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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고침을 받다-조영진 목사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드리는 감명깊은설교 시간입니다.
전세계와 미국에 있는 목회자들의 "감명깊은설교"를 모아서 보내 드리는 시간,
기독교인들 교회생활의 참뜻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꼭 놓치지 마십시요.
감명깊은설교 시간에 참가했으면 좋겠다는 목사님들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처 메일은 john_lee_rfa@hotmail.com 입니다.


2005.05.15. 조영진 목사 (알링톤지방 감리사)
                           (와싱톤 한인교회에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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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복음(16)-고침을 받다"         요한복음 4:43-54

"성경의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출애굽기 15:26 하반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나님께서는 깨어지고 상한 인생들, 병들고 고통 당하는 인생들을 고쳐 주시고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분명이 드러났습니다."

한국에서 동대문 교회를 섬길 때입니다. 일생 외과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들을 수술하고 대학병원 원장으로 헌신하셨던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외과 의사로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 여정 속에서 깨달은 것 몇가지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첫째는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의사들이 모두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환자가 예상을 뒤엎고 죽는가 하면, 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환자가 살아나는 경우를 많이 본데서 온 깨달음 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분은 인간의 생명을 고치고 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외과 의사로서 당신은 째고, 열고, 잘못된 것 잘라내고 다시 꼬맬순 있지만, 아물고 회복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출애굽기 15:26 하반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나님께서는 깨어지고 상한 인생들, 병들고 고통 당하는 인생들을 고쳐 주시고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분명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가르치시며(Teaching),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Preaching), 각색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Healing). 이 치유의 사역은 오늘 교회를 통하여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교회는 생명을 고치고 살려내는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I.

오늘 우리 함께 읽은 본문 말씀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의 기적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 수가성에서 이틀을 더 묵으신 후 갈릴리 땅으로 돌아 오셨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펼치신 활약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 그리스도로서, 그 백성을 구할 메시야로서 믿고 환영한 것은 아니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가나에 이르셨을 때입니다. 왕의 신하 한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애원하였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는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제발 오셔서 그 병든 아들을 고쳐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표징이나 기이한 일을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후 왕의 신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거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이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던 왕의 신하는 마중 나온 종들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살았다는 반가운 보고였습니다. 언제 그 아이가 나았는지 물었더니 바로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시각, 오후 한시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고침받은 이 일을 통하여 이 신하의 온 가족은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II.

2000년전 예수님께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 거의 죽게된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2000여년전 가나에서 일어난 과거의 사건, 그것으로 끝납니까? 그때 왕의 신하의 아들, 죽어가던 이 아들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그때 돌아가셔서 무덤 속에 계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때 다시 사신 예수님은 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1) 살아계신 이 예수님은 오늘도 치유자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아픔, 우리의 상처, 우리의 생명을 고쳐주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전인적인 치유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는 것은 의사의 전유물인 것 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현명한 의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참으로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압니다. 고치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전존재, 몸과 마음과 영혼을 고쳐주십니다.

여러분, 건강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몸만 건강하면 건강한 것입니까? 오늘 이 시대는 웰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건강과 관련된 상품들은 주목을 받고 불티나듯 팔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건강은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참으로 건강하다는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세계 보건기구는 인간의 건강을 세차원, 몸, 마음, 관계의 영역에서 정의했습니다. 몸과 마음과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건강할 때 참으로 건강하다고 말할 수 말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몸, 마음, 관계 외에 또 하나, 아니 보다 근본적인 건강이 필요한데, 그 건강은 바로 영적인 건강입니다. 인간이 영적으로 건강하면 몸, 마음, 관계 이 모든 영역에서 참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적인 건강이란 믿음의 영역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영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몸, 마음, 관계, 영혼의 건강, 전존재를 건강케 하시는 치료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고쳐 주십니다. 우리를 치료해 주십니다.

(2)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치유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살펴보면 오늘 본문 같이 말씀 만으로 고치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만져주심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눈에 침을 뱉으시고 손을 얹으셔서 고쳐 주셨고, 또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신 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병자들을 고칠 때도 오늘의 약과 같은 기름을 발라서 고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길을 통하여 우리를 고쳐 주십니다. 약, 의사의 기술을 통하여 고쳐 주기도 하시고, 주님께서 직접 고쳐 주시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약이나 의학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의학적인 치료기술을 발전시켜온 그 머리는 누가 지으셨습니까? 그 창의성은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병든 인생들의 치료를 위하여 의학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이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직접 고쳐 주시기를 많이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현대 의학 을 통하여 저를 고쳐 주셨습니다.

또 다양한 방법 속에는 하나님께서 즉시 고쳐 주시기도 하지만, 천천히, 시간을 두고 고쳐 주실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너무 조급해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보다는 자신의 시간표에 맞추어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우리의 때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를 수 있습니다.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 다양한 길을 통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 인간관계, 전존재를 고쳐 주십니다.

(3) 오늘 본문은 뜻깊은 말씀으로 마지막 부분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 고침을 받은 시간이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오후 1시 이었던 것을 깨달은 후, 그 신하와 온 집안이 함께 예수를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위기에 놓였던 아들이 고침받은 이 표적은 한 아들의 치유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인가귀도 되는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온 가족, 가정이 고침받은 역사를 낳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고쳐 주실 뿐 아니라, 이를 통하여 우리의 가정을 고쳐 주십니다. 우리가 속한 속회를 고쳐 주십니다. 내가 일하는 직장, 사업의 현장을 고쳐 주십니다. 나아가 오늘 이 세상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한 인생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 가정, 오늘의 세상과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고쳐주시는 치료자이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개인 그리고 영적인 차원으로만 묶어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한사람, 한사람 개인의 영적인 차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세상과 역사를 고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이 세상도 예수님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이 역사도 예수님 안에 고침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을 고치십니다. 오늘 이 땅의 역사, 이 땅의 문제를 고치십니다.

III.

오늘 이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침이 필요한 시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이 치유의 사역을 이어가야 합니다. 겸손히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인생과 가정, 역사를 변혁시켜 가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수양회와 신앙강좌를 인도하셨던 정태기 교수님께서 내면세계의 치유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그 책 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수님께서 어느 날 대학원에서 강의를 마치고 막 돌아가려고 하시는데, 연구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무심코 수화기를 집어든 교수님은 순간적으로 오싹한 한기를 느꼈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여인의 목소리가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 목소리처럼 낮고 음산했기 때문입니다. 당황한 교수님은 바짝 긴장하여 누구시냐고 물었지만, 여인은 한참 뜸을 들인 후, 아까보다 더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교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등골에서 진땀이 쫙 흘러내렸습니다. 전화를 건 여인의 목소리에는 죽음의 냄새 같은 것이 짙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수요예배에 가야한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지만,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여인을 대면하고 싶지 않아 거절의 뜻을 밝히자, 여인은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지금 약 사다 놓고 마시기 전에 전화 드리는 거예요.” 교수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여인은 자살 직전에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입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여인은 틀림없이 죽게 될 것 같아 교수님은 다급한 목소리로 여인에게 곧바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고 초조한 마음으로 여인이 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10분이면 올 거리인데 40분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이윽고 밖에서 끽 하고 자동차 서는 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여인이 연구실 문 앞에 서는 것 같았습니다. “들어오세요.” 교수님은 문 쪽을 향해 세 번씩이나 재촉해서 말했지만, 밖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답답해서 문을 열고 내다보니 노파 한 분이 금방 쓰러질 듯한 표정으로 문에 기대 서 있었습니다. ‘전화 목소리로는 중년여인인 것 같았는데...’ 생각하시면서 교수님은 노파를 조심스레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습니다.

노파는 떠듬떠듬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았습니다. “남편이 바람이 나서 10개월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어쩌다 가끔 돈이나 뜯으러 오고, 저는 교회 집사이지만 아직 예수님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몰라요. 내가 믿은 것은 오직 남편뿐이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저러고 다니니 살아야 할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요... 죽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남편 되시는 분은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올해 마흔 여덟이에요.” “집사님은요?” “마흔 둘이예요.”

교수님은 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마흔 두살의 여자가 어쩌면 저렇게 늙어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새삼 마음의 건강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딱한 일이군요. 40대 바람은 임금님도 못 말린다는데, 집사님도 남편 돌아오게 하느라 지금까지 애 많이 쓰셨지요?” “네. 부끄럽지만 교회 집사라는 사람이 돈암동에 가서 사백만원짜리 굿도 해보고, 삼백만원짜리 부적을 해서 천장에 붙여도 보았어요. 새벽 한 시에 남편 양복을 잘라서 불살라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이것도 저것도 안 되었으니 이제 구원을 요청해볼 데라곤 딱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내일부터 새벽기도회에 나가세요.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기도하세요. 첫째로 예수님이 남편 있는 곳을 찾아가서 남편을 품에 안고 집으로 데려오는 장면을 상상하고, 둘째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셋째로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겁니다. 실제로 기도의 내용이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여인은 그렇게 해 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하고 한 가지 약속을 하십시다. 또 다시 약을 마시고 죽고싶을 때는 반드시 내게 먼저 전화를 하셔야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화해 주셔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간 여인은 약속대로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전화를 해왔습니다. 교수님은 전화를 하는 집사님의 목소리가 점점 밝아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개월쯤 지나서 그 집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오늘 새벽 남편이 제 품에 안겼어요.” “드디어 남편이 돌아오셨군요!” “아뇨, 하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확신이 왔어요.” 놀랍게도 구 집사가 그런 확신을 갖게 된 뒤 한 달이 못되어서 거짓말처럼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도가 세어지니까 남편이 자석처럼 딸려온 것입니다.

돌아온 구 집사의 남편은 다음날부터 아내를 따라 새벽기도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이면 자기가 먼저 일어나 현관에 서서 아내를 기다렸습니다. 구 집사가 서 있는 자신을 본 체 만 체하고 휑 하니 나가버려도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라오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구 집사는 아직까지 돌아온 남편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의 그런 행동이 위선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번에는 돈을 얼마나 뜯어가려고?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지?’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태도는 며칠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슬피 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남편은 마치 울보가 되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걸핏하면 눈물을 보였습니다. 아내를 붙들고 “나 같은 놈을 받아줘서 고맙다”며 울고, 밥을 먹다가도 울었습니다. 구 집사는 남편이 분명 이전의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정이 회복된 기쁨에 넘친 구 집사는 어느 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동네 사람들아, 예수를 믿으려면 나처럼 살아 계신 예수를 믿으세요. 죽은 다음 천당에서나 만나는 예수님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내 남편을 이렇게 데려오셨다네!”

구 집사는 매일 춤을 추었습니다. 한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해하던 교수님은 한달 만에 구 집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목사~니임!” 목소리에 얼마나 힘을 주어 말하는지 귀청이 다 멍멍할 정도였습니다. “왜 그러세요, 집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 “살아 계신 예수님이 우리 남편을 데려다주셨어요. 예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구요! 그래서 목사님을 만나뵈야 되겠어요.” 전화를 끊은 지 10분도 안 되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선 여인의 모습은 대단히 아름다웠습니다. 여인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예요. 저 몰라보시겠어요? 구 집사요.” “구 집사라니요? 그럴 리가...” 그 사이 구 집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불과 넉 달 전만 해도 다 죽어가던 60대 노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구 집사님, 혹시 그새 얼굴 근육 당겨주는 화장품이라도 바르신 거예요?” “목사님, 전 원래 화장 안 해요.” 화장을 안 했다는 구 집사의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30대 중반을 넘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신비를 체험한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은총을 체험한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일단 와 보세요”를 시작합니다. 왜 예수님께로 초청해야 합니까? 왜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인생을 고쳐 주시기 때문입니다.우리 병든 몸과 마음, 영혼과 관계도 고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 메시야가 되십니다. 깨어져 가는 가정도, 흔들리는 세상도 고쳐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초청해야 합니다. 역사상 최고의 명의, 의사이신 예수님 소문을 퍼뜨려야 합니다. 그분 앞으로 우리의 이웃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분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우리의 내일이 되십니다.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