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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교회는 종착역이 아니다"-워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드리는 감명깊은설교 시간입니다.
전세계와 미국에 있는 목회자들의 "감명깊은설교"를 모아서 보내 드리는 시간,
오늘은 첫번째 시간으로 '영성 목회로 성숙되는 교회' 워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의
2008년 5월 11일 주일 2부 설교내용 입니다.
기독교인들 교회생활의 참뜻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꼭 놓치지 마십시요.
감명깊은설교 시간에 참가했으면 좋겠다는 목사님들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처 메일은 john_lee_rfa@hotmail.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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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5.11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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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연속 설교 ‘생명의 복음’(97)
"교회는 종착역이 아니다"
(The Church Is Not Our Final Destination)
요한복음 20:19-23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때론, 가장 안전해 보이는 것이 가장 위험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는 자신을 폐쇄하고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자신의 마음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유폐시켜 결국은 그 안에서 서서히 죽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관계 안에서만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도록, 그리고
관계 안에서만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만을 위해 사는 길은 스스로를 고립시켜
죽게 하는 일이요, 자신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며 서로를 위해 사는 길은
모두를 살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창조 섭리요, 그것이 자연 원리요,
그것이 심리적인 원리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열고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일이 때로 아주 위험한 일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열지 않고서는 인간은 참되게 살 수 없다는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여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라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자신을 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은 필연적으로 상처와 아픔에 자신을
노출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반복하여 상처를 받다 보면, 우리는 자연히
움츠러들고 마음의 문을 닫게 되며 세상에서부터 뒷걸음질 치게 됩니다.
그 아픔과 고난이 정도를 넘으면, 모든 일을 다 그만 두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 이사를 하여, 아무도 관계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홀로 마음 편히 살고 싶은 유혹이 마음에서
꿈틀거립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나가는 것조차 두려워집니다. 예배에 나오기는 하지만,
아무도 만나지 않고 뒷문으로 살짝 들어왔다가 옆문으로 살짝 나가고 싶습니다.
때로 누군가를 만나 마음 안에 꼭꼭 숨겨 둔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렇게 할 때마다 그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기억납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내 문제를 알까 겁나고, 나도 다른 사람에 대해 상관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내가 어찌하든 아무도 상관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겐가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고, 상처를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나고 싶지만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사람들과 얽히는 것을 피합니다.
피할 수 없이 얽히면, 서로에게 피해가 없을 만큼 적당한 선을 긋습니다.
자신도 그 선을 넘어가지 않고, 상대방도 그 선을 넘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자신을 열어 놓고 관계할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무 두려움 없이 자신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까 묻습니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상담가에게 찾아가겠습니까? 상담가들은, 누군가가 마음 놓고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있도록 훈련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 때 그렇게
훈련받은 분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상담가 외에는 내 마음을 열어 보일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딱한 사람들입니까? 실제로 우리 중 대부분이 마음 놓고
마음을 열어 보일 사람이 없이 살아갑니다.
배우자에게도 마음을 다 열지 못하고 사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상황입니다.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내면의 성을 쌓고
그 안에 자신을 감금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은 단지 죽고 나서 영생을 얻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받아야 할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만의 성을 쌓고, 우리 자신의 손으로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우리 스스로 자신의 손과 발에 족쇄를 채워 감금한 이 감옥으로부터
구원 받아야 합니다.
"제 스스로 만든 감옥이니 제 스스로 깨치고 나오면 되지 않을까?" 싶겠지만,
우리 마음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이 치료되지 않고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 파고 든 감옥이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그 어두운 그늘 속에서 웅크리고 있으려 할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 내면을 짓누르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치료하고
다시금 세상을 대면할 용기를 회복시켜 주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내면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내면을 짓누르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치료하시고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셔서 빗장을 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오늘까지, 세 주일째 묵상하고 있는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23절의 말씀이
이 진리를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을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칠 것을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의 어느 구석진 집에 모여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갈 용기가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어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니며 일생을 보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함께 모여 서로 부둥켜안고 식어가는 체온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하는 제자들에게, 그분은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한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다시금 위로하십니다. 제자들은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았고,
그 순간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불안감과 공포감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그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요 3:16).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시고 죽으신 다음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찰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귀환하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 22절을 보니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훅!’ 하고 숨을 불면 그것은 단지 공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숨은 단지 공기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몸이 우리의 몸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몸은 3차원을 초월하는 몸이었기 때문에 그 몸에서 나오는 숨은
단순한 입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명의 기운’(창 2:7)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그 숨, 그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면서,
예수님은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태초에 진흙 덩어리 아담을 생령으로 살아나게 했던
그 생명의 기운이 제자들의 내면에 차오르기를 축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자,
제자들은 전에 보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치, 흑백 화면이 한 순간에 천연색으로 변화하는 것 같다 할까요?
혹은 쪼그라져 있던 풍선에 갑자기 바람이 차오르는 것 같다 할까요?
혹은 황량했던 광야가 한 순간에 초원으로 바뀌는 것 같다고 할까요?
오늘날 많은 이들이 말하는 ‘성령 충만’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다시금 세상을 대면할 용기를 얻었고,
세상에 의해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할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 한 번에 한 사람씩,
한 번에 한 뼘씩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받아야 할 구원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내면을 억압하고 있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몰아내고
참된 평안을 안겨 주십니다.
그리고 ‘부활의 숨’, 진흙 덩어리를 생령으로 변화시킨 그 ‘생명의 기운’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주십니다.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해 지도록 해 주십니다.
그 생명의 기운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에 희망이 차오르고,
얼굴빛이 변하며, 발걸음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한 없이 넘어지고 쓰러졌습니다.
세상에서 받는 위협에 짓눌리고, 세상에서 받는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늘 희생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대로,
이리 가운데 버려진 한 마리 양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도 닫아걸고, 집의 문도 닫아걸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스스로 만든 철옹성 안에 피신하기를 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창조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성령을 받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아가면,
그 능력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박차고 이 세상 안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능력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의 위협을 대처할 수 있으며,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리 가운데 놓인 한 마리 양처럼
무력한 존재였으나, 그 연약한 양 앞에서 이리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칩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문을 박차고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먼저 그리고 정기적으로 교회로 모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던 그 쪽방이 실은 교회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그곳이 바로 교회가 됩니다. 그곳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마 18:20).

우리 믿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곧바로 세상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먼저 그리고 정기적으로 교회로 모여,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일할 준비를 합니다.
믿음 안에서 다른 사람을 참되게 만나고 마음을 열고 사귀는 훈련을 합니다.
세상에 나아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사람을 참되게 만나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마음의 열고 다가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섣불리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이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관계입니다. 사귐입니다.
나를 열고 다른 사람을 만나 사귀는 곳입니다.
인격적이고 친밀한 사귐 안에서 치유 받고 회복되며 성장하여
우리 각자가 온전함에 이르도록 힘쓰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지고, 옆으로는 형제자매들과의
사귐이 깊어지도록 힘쓰는 것이 교회로 모여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불어 넣으신 생명의 기운이
우리 내면에 충일할 것이며, 그 능력으로 세상에 나아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관계를 트고, 그 관계 속에서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느 정도 세상과 닮아 있고, 또 어느 정도 세상과 다릅니다.
그것은 마치 군인들이 훈련을 받는 훈련장과 실제 전쟁터가
어느 정도 닮아 있으며 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 전쟁터와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어야 훈련에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전쟁터와 똑 같으면 훈련하다가
아까운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교회는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세상과 어느 정도 닮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마음을 열고 사귀는
훈련을 했을 때, 그것이 세상에서 효력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처럼 비정하고
살벌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자신의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기에 어느 정도 안전한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훈련장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적당한 위험이 항상 존재합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하며 또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나 같은 사람들이 나오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나 말고는 모두 다 성인이기를
바라는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조금만 상처를 받아도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런 분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이런 겁니다.
"어쩜 교회가 이럴 수가 있나?" 자기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다고
생각하면"어쩜 그런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수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귐을 나누는 곳이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상처받는 일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추구하는 일에 더 많이 힘써야 합니다.
성령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과 사귀며 살아가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을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을 담력을 얻게 됩니다.
주님과의 사귐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때,
우리는 웬만한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누구에게나
접근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건네는 친교의 악수는 상대방에게 위협감을 주거나
위압감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영적 성숙은 홀로 기도하고 수도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고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기도하고 씨름하는 것을 통해서만
그 같은 성숙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속회를 다시금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하나님과의 사귐을 심화시키며
그 능력으로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모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을 열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속회는 가장 좋은 훈련장입니다. 그 안에는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한 둘은 있기 마련입니다.
집요하게 정치 이야기나 스포츠 이야기로 화제를 이끌어가는 사람도 있고,
어디 가서 물건 산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도 있으며,
한 번 말할 기회를 잡으면 멈출 줄을 모르는 사람도 있고,
자기 고백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으며,
늘 정답만 말하고 늘 가르치기만 하려는 사람도 있고,
자기의 마음은 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열린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상처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습관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련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만일 교회 안에 대하기 좋은 사람만 있다고 합시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 살면서
"세상은 이런 곳이겠구나"하고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혹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고 싶어질 것입니다.
대하기 싫은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하고,
교회 안에서만 맴돌기 원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세상에서의 도피처가 되어 버립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교회가 종착역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교회의 왜곡입니다. 교회의 타락입니다. 교회의 실패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참된 사귐이 우리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같은 믿음의 울타리 안에서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 혹은 대하기 싫은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우리는 자주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게 됩니다.
바깥 사회에서는 대하기 싫은 사람은 외면하거나 피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면의 음성을 통해 우리를 괴롭히십니다.
피하지 말라고, 외면하지 말라고, 힘들어도 다시 대면하라고
우리를 흔드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님을,
아니 아주 초라한 죄인에 불과함을 자각하게 되고 또한 인정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더 자주 무릎을 꿇게 되고, 더 깊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점점 변화해 갑니다.
그것이 우리가 교회 안에서 받을 영적 훈련입니다.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종착역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바깥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도피성을 만들어 놓고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찬송을 불러가며 함께 모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말은 진리의 반쪽만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집은 죄 많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품에 이르기 전,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러셨고
또한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죄 많은 이 세상을 품어 안고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구원합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함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전도’(evangelism)라고 부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생명과 인류가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 헌신함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선교’(mission)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전체를 한꺼번에 구할 수는 없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한 번에 한 뼘씩 바꾸어 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가지고야
언제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습니까? 당연한 질문입니다만,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얻는 관계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 안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평안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얻어야 합니다.
그 관계의 능력으로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과의 사귐을 연습해야 합니다.
특히,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적극적인 훈련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훈련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면,
직장에서 혹은 사회에서 누구를 만나든 마음을 열고 대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은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그 대상들에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참된 전도도,
참된 선교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실은 나 자신에게도
가장 행복한 선택이 됩니다. 나만의 성을 쌓고 그 성 안에 도피하는 것은
결코 안전하지도 않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일입니다. 진정한 안전지대는
역설적이지만 우리 스스로 만든 성을 벗어나 상처와 위험과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이 세상 한 복판에 있습니다.
홀로 이 세상 한 복판에 서면 이리 가운데 남겨진 한 마리 양 같이
처량한 신세가 되겠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숨,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영으로 충만해진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한 복판에서도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아가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섬길 때,
우리는 거기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또한 우리의 인생이 의미로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령 강림절을 맞아, 우리 자신을 조용히 되돌아보십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혹시,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마음의 문도,
집의 문도 꼭꼭 걸어 잠그고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살아가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숨어 있는 그 방에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오시기를!
그분에게서 평화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전해 받아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떨쳐 나오시기를! 스스로 만든 안전지대가 실은 스스로 판 무덤이며,
전쟁터 같은 이 세상이 실은 가장 안전한 곳임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홀로의 성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답답하고 힘들어 교회에 나왔는데,
여전히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조용히 와서 하나님만 만나고 가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부활의 주님께서 성령의 숨을 여러분에게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미 받은 상처가 치유되고,
그 어떤 상처도 두려워하지 않는 심령을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만 만나고 가는 반쪽 신앙에서 벗어나,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친교의 손을 뻗는 영적 도약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적어도 기독교 신앙 안에는 ‘홀로의 종교’는 없습니다.
하나님만 만나고 가려 하면,
하나님도 만날 수 없습니다. 귀찮고 짜증나고 힘들고 속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과 얽혀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집의 문도 열고 마음의 문도 열고서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사귐을 나누며
영적 사귐의 신비를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잘 하셨습니다.
우리의 사귐이 더욱 깊어지도록 힘쓰십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영적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도록,
그리고 나에게도 영적 친구가 많아질 수 있도록 ‘거룩한 사귐’에 더욱 힘쓰십시다.
우리에게 가장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찾아가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상담할 수 있는 친구가 교회 안에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군가 그런 지경을 당하여 한 밤중에 내게 전화를 하여 만나자고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사귐을 위해 더욱 힘쓰십시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다. 교회가 우리의 종착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교회에서의 우리의 사귐은 이 세상 안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며,
그들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까지 가야만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시고 성령의 선물을 주신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몸을 드려 교회를 세우신 것은
그 안에서 우리를 참된 사귐에 훈련시켜 이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각각 자신이 세운 성에 도피하여 고독 속에서 죽어가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참된 사귐을 찾아보기 힘든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마음 놓고 마음을 열 수 없을 만큼 위험천만한
이 세상에 나아가 참된 친구가 되어 주도록, 그리하여 영원하며 참되신
우리의 친구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도록 우리를 보내십니다.

거기까지 가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통해 어느 정도 훈련을 했다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요 3:16)고 했지,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이 세상을 마음에 품고,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을 꿈꾸어야 합니다. 그것을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거기까지 갈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소망을 다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두신 뜻을
다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다 이루고 가는 인생! 이보다 더 큰 행복과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축복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 주님,
저희의 밀폐된 방에 침입하소서.
저희의 닫혀진 마음을 점령하소서.
떨리는 저희 마음에 평화를 선포하소서.
죽어 있는 저희 영혼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소서.
마음을 활짝 열고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품게 하시고,
그 능력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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