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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깨어짐이 희망이다-김영봉목사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드리는 감명깊은설교 시간입니다.
전세계와 미국에 있는 목회자들의 "감명깊은설교"를 모아서 보내 드리는 시간,
기독교인들 교회생활의 참뜻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꼭 놓치지 마십시요.
감명깊은설교 시간에 참가했으면 좋겠다는 목사님들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처 메일은 john_lee_rfa@hotmail.com 입니다.

2008.10.26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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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109)
"깨어짐이 희망이다"
(When We Despair of Ourselves)
요한복음 John 21:15-17
  
(김 영봉 목사)
1.

오늘 읽은 이야기는 성경 안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아니, 이 짧은 이야기 안에 무슨 감동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하나?’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헬라어 원문을 읽지 않고는 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가야바의 집 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사건과 연결시켜 보아야만 그 정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의깊은 독서가 필요하고, 깊은 묵상이 필요한 본문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 감동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밤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허탕을 친 제자들에게 누군가 나타나 배의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 보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153 마리의 굵은 물고기가 그물에 찢어질듯 잡힙니다. 베드로는 지시하신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아 차리고는 배에서 뛰어 내려 첨벙 첨벙 예수님께로 뛰어 갑니다. 예수님은 어느 새 해변에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생선을 굽고 계십니다. 그 옆에는 빵도 있습니다. 뭍으로 올라온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신비로운 아침식사’를 나눕니다.
식사가 끝나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불러내십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일대일로 그분을 대면할 용기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뵐 때, 베드로는 마음이 저절로 움츠러드는 것을 느낍니다. 가야바의 집 뜰에서 자신이 세 번씩이나 부인한 사실 때문에 그분 앞에 서면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한 편으로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제자들의 등 뒤로 숨어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곁눈질로 예수님을 살피며 다른 제자들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불러내십니다. 베드로로서는 피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을 뒤로 하고 둘이서 해변을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조용히 옆으로 오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뜬금 없어 보이는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시몬은 베드로의 히브리어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아람어로 ‘게바’요, 헬라말로 ‘베드로’라는 이름입니다. 바위처럼 굳센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은 그를 게바라고 불렀지 시몬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다시 예전 이름을 부르실까? 베드로는 움찔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베드로가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헬라어 원문을 보지 않고는 이 질문의 무게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아가파오’라는 헬라어를 사용하십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시피,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변함 없는 사랑, 끝 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을 가리킬 때,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은 이런 뜻입니다. “너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2.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그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몇 시간 전,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예언하시자, 베드로는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13:37)라고 호언 장담을 했습니다.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의 사랑의 전모가 밝혀졌습니다. 그는 아가페적인 사랑, 변함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허걱’ 겁이 났을 것입니다. 아픈 데를 찔린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그 전 같았으면 또 헛소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실수를 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여기서도 역시 헬라어 원문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필레오’라는 동사로 답합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동일하게 해 놓았지만, 두 단어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아가파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을 가리키는 단어인 반면, ‘필레오’는 ‘우정’ 혹은 ‘자연적인 애정’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신약학자로서 신약성경을 의역했던 필립스 박사(J. B. Phillips)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의 친구인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Yes, Lord; You know that I am your friend.). 영국의 성서학자 존 마쉬(John Marsh)는 그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좋아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Yes, Lord; You know that I care for you.). 그러니까, 번역으로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그렇습니다”라고 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대답을 회피한 것입니다. 의미를 감안하여 풀어 쓰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 제가 변치 않는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님은 아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인간적인 사랑일뿐입니다. 저는 저의 이 사랑이 언제 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하지만 그게 접니다.”
이렇게 답하자, 예수님은 그 대답으로 충분하다는 듯,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 어린 양떼를 먹여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목자의 역할을 베드로에게 위임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사명은 영예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벅찬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10:11)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나의 어린 양떼를 돌보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알아듣고는 베드로는 겁이 났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 사랑으로는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말뜻을 못 알아 들으신 것이 아닌가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아가페적 사랑에는 자신이 없다고 말씀 드린 것이었는데, 예수님은 모르는 척, 그것으로 되었으니 내 양을 먹이라고 분부하십니다. 베드로는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 주님, 제 말 뜻은 그런 것이 아니고요…”라고 속 마음을 털어놓고 싶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3.

잠시 후, 예수님이 다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도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십니다. 베드로는 잘 됐다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와 동일하게 대답하되, ‘필레오’라는 단어를 힘 주어 말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아끼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렇게 답하고 나서 베드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이런 대답을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그러면 너는 물고기나 잡아 먹고 살아라.” 하지만 그분은 또 다시 “내 양떼를 쳐라”고 분부하십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답답해 짐을 느낍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의중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사랑 뿐인데, 그것으로는 예수님같은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바쳐서 양떼를 돌보는 것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잘 못 하다가는 오히려 삯군 목자가 될 것이 뻔합니다.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두 번 다시 가야바 법정에서처럼 깨어지기 싫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모르는 척 하십니다. 베드로는 다시금 속 마음을 터 놓고 ‘솔직 대담’(straight-talk)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베드로가 어물 어물하는 사이, 예수님이 세 번째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이번에는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베드로가 사용했던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끼는 것은 사실이냐? 그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느냐?” 이 질문을 듣고 베드로는 심히 불안해집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의중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왜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실까요? 베드로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혹시나 내가 가야바 법정에서 그분을 세 번 부인한 것을 생각하고 그러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베드로의 얼굴이 갑자기 달아 오르고, 심장 박동은 심하게 쿵쾅 거립니다.
아,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그 따뜻한 눈길과 손길로 베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계십니다. 이 포근한 사랑 앞에서 베드로는 무너져 내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아끼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 말의 뜻을 풀어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군요. 제가 주님을 세번 씩이나 부인한 것도 이미 아셨군요. 그러니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주님처럼 변치 않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의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동시에 베드로는 마음에 후련함을 느낍니다. 숨기고 있던 잘못을 고백했을 때의 그 시원함이 그의 마음에 차오릅니다. 예수님은 촉촉히 젖은 베드로의 눈을 쳐다 보면서 나직하게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내 양 떼를 먹여라.”
웬 일일까요? 그 분부가 처음에는 그렇게 부담스럽게 들렸는데, 이제는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꼭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시몬, 내가 다 안다. 너의 약함도 알고, 너의 실패도 안다. 너의 죄도 알고, 너의 한계도 안다. 너의 사랑 가지고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사랑을 가지고 시작해라. 너 시몬이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것이다. 네 양 떼가 아니다. 내 양 떼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는 나를 의지하여라. 그러면 된다. 그것이면 된다. 그러면 시몬, 너는 진실로 게바 곧 베드로가 될 것이다.”

4.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랑’이 가장 우선되며 또한 가장 본질이라는 진리를 확인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치도록 분부하시면서, 그에게 사랑이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그에게 보여 주면서 그의 사랑을 또한 확인했습니다. 그것이 앞으로 베드로의 삶과 활동의 유일한 원천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양 떼를 맡아 먹이고 기르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자로서의 훈련도 아니요, 양 떼에 대한 지식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사랑 그리고 그분께 대한 사랑,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 사랑만이 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고, 그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 주며, 방향을 잃지 않고 일할 수 있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일도 껍데기가 되어 버립니다. 자녀를 기르는 데 있어서도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노력도 허사가 됩니다. 유아 세례를 위해 준비하는 부모들에게 제가 잊지 않고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두 분이 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두 분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고 자라야만 사람다움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린 아이가 온전히 성장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랑의 관계에서 부모 모두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사랑을 하찮게 여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일에 성실하지 않은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는 사랑이 부족하여 생긴 공백을 물건으로 채우려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산더미같이 쌓인 장난감 더미에 파뭍혀 있으면서도 사랑에 허기져 허덕이고 있습니까? 진실로 사랑하기보다 돈 버는 일이 훨씬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물질의 풍요와 사랑의 결핍 속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지요!
일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땀흘려 일합니까? 죽을 수 없어서 일하고 삽니까? 진실로 그렇다면 그처럼 불행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일합니까? 더 많이 벌어서 더 잘 살기 위해서입니까? 얼마나 벌면 “이젠 됐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얼마나 잘 살아야?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면 그것으로 전부입니까? 더 이상은 없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상의 다른 삶의 이유가 없어서, 정작 목적을 이루고 난 이후에 권태와 환멸 가운데 빠져듭니까?
사랑이 이유가 되어 일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과거,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고통의 나날들을 기꺼이 견뎌 내셨습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일터에서 신나게 일할 힘을 제공해 줍니다. 혹은, 더 큰 사랑을 품고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는 민족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다니엘 센터에서 일하시는 최재혁 목사님을 비롯하여,? 세계 도처에서 일하시는 선교사님들이 그런 분들입니다. 조국과 민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사랑이 있는 한, 그 일은 결코 짐이 아닙니다. 그 어떤 짐도 짓누르는 멍에가 아니라 오히려 힘을 북돋는 명예가 됩니다.

5.

하지만 그 모든 종류의 사랑은 완전하고 참되며 영원한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 변함 없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끝없는 사랑, 순도 100%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헬라어로 ‘스토르게’라고 합니다)도 아가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성간의 사랑(‘에로스’)도 아가페에 비하면 모조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형제 간의 우애 혹은 친구 간의 우정(‘필리아’)도 아가페의 사랑에서 흘러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가페의 사랑을 알고 그것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조품 사랑들은 언젠가 빛을 잃고 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맞닥뜨려 그 충격에 현기증을 느끼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랑에 감복하여 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베드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이 다른 모든 사랑에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온전해지기를 바라십니까?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순도 100%의 사랑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자녀들에 대한 나의 사랑이 욕심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배우자를 온전히 사랑하기를 바라십니까? 먼저, 부부가 진실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알아가는 것에 비례하여 부부 사이의 사랑은 순수해져 갑니다. 나라와 민족과 인류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은 쉽게 이데올로기로 전락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할 때, 우리가 왜 일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일터를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품고 그 사랑의 힘으로 신나게 일합니다. 그렇게 일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죽지 못해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합니다. 일하는 동기가 달라지고, 일하는 태도가 달라지며, 일하는 목표가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이렇다면, 교회에서 하는 일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저처럼 목사로서 일하는 사람도 그렇고, 성가대원으로, 사역팀의 일원으로, 속장으로, 혹은 교사로 일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통해 섬기든, 그 사역의 동기는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원하여,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의 빛이 발산되며, 그 사랑의 기운이 전염됩니다. 분노로 일하는 사람들은 분노를 전염시키고, 욕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욕심을 전염시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로 봉사하기에 앞 서서 먼저 스스로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합니다. “김 목사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만일 그렇다면 목회를 해라. 그렇지 않다면, 김 목사야, 먼저 무릎 꿇고 사랑을 회복해라.”

6.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에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주님을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처럼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에 장담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누가 있어 “나는 사랑에 떳떳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 베드로처럼 깨어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아니, 이미도 수 십 번 깨어졌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에고(ego)가 강한 사람일수록 이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합니다. 특히, 남성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기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남성들은 자식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다고 우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인들도 압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목에 힘을 줍니다. 약한 자여, 그대는 남자로다! 여성들 가운데서도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은 이 일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를 어찌합니까? 사랑이 제일 중요한데, 우리는 사랑에 제일 무능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와의 우정에 조차, 형제간의 우애에 조차, 가족간의 사랑에 조차 무능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실은 거기서 희망이 생깁니다. 희망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사랑에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에 무능하다는 것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미 그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그분이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주십니다. 우리가 가진 필리아의 사랑을 그분이 잡아 아가페의 사랑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나누는 에로스의 사랑을 그분이 잡아 아가페의 사랑으로 높여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충만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으며, 삶의 의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고 싶습니다. “깨어지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오, 주님, 나를 도우소서!”라고 부르짖는 것이 실은 축복입니다. 자신에게서 절망을 보아야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희망을 찾게 됩니다.

7.

우리 모두에게 이 깨어짐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에 무능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항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절망하고, 주님의 사랑의 능력에서 희망을 찾아, 참된 사랑이 우리 속에서 자라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행하던 모든 모조품 사랑들이 온전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그 사랑의 능력으로써 우리 모두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그리고 ‘주님의 양떼들을 섬기는 선한 목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거룩한 축복을 받기 위해? 기도할 때마다 베드로처럼 이렇게 기도하십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저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저만 홀로 두시면 또 다시 실패하고 배반하고 등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을 떠나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의 능력으로는 사랑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하오니,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 제 마음을 아시지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주님의 제자로 살고 싶습니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의 능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주님, 저를 잡아 주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제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