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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6) 평양방문-김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평양
방문 / 육군 제 8 사단 부 사단장으로


종합학교
재직하던 1950 11 나는 장인 어른을 모시고 점령도시 평양을 방문 하는 기회를 갖었었다. 19509.28 서울이 수복되자 장인 어른은 서울로 일찍 수복 하셨다. 그러나 장인은 10월초 대를 이을 유일했던  외아들의 전사 통지를 받게 었다. 나의 유일의 처남 박철모 중위는 전쟁 전에 시흥 갑종 간부 후보생 병기 병과 졸업하여 병기 장교가 되었다. 유일의 처남이기에 국방부 병기행정본부에 근무  하도록 도왔다. 본인은 해방후 38선을 넘다 체포되어 해주 가목소에서 쏘련 탄광에 보내지기 직전에 많은 재물을 써서 구출되었다. 한국군 1사단이 서울로 진결할   나와 상의도 없이 진격 사단에 지원해 탄약 수송을 지휘하던 퇴로를 차단 당한 패잔 인민군의 공격으로 충청북도 화령장 에서 전사하게 되었다. 결혼한 처남은 남매를 두었으며 딸은 벌써 60 가까워오며 현재는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다.  나의 평양방문 소감은 많지 않다. 차로 평양 가는 길에서 얻은 인상이다. 사회주의 국가 특성이 도로와 병원 학교 공공의 시설이 남한에 비해 당시는 넚고 크게 있음을 느꼈다. 처가집은 평양 화신 백하점 뒤에 위치하였고 시설들의 파괴가 그리 많지 아니할 때였다. 내가 할아버지를 방문한 곳은 평양 교외 기림리 였으며 식구 들이 당시 선발대로 나와 있던 서북 천년단에 대한 비난이 많았다. 이것이 내가 후일 작전 국장이 되어 민사 군정 업무에 관심을 갖게된 이유이다. 당시 육군 본부의 전방 지휘소가 덕천에 위치하였으며 이명재 장군이 책임자이었다. 나는 평양을 떠나기 전날 그곳을 방문키로 약속하였으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미군이 가설한 주교로 대동강을 건너 귀환하였다. 귀환 다음날 평양 철수의 소식을 듣고 처가집 식구들의 후퇴를 도웁지 못하게 됨을 후회하였다.       

 

육군 8사단 부사단장으로

 

내가 종합학교를 떠나 정비된 8사단 부사단장으로 보임된 것은 1951 2월이다. 나는 교관 요원으로 남게 되는 수명을 제외한 종합 20기생 200 명의 졸업생과 함께  8사단의 부사단장으로 부임하는 행운을 갖었었다. 사단은 후일 한국 2군단 전신이 전투사령부 지휘아래 재래의 지리산 공비와 인천 상륙으로 차단  되고 낙동강에서 패퇴한 인민군의 일부가 가세된 지리산 공비 토벌이 목적이었다. 수도사단이 지리산 동편을 8사단이 지리산 서편 공비 소탕을 위해 육군 11사단 교체 하게 되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대구 에서 군용 트럭으로 지리산 99고개 넘으면서 적의 출몰을 근심하며 남원을 거처 야밤에 전주시에 들어 갔던 기억을 잊을 없다. 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곳은 전주 중학이었다. 나는 2개월의 주둔 기간에 2 연대를 지휘하여 나의 고향인 연산과 논산을 중심으로 대둔산과 운장산 거처 전주까지 토벌 지휘관의 경험을 하였다. 작전상으로는 성과는 없었으나 운장산 산속에서 고립되어 헤메는 초근목피의 생활에 허덕이는 산중의 민간인들을 만날 있는 경험이 되었다. 사단은 민심을 얻기 위해 가급적 민페를 기치지 아니하  조심한 결과 후일 사단장의 송덕비가 세워젔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지리산 지구  있는 동안 기억나는 일들이 있었다. 하나는 전쟁으로 말미암은 초근 목피의 민초들의 생활이다. 민페를 피하기 위해 부대는 산지 막사 생활이 강요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린 28세의 청년 장교로서 전주대학 김두헌 총장 요청으로 대학 개강식 축사를 하는 기회도 갖었다. 그리고 작전 기간 지리산 공비 두목으로 알려진 이현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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