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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4) 맥아더 장군의 일선 시찰과 중공군 소속 북한 의용군-김웅수장군회고록

제 1부 한국전쟁회고

4)
맥아더
장군의 일선 시찰과 중공군 소속 북한 의용군 / 안양전투에서 실종됨과 제 일군단 인사참모부임 / 이창일중령의 실종과 군단사령부의 의성이동 / 조급히 철수한 안동 방어선

한강 방어선에서의 기억이다. 30일경 김두한씨의 내방을 받았다.  자기 동료들게 총기를 주어 일선 배치를 요구하여 그의 애국심에 감탄하였다. 29일경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미국 지원 병력투입을 위한  여의도 남안 시찰이 있었으며 한강선 방어를 하고 있던 한국 병사로부터 감동을 받았다고 들었다. 시흥지구 전투 사령부 작전주임이던 김종갑 대령이 수행했다 하나 보안을 위해 그의 방문은 공식 통지가 없었다. 김포 반도에 상륙한 적병의 시체에서 길림성 출신의 중국어 일기장 발견되었다. 일기장에는 팔로군 소속의 조선 의용군으로 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남침을 위해 상당 전부터 중공의 협조를 얻어 중공군내 조선인 전투 경험자들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안양 전투에서 실종됨과 일군단 인사참모 부임

 

수도사단의 한강선이 돌파되기 시작한 것은 71일이었다. 영등포 우신 국민학교 위치했던 사단 사령부에 대한 포격이 심해지자 나는 안양 입구 동쪽 고지를 본부 중대 요원으로 점령케 했으나 미국 비행기에 의한 폭격과 적의 전차 공격으로 부대 퇴하는 가운데 실종 되어 수원 서쪽 민가에서 일박하고 발안장을 거처 배로 아산 만을 건너 민간 트럭으로 대전 육군 본부에 도착했다. 내가 전사로 취급되고 있었다. 24 사단의 일부 병력이 상륙되어 서부 전선에 배치되고 새로 편성된 한국군 1 군단이 김홍일 장군 지휘하 1사단과 김석원 대령이 지휘하는 수도사단이 중부 전선에 배치되고 있었다. 나는 공석으로 있던 1 군단 인사참모로 전임 하게 되었 . 일주간의 한강선 방어는 결국 주일 미군의 한국 상륙을 허용하고 전선을 정비 하는 기회를 셈이 되었다. 내가 청주에 위치했던 군단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는 1 사단 대신 8 사단이 1군단 지휘하에 있었다.

 

이창일 중령의 실종과 군단 사령부의 의성 이동   

 

내가 일군단 인사 참모로 부임하자 군수참모인 이창일 중령이 짚차로 진천의 적진을 모르고 들어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으며 후임으로 박병권 대령이 부임하였다. 1 군단에서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 그첬째는 청주시의 철시이다. 집들은 잠겨 있었다. 집에서 헌병이 이부자리를 끄내오는 것을 목격하고 분노하게 되었다. 전쟁터에서 규율을 유지한다는 것은 용의한 일이 아니었다. 더우기 숙식이 불편하게 장비와 보급이 뒤따르지 못한 한국군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후에 군단 사령부는 경북 의성으로 이동 하였다. 나는 전쟁터에서 얻은 위산 과다 증으로 식사에 신경을 써야 했다. 당번병은 의성에서 나의 식사를 위해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았 . 의성에서 풍족한 삶을 편에 속한 분이었다. 불행하게도 아주머니의 경상도 음식은 나의 식성과 달라 고생을 했다.

 

조급히 철수한 안동 방어선

 

어느 무더웠던 일요일이었다. 고문관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부대 집단적 으로 떠난 일이 있었다. 대낮에 미군의 비행기가 통신통을 떠러트리고 갔다. 당시 창설된 미군 사령부가 전선을 통합 지휘할 때이며 부대 작전명령이 고문단을 통해 전달될 때였다. 저녁 무렵 고문 요원들이 돌아와 열어본 통신통에는 다음날 아침 6시를 기해 일선 사단을 철수 시킴과 철수 항공폭격을 하겠다는 작전 명령 들어 있었다. 사단 작전 참모들이 소집되었다. 군단의 철수명령이 사단 작전 참모 들께 하달된 것은 해가 저물 때였다. 적의 압력이 많은 것도 아니였으나 한미 합동 작전이라 부대의 실정에 맛는 철수 건의도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효과적 철수를 해서는 군단 참모들에 의해 철수명령이  일선 연대급까지 하달됨이 확인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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