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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희망의 복음 시리즈(3)-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경제위기를 영적 기회로'주제의 희망의 복음 시리즈 설교가 11월 16일 12월 4일까지 4회 주일동안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가 특별설교가 마련됩니다.
온 세계가 대공황을 두려워하고 있는 지금, 이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지난 2003년 '바늘 귀를 통과한 부자'를 통해 현재의 금융 위기의 주범 중 하나인 미국제 '번영의 복음'의 실상을 파헤쳤던 김영봉목사가 이제 그 위기 가운데서 희망의 복음을 전합니다.

희망의 복음 시리즈
11월 16일, 그래도 희망을 있다.  11월 23일, 그래도 출구는 있다.
11월 30일, 그래도 방법은 있다.  12월 4일, 그래도 믿을 데가 있다.

와싱톤한인교회
주소: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http://www.kumcgw.org/

                                             희망의 복음 시리즈(3)
                                   “그래도 방법은 있다”(Yet There Is a Way)
                                               --빌립보서 4:10-14
                                                   
                                                  (김 영봉 목사)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1.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자족하는 사람’입니다. 자족하는 것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매우 약해 보입니다. 하지만 자족하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위압되지 않으며, 그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체스터턴(C. K. Chesterton)은 자족하는 마음을 ‘창조적 힘’(creative force)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얼른 들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바울의 고백을 잠시 생각해 보면 체스터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교회에서는 헌금을 모아 보내 주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보내 준 헌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지금 다시 일어난 것을 보고,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10절). 그러면서 바로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11절). 지금 자신은 보내 준 돈 때문에 좋아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열 마음을 낸 것 때문에 기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11-12절)

그렇기 때문에 돈이 없다고 불평하거나 찌들리지 않고, 돈이 많다고 해서 타락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순교 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만, 그로 인해 짓눌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가 물질적으로 풍족할 때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돈이 많고 물질이 풍성해도 정도 이상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영은 그를 타락시키지 않았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으로 인해 바울은 물질적인 형편 때문에 발목이 잡히거나 변질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자족하는 마음은 그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초심을 잃지 않게 했고, 물질에 붙들리지 않고 자신의 부름을 위해 전심으로 일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복음 사업을 잠시 멈추고 돈을 벌려 하거나 fund raising을 하러 돌아다니지 않았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되었다고 해서 식도락을 즐기거나 사치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물질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전력 투구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족하는 마음은 체스터턴이 말한 대로 창조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2.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 위기는 그 뿌리가 너무 깊고, 그 범위가 너무 넓고, 그 문제가 너무 복잡합니다. 몇몇 사람이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선진국들이 서로 공조해야만 풀 수 있는 일이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거대하고 뿌리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같은 소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넋을 놓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 각자는 이 위기를 당해낼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얻는 것, 그것은 이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 중에서도 최고의 방법입니다.

'자족하다’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더 잘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게으르게 살아가는 태도를 가리키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아이가 조금만 노력하면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쓸 데 없는 일로 시간을 보냅니다. 성적표를 받아보니 C가 대세입니다. 답답해진 엄마는 아이에게 한 마디 합니다. “얘, 이래가지고 되겠니?” 그러면 아이가 정색을 하면서 대답합니다. “엄마, 미국에서 C학점은 평균이라는 뜻이거든요! 저는 이만하면 만족하거든요!” 아이는 C 학점에 ‘자족’하고 있는데, 부모는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한국 부모들은 학점 A가 Average의 A를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족한다는 말이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며 현실에 안주한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이 아니라,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이며 또한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자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족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일관했던 바울 사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능과 은사와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태도를 단거리 경주에 나선 사람에게 비유했습니다(고전 9:24). 그처럼 그는 전심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바울 사도가 자족했던 것은 물질적인 환경이었습니다. 무엇을 먹느냐, 어디서 자느냐, 무엇을 입느냐, 얼마를 버느냐, 얼마나 큰 집에서 사느냐,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인정을 받느냐,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느냐 등과 같은 문제들에 있어서 바울 사도는 자족했습니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탐하지 않았고, 거친 음식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공급해 주시는 것에 대해 만족하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같은 그의 태도로 인해 그 무엇도 바울의 발목을 잡지 못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살아 생전에 당했던 어려움들은 오늘의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진 고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그는 자신이 당했던 어려움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 바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고후 11:24-27).

3.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바울 사도가 짓눌리거나 상황에 발목 잡히지 않고 복음을 위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자족하는 마음 때문이었고,. 그가 물질적인 것에 대해 자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마음 안에서 충만한 만족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의 영원하신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외에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소원과 열망은 하나님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이 원래부터 자족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유대교 신자로 있을 때, 그리고 바리새파 율법학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그의 내면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 안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빈 자리를 외적인 것으로 채우려 했습니다. 학문으로 채우려 했고, 명예로 채우려 했으며, 업적으로 채우려 했습니다. 그렇게 절치부심 노력한 결과, 그는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갈증, 내적인 공허감은 더욱 커지고 심해졌습니다. 내적 만족이 없었으므로 그는 외적으로도 자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진정한 만족을 찾은 것은 전혀 다른 곳에서였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써 정결하게 씻김 받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로 회복된 자신을 새로이 발견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발견했고,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나라로 옮겨진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자, 그의 내면의 공허감은 사라지고, 그의 모든 열망과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 어떤 물질도 그의 행복을 증가시킬 수도 없고, 그 어떤 환경적인 어려움도 그의 행복을 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의 내면에 차고 넘쳤기에 외적인 상황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후반부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그가 자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전심전력할 수 있었던 모든 힘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4.

‘자족’은 대부분의 고등 종교와 철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입니다. 그리스 철학파 중 견유학파(the Cynics)라는 것이 있는데, 그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무엇이든 해 주고 싶다고 말했을 때, 햇볕을 쏘이도록 자리나 비켜 달라고 청했던 사람이 견유학파의 창시자인 디오게네스(Diogenes)입니다. 견유학파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스토아 학파(the Stoics)도 역시 자족을 가장 높은 덕목으로 가르쳤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명상록>은 바로 스토아 학파의 ‘자족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동양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진리의 핵심은 욕심을 버리고 자족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집멸도’(苦集滅道, Life means suffering; the origin of suffering is attachment; the cessesion of suffering is attainable; there is the path to the cession of suffering)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불자들이 수행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자족하는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교 경전 중 하나인 <논어>(Analects)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취하지 말아야 한다.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렇듯, 자족하는 마음은 건강한 종교와 철학이 모두 찬양하는 귀한 덕목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족’과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말하는 ‘자족’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족에 이르는 방법에 있어서 다릅니다. 견유학파나 스토아 학파 그리고 불교나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족에 이르기 위해서는 부단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마음 공부를 해야 합니다. 반면, 기독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먼저 내면의 만족을 얻어야 합니다.

이 차이는 인간의 문제에 대한 처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문제의 원인을 보고 또한 해법을 찾습니다. 인간이 물질에 대해서 가지는 탐욕과 집착은 인간 내면에 있는 불만족에서 생기는 것이며, 그 내면적인 불만족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생겨났다는 것이 기독교의 시각입니다. 그 내면적인 불만족감 혹은 공허감은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치료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단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부유한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 가운데서 어릴 때부터 집 안에서 도둑질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심리적인 질병입니다. 부모가 돈을 잘 법니다. 집 안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돈을 달라고 하면 부모가 부족함 없이 줍니다. 사 달라는 것을 다 사 줍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몰래 부모의 지갑에서 돈을 빼내어 자기만의 금고에 숨겨 놓습니다.

이 아이의 문제는 욕구불만입니다.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부모를 절대적으로 믿지 못합니다. 무의식에서 그 아이는 언제든지 부모가 자신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으로도, 없는 물건 없이 풍족하고 살고 잇다는 사실로도, 달라면 언제든지 부모가 용돈을 준다는 사실로도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부모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를 그 때를 위해 돈을 모아 놓아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질병은 부모가 그 아이에게 진실한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어 내면의 빈 자리가 채워지기 전까지 치료되지 않습니다.

5.

혹시 우리도 부모 몰래 돈을 훔쳐 쌓아 놓는 부자집 아이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아닐까요? 적어도 미국에 사는 우리는, 이 세상을 한 나라로 생각해 보면, 제일 잘 사는 집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 부가 대부분 빚이기는 합니다만, 하여튼 우리는 가장 물자가 풍부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먹을 것은 풍성하고, 입을 것도 풍성합니다. 올 해 ‘검은 금요일’(Black Friday)에도 몰(mall)은 여전히 인산인해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족할 줄 모릅니다. 지금껏 누려 오던 것을 포기하기를 거부합니다. 살림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비참하게 생각합니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으고 또 모읍니다. 그래서 힘에 부치도록 큰 집을 사고, 비싼 차를 사고, 고급 물건을 구입합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를 날을 대비해 돈을 숨겨 놓는 아이처럼, 이토록 부유한 나라에 사는 우리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으로 인해 많은 돈을 쌓아 놓아야만 만족합니다. 하지만 그 만족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마음은 또 다시 불안해지고, 그 불안감을 메꾸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우리 자신을 그리고 이웃을 들볶습니다.

이렇게 불안할 때, 요가를 배우거나 명상을 배우거나 마음 공부를 하여 도움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요가도, 명상도, 마음 공부도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잠시 동안 위안을 주고 여유를 만들어 줄 수는 있겠지만, 불만족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내적인 불만족감 혹은 공허감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생긴 것이므로, 그분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진정한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내적 만족에서 솟아나는 자족의 능력,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입니다. 이 경제 위기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방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두 번씩이나 “내가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우리도 이 경제 위기를 대비하여 자족의 비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누구에게 배우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십자가에 나의 옛 사람을 못박고, 그분의 영으로 새로 지어져서,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족의 비결을 배우는 길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내면에 더할 수도 감할 수도 없는 만족감이 차오를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물질적으로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족지수(contentment degree)는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의 자족지수는 과연 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기고도 남을만큼 충분합니까? 혹시, 물질적인 환경에 작은 변화만 생겨도 일희일비할 정도로 우리의 자족지수가 낮은 것은 아닙니까? 혹시 그렇다면 우리 함께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십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점검 해 보십시다. 우리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상관 없이 흔들림 없고 변함 없는 태도로 살아갈 영적 능력을 구하십시다.

6.

저도, 다원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두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 자신에게만큼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저 자신에게는 구원받을 자격도, 그만한 공로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느 날 새벽 기도회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제 자신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너는 과연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그분이 너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질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온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께 저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그분이 제게 관심 가질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언제나 제가 원할 때 그분 앞에 나아갑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진실로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저 개인으로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저의 허물을 덮어 주시며, 저를 성부 하나님 앞에 세워 주시고 두둔해 주시는 분이 계시지 않다면, 저는 감히 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분의 거룩하심에 타 죽고 말 것입니다. 저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입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쏟으신 보혈로써 죄씻음을 받았고, 그분의 성령으로써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분 안에서 저는 저 자신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저를 불러 주셔서 새로운 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기셨다고 말씀하셨고, 저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저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분은 나의 아버지이시며, 저는 그분의 아들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환난도, 곤고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죽음의 위협도 이 사실을 흔들지 못합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제게 있으니,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하여 제 내면의 행복이 더 커지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으로 궁핍하다고 해서 제 내면의 행복이 더 작아지는 것도 아님을 압니다. 저의 믿음이 약하여 아직도 가끔은 잠시 물질에 눈이 멀 때도 있고, 잠시 곤핍함에 마음이 짓눌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족하는 마음이 승할 때가 더 많다는 점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감히 바울 사도처럼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 모습을 조금씩 닮아 살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저의 능력이 아니라 저를 구원하신 주님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저의 영성이 깊어지고 제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커진다면, 저도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성해도 그것으로 인해 부패하지 않고,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그것으로 인해 짓눌리지 않는 일에 더욱 능해질 것입니다. 저는 꿈을 꿉니다. 이렇게 영적 생활을 지속함으로 저의 자족하는 능력이 더욱 커져, 아무리 많은 돈을 쥐어 주어도 나에게 필요한 만큼을 제외한 나머지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곤핍한 상황에 처해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족함을 알고 자족하며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충만히 얻게 되기를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외적인 상황에 관계 없이 늘 같은 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의 누구도, 그 어떤 상황도 당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것입니다.

7.

이것은 목사인 저만의 바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참다운 진리를 추구하고 참다운 삶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특별히, 이것이 경제 위기를 당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의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배워 자족하는 자세로 살아가면, 우리는 약해 보이지만 진실로 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방법을 배워 살면 우리는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고후 6:10)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런 사람을 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노래할 이유를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기를, 여기까지 성장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며, 그것이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물질의 주인으로 등극하여 통치하는 방법이고, 그것이 현세를 살면서 천국을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 마음에 오셔서 주인이 되어 주소서.
저희 마음을 다스리셔서
저희의 열망을 채워주소서.
모든 물질적인 욕심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영적 만족을 허락하소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
물질을 사용하되 물질에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
부함에 처하여 변질되지 않게 하시고
가난에 처하여 짓눌리지 않게 하소서.
주님께서 주시는 그 능력으로
이 세상을 이기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