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백일장'에 참가한 한 어머니가 나무에 기대어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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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성으로 일하고 자녀들 뒷바라지하면서도 북한에서도 하지 못한 대학교육을 한국의 숭실사이버대학에서 ‘문예 창작’으로 공부해 지금은 시인으로서 남한사람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시’로서 전한다고 탈북인 시인 이명애 씨가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이 씨는 남북한 경험을 토대로 작은 통일의 디딤돌이 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습니다.
RFA 초대석 오늘은 탈북인 이명애 씨의 숭실사이버대학 다닌 것과 시인으로서의 포부에 대한 이야기 함께 나눕니다.
질문: 북한에서는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이명애: 제가 북한에서도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어요. 우여곡절이 많았지요. 다른 사람들도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그 사람들보다는 특별한 곡절이 많았거든요. 북한에서의 제 삶이요. 그래서 북한에서 항상 내가 말하는 게 (입버릇 처럼 말하는 게) 내가 살아온 일을 장편 소설로 쓴다면 쓰고도 남을 거야 이런 얘기를 자주 했어요.
질문: 남한 사회에서 느꼈던 점은
이명애: 여기 와서 살다 보니까, 이제 남한 사람들이 통통 던지는 질문에 진짜 상처 받은 때도 많거든요. 북한에서도 살지 않느냐! 그러면서 자기들이 낸 세금으로 탈북자들을 다 먹여 살려주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내가 이걸 어떻게 북한 사회에 대해서, 이렇게 한국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려 줘야 하겠는데, 어떻게 알려주느냐! 항상 머릿속에서 떠돌고 있었던 차에, 이거 좀 글을 쓰자고 하니까, 초보적인 글 쓰는 걸 알아야 하잖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글을 쓰겠어요
질문: 남한에서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기까지 상당히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이명애: 맨 처음에는 방송통신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려고 하니까 잘 되지 않았어요. 토요일에 시험 보러 직접 가야 하고 사는 곳에서 방송통신대학이 멀었어요. 혼자 공부하기가 힘들어서 또 주말마다 지역별로 모여서 강의하는 날이면 거기도 가야 하고 그래 직장 다닐 때 토요일에도 일하고, 일요일 만 쉬기 때문에 등록은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맞아서 못 다니겠더라고요. 처음에 인터넷도 잘할 줄 모르지 혼자서 공부한다는 게 잘 안 되더라고요. 입학만 하고 못 하고 그다음엔 그렇게 한 2년이 지나갔지요. 2012년도에 경리로 취직하게 됐어요. 조그마한 중소기업에요. 경리를 하다 보니 컴퓨터와 항상 마주하고 있잖아요. 좀 틈나는 시간마다 이것저것 보다가 사이버 대학 광고가 뜨는거에요. 그래 그거 보고서 사이버 대학에 한 번 들어가 볼 까? 여기서는 어떻게 공부하나, 사이버 대학에 전화해서 물어봤지요. 사이버 대학은 그냥 혼자서 교재도 별도로 사지 않아도 되고. 교재도 출력해서 공부하면 된다. 그리고 탈북자는 다 무료라는 이야기해 줬어요. 돈 내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데 이런 때 공부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냐고 그래서 등록을 하고, 공부하기 시작한 거지요. 사이버대학에요.
대학에서 시, 문학을 공부 하게 된 이야기
이명애: 그래서 사실은 은연중에 글을 쓸 목적으로 대학 문은 두드리긴 두드렸는데 거기 들어가서 방송통신대학에는 국문학과가 있는데 사이버 대학에는 국문학과가 없더라고요. 아무리 찾아봐도요. 그래도 공부는 하고 싶지, 더 나이들기 전에 하고 싶은데 전공할 과목은 없지, 나는 글을 좀 쓰고 싶다 생각이 은연중에 있어서 그러나 국문학과가 없고 그래서 아무래도 전공은 정해야겠고 해서 유치원 교사 경험으로 아동학과에 들어가서 한 학기 뭣 모르고 공부를 했지요. 한 학기 지나가니까 이것저것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때 ‘방송문예창작학과’라는 걸 그때 봤거든요. 거기서 시작법이나 소설 작법을 가르치는 걸 그때 알았거든요. 1년쯤 지나서요. 그래서 그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한 거지요. 그래 그때 시, 문학도 처음 접하게 되고요.
시집 발간 이야기도 해 주세요.
이명애: 우리 교수님이 남한에서 북한에 대해 모르니까 궁금한 걸 자꾸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 틈나는 대로 그런 얘기를 해주면서 내가 글을 쓰긴 써야 하겠다는 생각이 확고히 들더라고요. 그래서 결국은 시라고 쓰긴 썼는데 이게 내놓을 만한 게 없어서 계속 가지고 있었죠. 한 3년이 됐지요. 그랬는데 이번에 여기 남북한 하나재단에서 지원해 준다고 해서 신청서 냈더니 합격이 됐어요. 그래서 지원받아서 책을 내게 됐지요.
탈북 시인으로서의 포부는
이명애: 글쎄 뭐 제가 큰 포부를 품고 이 시를 쓴 거는 아니고요. 그냥 남한사람들이 북한사람들을 너무 모르니까 ‘북한 사회가 이런 사회다’는 것을 알려야 되겠다. 이런 마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어쩌든 이 시를 읽어 보신 지인 등이 하는 얘기가 ‘북한의 진짜 이런가,’ 진솔한 이야기를 시집을 통해 잘 봤다고 했는데, 어쩌든 저는 남한에 왔으니까 남한에서 북한을 알리는 시를 썼잖아요. 이젠 통일이 되면 또 북한에다 남한을 알리는 글을 써야 되지 않겠어요. 남한에서는 북한을 알리는 일을 하고 만약 통일되면 북한에 가서 남한을 알리는 일을 해야지요. 글로 써서요. 제가 할 일은 그거라고 생각해요. 남북한이 하나 되는 큰 포부나 그런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디딤돌은 되지 않을까? 이런 바람이지요. 뭐!
통일 후에 하고 싶은 일은
이명애: 소망이라면 통일된 고향에 돌아가서 고향 사람들, 우리 가족들 형제자매들 만나서 엄마도 만나고 그래서 그냥 고향에서, 그때는 고향의 소중함을 모르고 아휴!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사냐! 이 나라는 이게 나라냐, 나라가 이러냐, 한탄만 하고 살았는데, 고향의 소중함을 몰랐는데 여기 와서 살다 보니까 고향이 너무 그립고 내 고향이 진짜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통일되면 고향에 가서 소리치면서 잘 살고 싶지요.
이명애 시 ‘연장전’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
한 민족 두 나라의 대결
남북한 축구가 시작된다
남한 선수가 중거리 슛을 날린다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함성
역시 대한민국이야
또다시 터지는 함성과 탄성
틈새를 노린 북한의 공이 골대를 살짝 빗나간다
조금만 더 안쪽으로 차지……
이어지는 연장전
마지막 일 분을 남겨두고
남한 선수의 공이 골문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두 손 들고 환호한다
긴 휘슬이 울리고
털썩털썩 주저앉는 북한 선수들
주먹으로 눈물을 닦는다
내 손이 갈 곳을 잃는다
금메달은 중요치 않다
남한과 맞대결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저들은 사상투쟁의 무대에 서게 될 것이다
전면적인 검토를 다시 받아야 할 것이다
꼬투리 하나라도 잡히면 어쩌나 축구단에서 쫓겨나진 않을까!
얼싸안고 돌아가는
남한 선수들이 미워진다
RFA 초대석 오늘은 탈북인 이명애 씨의 숭실사이버대학 다닌 것과 시인으로서의 포부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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