각하고 외면했다고 합니다. 다행이 지금은 그 부정적인 선입견을 접어 두고 우리 교회에 나오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부정적 이미지 때문인지, ‘성령’을 재수 없으면 걸릴 수 있는 기분 나쁜 유령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여기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선입견을 가지면 성령이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는 믿고 싶지만 성령은 받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왕왕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 가고 싶지만 혹시나 성령에게 걸리지나 않을까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은 용기를 내어 교회에 나오지만, 성령에게 붙들리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의 중심을 향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다가, 어느 순간, 너무 깊어졌다 싶으면 얼른 발을 빼고 뒷걸음질 칩니다. 잘 못 걸리면, 성령 때문에 영 패가 망신할 것 같습니다.

반면, ‘성령’ 혹은 ‘성령 충만’이라는 말에 대해 정 반대의 느낌을 가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동안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믿고 살아온 분들 중에 성령에 의해 사로잡히는 체험을 갈망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수 년 혹은 수 십 년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언제나 내가 주인이 되고,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상식 안에서만 맴돌았습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뭔가 비어 있음을 느낍니다. "과연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가?"라는 회의감이 듭니다.

또렷한 의식에서 나오는 말로 또박 또박 기도하는 것 말고, 내 정신과 영혼이 어떤 초월적이고 거룩한 힘에 사로잡혀 기도의 깊은 경지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내가 생각하고 내가 추론하는 것 말고, 내 의식의 저편에서부터 환히 비추어져 오는 계시를 경험할 수는 없을까? 내 몸에 주어진 에너지와 내면에서 나오는 정신력 말고, 더 근원적이고 더 차원 높은 힘에 사로잡혀 살아갈 수는 없을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경지가 있지 않을까?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인물인 것은 믿지만, 그런 이성적인 믿음을 뛰어 넘어,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하시는 신의 존재에 사로잡혀 살아볼 수는 없을까?

이러한 영적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성령’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설레입니다. 그가 열망하는 영적 체험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성령 체험’이라는 말을 들을 때 간절한 기도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주님, 제게도 성령의 충만을 주옵소서. 그리하여 내 이성과 판단과 생각을 뛰어 넘는, 초월적이고 신비로우며 또한 심오한 경지를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2.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성령을 두려워하는 쪽이십니까? 아니면 성령을 갈망하는 쪽이십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대부분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난 주말 저는 32명의 교우들과 함께 2박 3일간의 영성수양회에 다녀왔습니다. ‘나를 찾는 기도 여행’이라는 주제로 여러 가지 기도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훈련하고 삶을 나누는 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첫 날 저녁, 참여하신 분들이 돌아가면서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영성수련회에 참여했는지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몇몇 교우들께서 영적 체험에 대한 깊은 갈망과 함께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셨습니다. 어떤 분은 "내 마음에 갈급함이 있어서 일단 신청을 했는데, 시간이 다가올수록 여기에 오기가 두려워졌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다른 분은 "이번에 제대로 깨져 보고 싶은데, 너무 심하게 깨지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치 결혼식을 앞 둔 신부가 결혼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으로 마음이 들뜨는 한 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고 싶은 심정을 가지는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분들이 드러내신 갈망은 우리 인간의 존재 바탕에 있는 영적 차원에 대한 갈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을 창세기에서는 ‘생령’(living soul)이라고 불렀습니다(창 2:7). 인간이 인간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갈 우리의 육신과 그 육신에 불어 넣어진 하나님의 숨 곧 ‘성령’입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불어 넣으신 숨은 바로 이 영적 숨 곧 성령입니다. 흙덩어리 아담을 생령으로 살아나게 했던 그 성령입니다. 그 성령이 우리 존재 안에 채워져야만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며,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성령에 사로잡혀야만 영적 차원을 볼 수 있고, 영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성령에게 잘 못 걸리는 바람에 내 인생이 전혀 예상하지도, 전혀 바라지도 않는 방향으로 뒤틀려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성령에 붙들리면 혹시나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다 포기하라고 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성령에 잘 못 붙들리면 자신도 역시 그 이상한 광신자들처럼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깨져도 적당히 깨지고 싶고, 붙들려도 옷소매 정도만 붙들리고 싶습니다. 언제라도 아니다 싶으면 털고 나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저는 이 감정을 십분 이해합니다. 저도 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다 떨쳐 버리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의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는 인식에서 옵니다. 누구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해서 그렇지,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모습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부담감 혹은 죄책감이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성령에 붙들리면 자신의 삶이 전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뒤틀릴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3.

이와 관계하여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참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히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는 믿고 싶은데 성령은 피하고 싶다"고 말하는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성령을 피하고는 예수를 제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성령을 피하고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중 한 분으로 존경하는 정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을 존경하고 추앙하는 것이나 예수를 존경하고 추앙하는 것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과거에 살았던 위대한 인물로서 존경하며, 그 사람의 인생이 남겨 준 교훈을 배워서 내게 유익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것도 좋은 일이기는 합니다만, 기독교 신앙은 과거의 위인을 추앙하고 교훈을 배우자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 활동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 혹은 온전한 믿음은 성령을 통해 우리 중에서 살아 활동하고 계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관계를 열고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지만 성령을 피한다면,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그저 신(god)으로서 인정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신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습니까?"라고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대다수가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2007년도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 사는 사람 중에는 86%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합니다. 우리말에 ‘십중팔구’라는 말이 있는데, 86%가 바로 십중팔구의 확률입니다. 그런데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들의 삶 속에 신이 존재합니까? 십중팔구는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과 인격적인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관계와 사귐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초부터 스스로 계시면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신(God)에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계가 열려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 낯선 신, 생각만 해도 마음에 부담이 되는 그 신, 나에게 진노한 채로 불꽃같은 눈으로 감시하실 것 같은 그 신, 내 삶이 그의 기준에 너무도 못 미쳐서 그 앞에 서기만 하면 그분의 진노 때문에 불타 버릴 것 같은 그 신?그 낯설고 무서운 신에게 어찌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성령의 감동 감화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보혈의 공로로써 우리 죄를 해결 받고,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가 다시 받아들여질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낯선 신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4.

그러므로 성령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우리를 감싸고 계시는 성령께 우리 존재를 활짝 여십시다. 그 성령께서 내 마음을 사로잡아,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체험해 보십시다. 또렷한 의식에서 나오는 말로써 드리는 기도도 좋지만, 때로는 내면에서 나 아닌 누군가가 내 의식을 사로잡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기도의 경험도 사모해 보십시다. 내가 추리하고 분석하여 믿는 믿음도 좋지만, 때로는 나의 지식과 추리와 분석을 넘어서는 차원으로 도약하여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젖는 체험도 사모해 보십시다. 내가 주인이 되는 생활도 좋지만, 나 아닌 더 높은 존재에게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도 사모하십시다.

두려워할 것은 성령이 아니라 그 성령에 대해 반응하는 우리의 감정입니다. 감정의 속임수를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만지시면 자주 감정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변화도 생기고, 울컥하면서 통곡하게 되기도 하고, 갑자기 마음에 환한 빛이 비치는 것 같은 변화도 생깁니다. 꼭 무엇에 취한 것처럼 흥분되기도 합니다. 신바람이 나고 흥이 돋습니다. 마치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듯, 때로 성령의 바람이 우리 마음에 세차게 불어치면 이러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러면 우리는 신비한 기쁨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 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 때 만일 우리가 파도를 일게 한 바람에 주목하지 않고 바람 때문에 일렁이는 파도에 주목하면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저는 2년 동안 벨마(Belmar)라는, 뉴저지 주에 있는 해변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그 때 저는 바닷가에 만들어진 board walk을 걸으면서 매일 같이 변화하는 바다의 모습에 매료되었더랬습니다. 바람이 잔잔할 때면 그 때 대로, 태풍이 치면 또 그 때 대로 바다는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때로는 바다가 유리를 깔아 놓은 듯이 잔잔합니다. 하지만 그 때도 바람은 바닷물 위에 불고 있습니다. 파도만 주목한다면, 바람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을 주목한다면, 바람이 그곳에 있음을 알 것입니다.

영적 바람인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우리 마음의 바다에 일으킨 감정의 파도는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감정의 변화에 주목하면 안 됩니다. 속아 넘어갑니다. 소위 성령을 독점한 듯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왕왕 볼꼴 사나운 행동을 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이상하게 만든 것은 성령께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감정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성령의 바람이 일으킨 감정 때문에 흥분합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정이 식습니다. 감정이 식는다고 해서 성령이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성령이 아니라 감정을 추구합니다. 그런 감정을 계속 즐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감정을 조작합니다. 여기서 사이비가 생기고, 영적 사기꾼이 생깁니다.

믿는 사람들이 빗나간 성령 운동에 취하여 감정을 조작하는 양상을 보면 참으로 위태롭습니다. 과거에 성령께서 안겨주셨던 감정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마치 바람 잔잔한 날에 파도를 보고 싶어서 바다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억지로 눈물 콧물을 짜 내고는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은혜는 불과 두 세 시간도 지속하지 못하고 식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더 더욱 몸부림을 칩니다. 이런 몸부림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열광적인 집회를 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진실로 성령을 사모하십니까? 그렇다면 정신은 말짱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감정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서 조선>의 주필이었던 김교신 선생은 성경 말씀을 공부를 하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면 나와서 찬물로 등목을 하고 다시 시작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성령의 만지심으로 인해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환영하기는 할지언정, 그 감정에 놀아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성령에 푹 젖어 살면서도 결코 꼴사나운 모습으로 변해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성령을 두려워하는 또 다른 이유는 혹시 성령을 만났다가 지금의 내 삶의 방향이 완전히 틀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부담감 혹은 죄책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만났다가는 뒷덜미를 잡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욕심껏 끌어안고 있는 것을 포기하라고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즐기는 것들을 포기하라고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혹시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모두 내려놓고 선교사가 되어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곳으로 가라고 하시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언젠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시간표가 아니라 나의 시간표대로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내 삶이 침범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성령을 정면으로 맞닥뜨려 그분에게 사로잡혀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보면, 이 모든 우려가 어느 정도 사실임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 사로잡힌 후 자신의 세속의 직업을 버리고 오지에 선교사로 가거나 혹은 도시 빈민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체험하고 영원한 생명에 눈을 뜬 후, 자신의 전 재산을 헌납하여 거룩한 일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대면하고 화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과의 깊은 사귐의 결과로 목을 조이는 듯 한 경쟁에서 벗어나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변화를 받아, 골프와 여행과 식도락으로 충만한 은퇴를 꿈꾸다가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한 봉사 활동에 노년을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성령을 만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다 보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전혀 계획하지 않은 방향으로 인생길이 굽어질 수 있습니다. 하기 싫어서 회피하고 외면해 온 일을 대해야 할지 모릅니다. 대면하기 싫은 사람을 대면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성령을 만나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일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힘으로 인해 일어날 변화에 대해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아직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혀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골프와 여행과 식도락으로 즐기는 노년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보내는 노년이 더 나아 보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은 골프와 여행과 식도락으로 보내는 소위 gold retirement보다 봉사와 헌신으로 보내는 holy retirement가 훨씬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혀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고액 연봉의 최고 직장보다 낮은 연봉의 봉사하는 직장이 더 나아 보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은 자신이 포기한 고액의 연봉에 아무런 미련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털끝만큼의 후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은 끝내 성령을 회피해 가면서 우리의 생을 허망하게 소비하도록 만들려는 악한 영의 속임수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따라 변화를 받는 것이 실은 가장 행복한 길인데, 그리고 변화되어 갈수록 더 더욱 행복해 지는 것인데, 악한 영은 우리를 속여 그것이 불행해 지는 길인 것처럼 믿게 만듭니다. 그 속임수를 간파해야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을 내 계획과 내 의도대로 이끌고 가는 것이 가장 행복할 것처럼 믿는 것도 역시 속은 것입니다. 나보다 더 크신 분이 계십니다.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나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지혜로운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손에 붙들리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성령에 붙들리는 것은 바로 그분의 손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6.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사정이 이렇다면, 성령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선입견과 우려와 두려움을 내려놓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우리의 삶을 전폭적으로 다스리기까지 사모하고 추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내 때가 아니라고 저항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고, 성령의 만지심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만지심으로, 자신의 죄가 얼마나 중한지를 깨닫고 "이제 내가 죽게 되었구나!"(이사야 6:5)라고 절망하고,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 죄와 벌로부터 구원을 받고, 낯설었던 예수의 신 성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기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점차 장악해 가심으로 우리 삶에 참된 변화가 일어나기를 구하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혼자만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내 안에서 누군가가 내 삶을 이끌어 가는 그런 삶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변화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영성수양회입니까? 물론 영성수양회에서 많은 분들이 성령의 만지심과 다스리심과 충만히 채우심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예배에서 그런 일이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일어납니다. 선교지에 가서 봉사하면서 그런 체험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성령을 체험하는 분도 있습니다. 새벽 기도회에서 혹은 수요 예배에서 혹은 홀로 기도할 때 그런 체험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을 영성수련회까지 넋 놓고 기다릴 일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영적 생활에 충실하게 임해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활짝 열어 놓고 그분의 만지심을 사모하며 내 삶에 그분이 주인이 되기를 얼마나 진실하게 구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런 진실하고 강렬한 열망이 있을 때, 성령께서는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때에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성령의 만지심을 받고 성령의 다스림 안에서 참되고 복된 삶으로 이끌림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우리 중에 계시며
우리 마음 안에 계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소서.
무뎌진 저희 마음을 녹여주시고
생기를 잃은 마음을 회복하여 주소서.
부활의 주님이시여,
성령을 통하여 저희 마음의 중심에 오소서.
오셔서
저희의 주인이 되시고
왕이 되소서.
더 이상 내가 사는 삶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끄시는 삶이 되게 하소서.
저희 삶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그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받으셔서
당신 뜻대로 사용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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