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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DC 흑인들의 다정한 친구 최상진 목사①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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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진 목사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북서부의 한 거리에는 많은 흑인이 모여 사는 거주지가 있다.

이곳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백인 부촌지역으로 큰 호황을 누렸지만 언젠가부터 우범지대로 변해
한때는 택시들도 가기를 꺼리는 곳이다.

많은 사람도 이곳을 피해 돌아간다는 워싱턴 DC 우범 지역에 한인 최상진 씨가 눈앞에 둔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사랑의 봉사자로 나섰다. 이것이 바로 ‘평화나눔공동체’다.

평화나눔공동체는 도시 빈민지역 복음화를 위해 1996년 100인 기도회를 시작으로 발족하여 이제는
인종화합을 위한 선교센터로, 흑인들의 다정한 친구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DC에서 21세기 도시 빈민 자를 섬기는
평화나눔공동체의 운영자로 최상진 목사의 삶의 현장을 찾아가본다.

최상진 씨는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 2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다. 최씨는 어린 시절 아주
평화롭고 곱게 자랐으며 아버지가 봉사자로서 사명을 위해 이름을 최상진으로 지어 주셨다고 한다.

: 제 이름은 최상진, 높을 최에다 서로 상 진정할 진 혹은 참진 고요할 진 다시 말하면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로 평화하라 이런 의미에서 이름을 주셨어요.

최상진 씨의 아버지는 6.25 전쟁 중에 형제가 한 사람은 북한편에서 그리고 한 사람은 남한편에서
적으로 싸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막내아들의 이름을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 큰아버지가 625 동란 중에 북한군에 가담해서 작은 리더로 활동하고 저희 아버지는
남한군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두 형제가 625 전쟁 중에 적으로 싸우게 됐습니다.
형제간의 남북의 군으로 싸우게 되어 저희 아버지는 많은 상처를 입고, 동네 사람들도
상처를 받아서 이제는 가족이 더는 민족이 더는 남과 북으로 싸워서는 안 되겠다는
의미에서 막내아들 이름을 PEACE MAKER(평화를 추구하는 사람) 이렇게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최상진 씨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탓인지 세상에 평화를 심는 자로 성장했다고 이야기한다.

: 저는 어렸을 때부터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아버지로부터 깨달아서 그러한 꿈 또 가난한
사람을 돕고 세상의 평화를 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들을 가지고 자라 왔습니다.

최상진 씨는 미국에서 하는 이 어려운 사역은 전문 간호사로서 일하는 부인의 이해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 특히 저는 부인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미 병원에서 많은 환자를 돌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빈민가에서 하는 사역에 대해서 많은 이해심을 가지고 후원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자리에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고요.

최상진 씨가 오늘의 봉사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또 하나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종교적인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3남 2녀의 막내인데 저희 어머니는 82세로 한국에 계십니다. 그래서 한국에 자주
나가는 편입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기독교적인 성향이 큽니다. 저희 집안에 장로 목회자
등이 많은데 제가 23번째 목회자라고 하면 아마 다 놀라실 겁니다.

최상진 씨의 학창시절은 어떠했을까? 그는 학창시절 가족과 이웃 그리고 교회에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사회봉사는 1970년 19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눈을 뜨게했다.

: 사회문제에 눈을 뜨고서 야학에서 가난한 노동자 농민들을 가르쳐 주었고 또 그러한
민주화 운동을 하는데 많이 관심을 두고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많은
생각을 한 것 중에 하나가 내 인생을 이제는 사랑과 화해와 평화를 심는데 바치는 데
(그 당시 어린 마음이지만) 거국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최상진 씨의 오늘은 이렇게 시작이 된다. 한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남북통일에
대한 논문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를 생각하다 미국의 유학과정에서 세계의 평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그래서 그 무시무시한 흑인 슬럼가에 입성했다.

: 저는 슈바이처 박사와 같이 저 가난한 아프리카에 가서 의사가 돼서 선교하고 이런
봉사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길은 가지 못하고 정치학에 길을 가게 돼서
미국까지 유학을 오게 됐죠. 박사과정이 분쟁해결 학이라고 해서 남한과 북한의 관계
혹은 이라크와 미국의 관계 국제적인 유엔관계인 분쟁해결 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때가 1995년이었습니다. 그런데 1992년에 LA에 한 흑 갈등이 시발이 된 LA 흑인
폭동이 일어나지요. 백인과의 갈등이 원인이었지마는 그 여파가 제가 워싱턴 조지 메이슨
대학에서 공부할 때 워싱턴지역도 뉴욕 시카고에서도 한 흑 갈등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쟁 해결 학을 공부하지만 왜 인종들 간의 특히 흑인들과 우리 한인들하고 총을
쏴서 죽이나 하는데 궁금해했고 혹시 현장에 한번 들어갈 기회가 있다면 가서 그 문제를
알아보자 생각을 하고 현장에 들어왔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서운 흑인 슬럼가 마약 지역에
들어와서 그러한 문제를 파헤치기 됐지요. 그런데 저는 간단한 걸 깨달았습니다.

최상진 씨는 막상 흑인들을 만나보니 한국사람과 비슷함을 느꼈다고 한다. 얼마든지 한 흑 간의
갈등을 풀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박사과정도 포기하고 평화를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기를 다짐했다고 한다.

: 일단 흑인지역에 들어오니까. 너무너무 무섭지마는 막상 흑인들을 만나보니까. 너무
단순하고 너무 착하다는 겁니다. 이웃사촌과 같은 거예요. 한국사람들하고는, 왜냐하면
흑인들이 얼마나 수다를 많이 떠는지 몰라요. 수다 떠는 것 보면 한국사람과 비슷해요.
흑인들이 얼마나 시간을 안 지키는지 몰라요. 매번 늦어요. 이렇게 느린 것을 보면
코리언타임이라고하죠. 한국사람과 비슷합니다. 흑인들이 매운 거나 곱창, 돼지고기,
삼겹살 잘 먹는지 몰라요. 그래서 흑인들은 우리의 이웃사촌이 아니냐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공부를 했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바로 해결하자
그래서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바로 한인과 흑인 간의 분쟁이 있는 평화나눔공동체,
즉 평화를 나누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세우게 됐습니다.

최상진 씨는 한국에서 수 천명되는 교회에서 지도력을 배우고 유명한 목회자의 꿈도 있었지만,
막상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뤄가는 꿈을 갖게 됐다고
설명한다.

: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고 또 굶어서 죽어가는 또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준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여기서 활동하다 보니까. 이제는 거대한 교회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작은 사랑이 불씨가 되어서 이 지역에 하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르는
그런 꿈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최상진 씨는 2000년에 목사 안수를 받는데 30-40명의 노숙자가 축하객으로 초대됐다고 한다.

: 한국사람들을 거의 초청하지 않고 노숙자들만 초청했었습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선교센터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저희 어머님이 한국에서 전화하셨습니다. 그때는
이미 70대 후반이십니다. 어머니가 이제 박사학위를 마쳤느냐고 마쳤으면 돌아오라고
하셨는데, 저는 박사학위를 어머니 몰래 포기하고 목사안수를 먼저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너무 슬퍼하시면서 그래도 목사 안수를 받는 현장에 오시겠다고
비행기를 타고 오셨습니다.

최상진 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목사 안수 취임식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저는 어머니에게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노인이시라서 이해를 못 하셨습니다. 목사안수
취임식을 하는데 노숙자들 밖에 없고 가난한 사람밖에 없나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DC 슬럼가 현장에서 30-40명의 노숙자만 데려다 놓고 목사
안수를 받았을 때 저희 어머니가 뒤에 않으셔서 얼마나 엉 엉 우셨는지 모릅니다.
막내아들 꿈 있게 키워보고 교수가 되든 훌륭한 교회 목사가 되든 크게 성장시켜보려
했던 막내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교회 가장 불쌍한 저 거지들의 담임목사가 됐다고
할 때 얼마나 우셨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목사 안수식이 끝나고 저희 어머니께
사과를 드리고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했을 때 어머니는 거절하셨고 계속 우셨습니다.

그렇게 슬퍼하시던 최상진 씨 어머니는 마침내 아들의 장한 일을 생각하고 위로와 기도로
도왔다고 한다. 최상진 씨는 어머니 위로의 한마디가 소중했다고 말한다.

: 제가 3번째 부탁했을 때 저희 어머님이 저에 손을 잡으셨습니다. 제 손을 잡으시면서
아들아! 장하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 하마 그때
저에게 위로의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에 힘입어서 지금까지도
열심히 이 사역을 하면서 큰 대형교회의 거대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저 가난한 영혼들과 한마음이 돼서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지금도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최상진 씨는 위험하고 어려운 평화나눔공동체를 13년간 이끌어 가면서 이제는 보람으로 바꿔가고
있다고 전한다.

: 처음 시작했을 때는 1년에 400명에서 450명이 총에 맞아 죽어가는 지역이었습니다.
매일 한 명씩 죽어간다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슬럼가이지만 그러나
지금 저는 감사하게도 처음에 들어가서 한국사람들과 아시안들을 싫어하면서
GET OUT(나가)라고 외쳤던 이들이 13년이 지난 지금 많은 사람이 I LOVE KOREAN
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니까. 18년 20년 노숙자 생활을
하던 사람이 자기 현재의 모습을 버리고 저희와 함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변화를
받아서 새 사람이 되는 과정도 있고 또 이제는 그들이 자기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주는 봉사자들이 되고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DC, 도시 빈민가에서 섬기는 자로서
평화나눔공동체의 운영자로 살아가는 최상진 목사의 삶의 현장을 전해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평화나눔공동체의 시작부터 오늘이 있기까지 그리고 ‘슬럼가 피아니스트 빌리’ 책
소개하는 2부가 방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