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한국전쟁회고
3) 북의 6.25 남침 위장 전술 /전쟁소식과 수도사단/서울탈출과 한강선방어
전쟁 발발 약 일주일 전으로 기억한다. 북한으로부터 북에 감금되 있던 조만식 선생 과 남에 구속되 있던 남로당 간부 이주하와 김삼룡을 1950 년 6월24일38선상에서 교환하자는 제의가 있었으며 남한 정부의 호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북한은 이 약속을 1950년 6월 25일 미명에 걸친 남한 기습 공격으로 대신하였다. 북한은 조만식 선생과 이주하 김삼룡의 교환을 남침 위장용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후일 나는 1992년경 당시 쏘련에 망명 중이던 한국전 개전 당시의 북한 육군 작전국장 이었던 유소장을 워싱턴에서 만나 Heritage Foundation 방문 에 동행한 일이 있었다. 그는 개전 일주일 전 모스크바에서 쏘련 장교가 남침 공격 명령서를 갖이고 방문해 그를 우리 말로 번역하는데 무척 고생했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은바 있었다. 나는 당시 6.25 남침 공격명령도 쏘련제였구나 생각한 바 있었다.
전쟁소식과 수도사단
수도사단은 한국 전젱 직전 수도 방위 임무없이 사단으로 평성 중이었고 옹진 반도 방위를 위한 육군 17보병 연대는 개전과 동시에 제 1사단 에 배속되었고 기타 보병 각 2개 대대 식의 편성 도중의 8과 18 연대와 장갑부대화 할 기갑연대로 편성 중에 있었다. 내가 전쟁의 소식을 들은 것은 1950 년6월25일 새벽 집에서 사단 주번사령 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 처음이었다. 사단에 도착하니 동두천과 포천 방향을 주공으로 전 38선에 걸처 적의 공격이 있는 것으로 보고를 받았다. 포천지구에는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는 제7사단 이 방위를 맡고 있었으며 곳 대전에 위치했던 이형근 장군 지휘를 받은 제 2사단이 상경해 7사단 정면에 추가 투입되었다. 그러나 전세는 악화되어 26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던 육군본부가 미군 상륙의 첩보를 받고 다시 서울로 귀환 하였다. 8연대 의 우병옥 소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는 육군 본부 명에 의해 개전 직후 김포반도 방위를 위해 배치 명령을 받았다. 18연대장이 인솔하는 1개 보병 대대도 1사단 에 배속되어 사단이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이라고 는 고백규 소령이 지휘하 는8연대의 1개 대대 뿐이었다. 적 전차의 서울 공격을 우려 해 고백규 대대도 임업시험장 야산 방어 임무를 부여하고 임업시험장 앞 개활지에 대 전차호 구축을 민방위대에게 의뢰하였다.
서울 탈출과 한강선 방어
육군 본부의 한강 이남 철수는 시간 문제였으며 사단도 철수를 계획해 야 했다. 육군 본부로부터 사단의 임무를 부여 받을 겨를도 부대도 없었다. 사단은 후일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항전에 필요를 위해 상부의 허가 없이 한국은행에서 현찰을 트럭에 실을때로 실어오게 하였다. 사단 후퇴는 28일 미명 사단장이 지휘하기로하고 참모장은 27일 야밤 임업 시험장 방어 대대철수를 확인하며 미아리를 행하던 중 적의 전차의 서울 진입 소식을 확인하였다. 적의 전차 예상지를 피하며 사단으로 돌아오던 중 비오는 암야 지금의 묵동과 세종로 교차점에서 (당시 헌병 사령부 앞) 적의 전차 4대 안에 들어갔다 빠저 나오던 중 적의 전차 사격으로 운전병의 장엄 한 전사 와 군의관 박기석 소령을 잃고 28일 저녁 학생복으로 변장 한강을 지나가는 뱃 머리를 잡고 도강하게 되었으며 29일 정오경 영등포에 위치했던 사단에 복귀하게 되었다. 당시 한강 이남은 김홍일 장군의 시흥지구 전투 사령관의 지휘로 퇴각중이 던 병력이 수집 되어 한강 방어선이 유지되고 있었다. 내가 사단에 복기한 후 사단은 후퇴한 잔존 병력 2개 대대(약 600명)로 노량진 역에서 김포 들어가는 입구(솔나무 구능) 까지 10 미터 간격으로 배치하여 7월 1일 까지 여의도 대안의 한강선이 방어 되었다. 6월26일 육군본부에 초대된 인사들에 의한 한강 방어선 점령이 실시되지 아니한 대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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