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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시리즈 (1)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김 영봉 목사)

2009.1.4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Rooted and Grounded in Love)
                                                               -에베소서 3:14-19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Happy New Year! 2009년도 새 해에 여러분 모두의 발걸음이 황소처럼 되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견고하고 우직하게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그 걸음 걸음을 지키실 줄로 믿습니다.

새 해가 되면 새 해 결심(new year resolution)이란 것을 하게 됩니다. 어릴 때는 해마다 꽤 거창한 결심을 합니다. 붉은 글씨로 적어서 책상 머리에 붙여 놓기도 하고, 머리에 띠를 동여 매고 결의를 다져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심은 흐지부지되고, 자신의 박약한 의지에 실망합니다. 그렇게 결심과 실망을 반복하면서 새 해 결심은 점점 작아지고, 중년을 지나서는 작은 소망은 가져 보지만 뭘 해 보겠다는 거창한 결심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됩니다.

잘 해 보려는 노력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보고 싶고, 좀 더 바르게 살아보고 싶은 열망이 있는데, 살아가면서 그 열망을 이루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를 타락으로 이끄는 힘은 매우 강한데, 거룩한 삶으로 이끄는 힘은 참으로 약합니다.

오늘부터 우리 교회는 다섯 번째 장기 계획을 시작합니다.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를 향하여!”라는 표어를 내걸고, 우리 각자가 더욱 그리스도인다워지며 우리 교회가 더욱 교회다워지는 일을 위해 힘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다움의 핵심은 사랑이며, 교회다움의 핵심도 사랑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그 영원하고도 지고 지순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10% 있으면 우리는 10%만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교회에 50% 있으면, 우리 교회는 50% 정도 진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와싱톤한인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 여러분, 개인적으로 여러분이 새 해에 어떤 결심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사랑’을 거기에 더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을 우리 모두의 소망이요 결의로 삼아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결심이라도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 개인의 소망과 교회 전체의 소망이 일치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같은 특별한 결심을 하면서 우리는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겠다고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혈서를 쓴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2.

특별히,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데에도 서툴기 짝이 없습니다. 사랑을 연습하도록 가장 가까이 붙여 주신 가족조차도 제대로 사랑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구속을 느낍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자녀는 부모로부터 억압을 느끼며 분노를 쌓아 갑니다. 우리는 이렇듯 사랑에 무식하며 사랑에 서툽니다. 그러니 가족 아닌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얼마나 더 서툴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사랑을 말하고 다닌다면, 우리는 분명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 사랑하는 교회가 되는 것을 우리의 기도이자 소망으로 마음에 품고 살아가되, 그것을 내세우거나 떠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부족한 것을 이유로 고발한다면, 이 세상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의 부족을 고발하는 그 사람은 그런 고발을 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적어도 사랑에 관한 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나 자신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 자신만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속에 더 사랑이 커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바로 알게 되고,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고민입니다. 저는 오늘 읽은 바울 사도의 말씀에서 그 대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라는 도시에 사는 교인들을 위한 기도를 적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적어도 세 가지 진실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 바울은 우리에게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께만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프레데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가 사랑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의 첫 단계는 오직 한 종류의 사랑만 있다고 믿는다. 중간 단계는 사랑에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리스인들은 각각의 사랑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고 믿는다. 마지막 단계는 오직 한 종류의 사랑만 있다고 믿는다.

바울은 세 번째 단계에서 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단계 혹은 두 번째 단계에서 이 기도를 읽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사랑, 연인 사이의 사랑,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친구와 나누는 우정 등은 다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대한 모조품일 따름입니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자격이 있는 사랑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그것 뿐입니다.

둘째,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으로서는 알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머리로 배워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오직 경험하여 알 수 있는 것이며, 경험하여 아는 것만큼 이해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또한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 있습니다. 의지력을 발동시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바울은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사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바울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면서 터를 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도 나무를 심어 보아서 압니다만, 새로 심겨진 나무가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완전히 터를 잡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땅 속에 심겨진 뿌리는 한 시도 쉬지 않고 흙으로부터 양분과 수분을 흡수합니다. 그렇게 하여 자라가고 터를 잡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그 나무는 꽃도 피고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정원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가야 합니다. 거기서 떠나지 않고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 사랑의 꽃도 피고 사랑의 열매도 맺어집니다. 하나님의 정원에 뿌리를 내린다는 말은 항상 하나님과 사귀며 그 사랑을 맛보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없는 진짜 사랑을 맛봄으로써 우리는 그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3.

참된 사랑을 원하십니까? 연인이 서로 만나 사귀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 사귀어야 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사는 것은 사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은 사귐을 위해서입니다. 아담에게 하와를 지어 주신 것도 사귐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귐이 인생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사귐이 없이는 인간은 살 수 없습니다. 인생의 본질은 사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눌 사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사귐’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 단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사귐이라는 말에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신뢰와 기대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만나서 ‘저 사람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칩시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요, 그 사람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귀려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열고 만나려 합니다. 그같은 마음 자세가 없으면 ‘만남’은 가능할지 몰라도 ‘사귐’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귀려는 마음을 가졌다는 말은 이미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셋째, 사귐은 지속적인 만남을 전제합니다. 한 두 번 만나고 사귀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기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만나야만 사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사귐은 관계가 지속적으로 깊어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누군가와 사귀는 사람은 그 사람과 더 가까와지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귐이 깊어질수록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그럴 수록 더 자주 만나 사귀고 싶어집니다.

다섯째, 사귐은 늘 미완성입니다. 어느 정도 사귀고 나서 ‘이만하면 됐다’고 결론을 낸다면, 진정한 사귐의 관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귐은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 지상에서는 언제나 진행형입니다.

여섯째, 사귐은 두 사람 사이에 인격적 교류가 일어나게 하며, 그 인격적 교류는 두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서로 닮게 만듭니다. 의도적으로 모방해서 닮는 것이 아니라, 사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닮아갑니다.

하나님과 사귄다는 말은 이같은 뜻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귀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지속적으로 그분과의 만남을 추구하며, 그분과 더 깊은 관계에 이르기 위해 힘을 씁니다. 그렇게 사귀어 나갈 때,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전이됩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사귈 때, 우리의 존재는 그분의 사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무럭무럭 자라나 든든히 터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사랑의 꽃을 피우고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4.

오래 전, 저의 집 두 아이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납니다. 중학교 때의 일이라고 기억하는데, 어느 날, 교회에 다녀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오빠가 동생에게 묻습니다. “야, 너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냐?” 동생은 그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하더니,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있어”라고 답합니다. 그 대답에 아들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다른 애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아직 그렇게 말이 안 돼. 왜 그러지?”

이 대화를 옆에서 들으면서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아들 아이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 정직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딸 아이의 배짱이 다행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정말 근거 없는 자신감처럼 보입니다만, 사실은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증언이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없다던 아들도,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다던 딸도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아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직 신앙에 대해 미숙했던 아이들의 대화이지만, 그 안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아이가 먼저 부모를 사랑하는 법은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먼저 사랑하고, 아이가 그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서 자랄 때, 그 아이는 부모를 사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사랑을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해야만 그분과 사귀고 싶어집니다.

여러분, 이 사랑에 대해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이 내 마음에 느껴질 때까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모순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그분과 사귈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려면 그분과 사귀어야 한다니,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 우리는 그분을 가까이 하고 그분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읽고 그분을 예배하며 십자가를 묵상하고 그분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고,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더욱 깊이 찾게 만듭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니까? 얼마나 하나님과 깊이 사귀고 계십니까? 일 주일에 한 번 예배에 나와 사귀는 것이 전부입니까? 물론, 일 주일에 한 번 드리는 이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일 예배를 지키는 것조차도 성실하지 않다면 영성의 성장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주일 예배로 충분하다고 여기신다면, 여러분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머물러 계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여러분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과연 일 주일에 한 시간의 예배로써 그 모든 세력을 물리치고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중심에 머물러 계시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하나님과의 사귐을 돕기 위해, 교회에서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2009년도에는 새벽기도회에 더 많은 기도자들이 모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각자 집에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읽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더욱 좋습니다. 새벽기도회는 교회의 영성의 샘과 같습니다. 우리 각자를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새벽기도회는 매우 중요한 영성의 마당입니다.

맥클린에서 모이는 수요 저녁 예배에서는 시편 강해를 하고 있고, 매나싸스에서 모이는 금요 저녁 기도회에서는 뜨거운 찬양과 말씀으로 여러분의 영성을 도울 것입니다. 여러분의 형편에 맞게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가정마다 돌아가며 드리는 속회 예배도 있습니다. 영성 수양회를 통해 하나님과의 사귐에 집중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영성 훈련 모임과 영성 기도회를 지속할 것입니다. 우리의 바램은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우리 교우들이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독대하여 사귐에 힘쓰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려 지식을 초월하는 그 사랑을 배우고 행할 수 있으려면, 매일같이 하나님과 사귀어야 합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과 사귀어야 합니다. 그런 사귐의 시간이 우리의 일상 생활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 교회는 The Upper Room Ministry에서 출판하는 <다락방>을 공급해 드렸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이것을 무료로 공급해 왔더니 너무나 남발되고 남용되고 허비되는 경향이 있다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래서 올 해부터는 원가에서 조금 못 미치는 값, 2달러에 판매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락방>을 찾는 손길이 뚝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혹시나 하나님과의 사귐에 대한 열의가 이토록 낮다는 뜻이 아니길 바랍니다. QT가 삶의 습관으로 자리를 잡았다면, 그리고 그 동안 <다락방>으로 경건 생활을 하면서 큰 도움을 받았다면, 2달러가 장애가 되지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

일상 생활 안에 시간의 성소를 세웁시다. 방해 받지 않고 하나님을 독대할 수 있는 시간을 구별하여 바칩시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30분 이상의 시간을 내어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의 일과 중에 한 번 더 시간을 내어 하나님과 사귀는 시간을 가집시다. 일과 중에 중간 중간에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분을 찬송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함으로 거룩한 시간을 보내십시다. 올 한 해 동안 하나님과 사귐의 시간을 가지는 거룩한 습관을 우리 삶에 자리잡게 하십시다.

6.

지난 주, 제가 뉴저지에서 목회할 때 만났던 Ina Moore라는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8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분은 퀘이커 교도 가정에서 자랐는데, 나중에 감리교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이 부부는 주일에는 감리교인으로, 평일에는 퀘이커 교도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주일에는 감리교인으로 살고 평일에는 퀘이커 교도로 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주일에 모임(meeting)을 가지지만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상당히 다릅니다. 모여서 침묵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퀘이커 교도들의 주일 예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worship이라고 말하지 않고 meeting이라고 말합니다. Moore 부부는 감리교회의 예배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예배에 참여하고, 여러 가지로 봉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평일에는 퀘이커 교도들의 습관을 따라 하나님과 사귀는 일에 성실했습니다. 분주하고 바쁜 일상 중에도 조용한 시간(Quite Time)을 가지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부부간에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일을 즐겼습니다. 영성에 도움을 주는 책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저도 이 분야에 읽은 책이 꽤 많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분들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간에는 퀘이커 교도로 살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제가 이 부부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그분들에게서 특별한 무엇을 느꼈습니다.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중심이 그들에게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알았지만, 모든 사람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커다란 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매우 커다란 미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미소는 마주한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구든, 그들을 마주하면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는데, 그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제 마음 깊은 곳까지 들여다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마음 깊은 상처까지 보고 위로하는 것 같아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이런 특별한 느낌을 경험하면서 “과연 이게 무엇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두 사람을 깊이 사귀면서 안 것이지만, 그 차이는 바로 그 두 사람이 하나님과 나누었던 깊은 사귐에 있었습니다. 그 남편 Hall Moore는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Practicing the Presence of God)이라는 책을 성경 다음으로 아끼며 읽었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남편 Hall Moore가 임종할 때, 그 어려운 기간을 저는 그분과 함께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분의 마지막을 보면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고 산 사람이 참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 어려운 기간 동안에도 의식이 들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사랑하던 로렌스 형제의 책, 책장마다 다 떨어져서 고무 밴드로 묶어 놓은 그 책을 제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선물을 아주 귀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인 Ina가 지난 주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분과 헤어진 지 벌써 4년이 되어 가지만, 그분의 그 깊은 눈동자와 미소 그리고 활기에 차 있지만 또한 흔들림 없었던 그 모습이 아직도 제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저에게 그리고 그들을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사귐이 어떤 것인지를 증언하고 갔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 뿌리를 박고 든든히 터를 잡고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도하면서 가장 먼저 그 부부를 알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분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기억하게 될까? 나를 만난 결과로 인해 그들이 얻게 될 교훈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서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 마음을 다할 것을 말입니다. 내 존재가 그분의 사랑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도록 그분과 사귀는 일에 전심할 것을 말입니다. 저에게도 Moore 부부에게서 풍겨 나오던 사귐의 능력이 발산되기를 꿈꾸며 영성 생활에 더 힘쓸 것을 말입니다. 저의 이 다짐과 열망과 기도가 와싱톤 한인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에게 그리고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짜 그리스도인 되는 길이며,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진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나를 가까이 하라. 나도 너희를 가까이 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
저희의 마음을 이끄시어
늘 주님을 가까이 하게 하시고
주님과 사귀는 시간을 사모하게 하소서.
성도들과 함께 모여 사귀게 하시고
홀로 골방에서 사귀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에 터를 잡고
그 안에 뿌리 내리도록
저희를 잡아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