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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글로벌어린이재단 방숙자 이사장① 초기 이민자와 함께한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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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global child 200
방숙자 이사장
국제 봉사 단체로 성장한 글로벌 어린이 재단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었던 IMF,
즉 구제금융 사건으로 1998년 굶는 아이들이 생긴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워싱턴의 한인 어머니들이
모여 배고픈 한국의 어린이들을 돕기로 한다. 그것이 바로 글로벌 어린이, 즉 세계어린이 재단의
시발점이다.

그리고 글로벌 어린이 재단은 불과 10년 만에 전 세계 19개 지부, 회원 3,500명, 총기부금 170만 달러
규모의 자선 활동 단체로 일궈낸다. 바로 억척과 열정의 어머니 단체로 성장한 것이다. 글로벌 어린이
재단은 이젠 그 영역을 넓혀 세계 16여 개 나라의 어린이를 돕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글로벌 어린이 재단의 창설자인 방숙자 이사장을 만나
1,970대 초반 한인 이민자와 함께한 봉사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방숙자 씨가 미국에 온 지 40년이 된다. 그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미국에 왔다.

:저는 미국에 올 때 간호원으로 왔습니다. 1969년에 왔는데 별로 어려움 없이 미국생활에
적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숙자 씨는1961년에 영국의 애딘버러대학에서 간호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당시에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 물론 영어가 서툴고 문화가 다르니까 어려움이 많았지요. 그 당시 밤낮으로 공부 밖에는
한 것이 없었으니까. 그저 공부하고 고생한 것만 기억에 남습니다.

방숙자 씨는 1970년 초 한인들이 큰 희망을 안고 미국에 왔지만, 문화가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아
본의 아니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상담소를 열어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 한인 이민자들을 돕기 시작한 것이 워싱턴에서 상담소였습니다. 제가 스스로 시작했다기
보다는 지금은 고인이 됐습니다만 이태영 박사님이 미국의 교포들 특히 한인 여성들을
도와야 되지 않겠느냐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돕기 시작한 것이 제가 사회봉사의 첫발을 디뎌 놓게 된 동기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숙자 씨는 당시 한인들과 함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 제가 기억에 남는 것은 한미부인회를 이태영 박사가 돕기 시작할 때에 기억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첫째는 여자들이 말을 못하니까, 자꾸 소심해져서. 가정에 어려움이 있게
되고 남편이 직장에 나갈 때 돈을 책상 위에 놔두고 이게 밥값이다 하고 알려 줬지마는
여자분들은 그 돈을 가지고 사 먹을 줄도 모르곤 했는데 그래서 저희가 방문을 해서 남편을
만나면은 제 부인은 돈을 줘도 돈을 쓸 줄도 모르고 밥을 해서 먹을 줄도 모른다는 핍박 받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고요.

방숙자 씨는 초기 한인들은 참으로 힘든 생활을 했기에 오늘날 같은 실질적인 기반을 이룬 것이라고
강조한다.

: 달을 보고 나가서 달을 보면서 들어오곤 했으니까요. 즉 새벽에 나가면 밤중에 들어오니까.
아이들 교육 때문에 왔는데 아이들 얼굴도 못 보지 않아요. 전화로 한두 마디 할 정도니까.

방숙자 씨는 본격적인 가정상담소를 운영하게 된 것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길이 없는 여성들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그 당시에는 1세들을 교회를 통해서 개인을 통해서 상담소를 통해서 아이들과 따뜻한
대화를 하는 어머니 아버지, 자식들을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또 아이들과 같이 함께
밥을 먹고 김치를 먹는 문화를 나누는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호소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동포들을 도와야 되지 않겠느냐고 해서 시작한 것이 상담소입니다.
1971년에 시작했지요.

방숙자 씨는 상담소 운영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 당시 무료 상담을 했습니다. 그 당시 표어가 ‘나의 1달러가 우리의 이웃을 돕는다’
‘나의 1달러를 갖고 이웃을 돕자!’라는 표어로 시작했는데 생각 뜻밖에 남자분이 많이
왔습니다. 그리고 미군과 결혼해서 사는 분들 그리고 나이 드신 한인 1세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돌보면서 호소하는 일도 있었고 특히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은 미국 문화를
잘 몰라서 남편과 아침에 싸우고 한국식으로 자동차가 떠나려고 하면 자동차를 못 가게
가로막아 경찰서에서 나와 데려가면 저희가 그 사람을 위해 온종일 기다려서 (그 당시
상담소가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큰 힘이었어요.) 저희는 경찰들과 상담하고 그 여성을
석방해주면 우리 상담소에서 보호하겠다 해서 그런 어려운 일들을 해결함으로 큰 힘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방숙자 씨는 봉사라는 자체가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는것이라고 자신의
경험을 얘기한다.

: 나를 줌으로써 내가 받는 만족감, 뿌듯한 마음 그것 때문에 우리가 봉사를 하고
만족감으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

이민사회의 초창기 시절 한인들은 양배추로 김치를 담아 먹었다고 회고하는데요,

:당시는 한국사람들이 적었을 때이니까. 한국 부모들이 오면 미국에 왔으니까 햄버거를
먹어야된다. 젊은 어머니들이 가르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러지 말자 아이들이
자기의 근본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김치도 먹이고 멸치도 먹이고 밥도
먹여야된다고 설명해 줬습니다. 그당시 참으로 김치는 양배추를 썰어서 담아 먹는 것이
김치였으니까. 이민자들이 많아지면서 한참 후에 한국 식품점이 많이 생기고 김치도
사 먹을 수 있고 지금은 한식이 한국보다 더 맛있고 잘 한다고 하지요. 그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에 아쉬운지도 몰랐고그 김치를 먹자 하는 것은 화려한 생각이 아닌가 싶어요.

북한을 비롯한 전 세계 한인 여성에게 주는 말은?

:한국 여성들 똑똑하고 훌륭하니까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우리의 책임을 다하고 모국을
잊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한국에 있는 우리 조국을 돕는 것은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동양의
따뜻한 아름다운 미를 가지고 정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며 서로 돕는 그런 세상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글로벌 어린이 재단의 창설자인 방숙자 이사장으로부터 1
,970대 초반의 한인 이민자와 함께한 봉사의 이야기 1부 함께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글로벌 어린이 재단의 활동을 알아봅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