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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재미동포 음악인 조상구의 음악 세계 2부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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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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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가수 조상구 씨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피난살이 굴속에서 노래를 시작한 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노래와 함께하는 이가 있다. 바로 재미동포 조상구 씨다. 조상구 씨는 자신의 앨범 조상구의 추억앨범도 내고 한인사회나 아시안들의 음악 페스티벌 등에서 공연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1970년대 번안 팝송 노래로 젊은이들과 함께하고 한국에 재즈를 보급하는데도 한몫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미국에서 한국의 대중음악을 보급하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동포 음악인 조상구의 음악 세계 2부 ‘미국에 한국 대중음악을 알린다.’를 함께한다.

조상구 씨의 음악 세계를 찾아가본다. 왜 노래를 할까? 그에게 물어봤다. 조 씨는 음악은 자신의 인생과도 같다고 말한다.

조상구: 음악은 남녀노소 각 나라 사람을 막론하고 같이 소통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우리들의 대화라고 생각되거든요. 최소한 저에게 음악은 친구이자 어린 추억처럼 다정한 그런 것 같습니다.

조상구 씨의 음악에는 고집이 있었단다. 20대에 대중적 노래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번안 팝송이나 재즈를 좋아하게 되어 직업가수의 길을 외면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조상구: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지 않아요. 노래 부르기도 좋아하고 그래서 노래를 부르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해서 가수의 꿈을 잠시 가졌고 20대 들어서 기타 가지고 젊은이들 같이하는 장소에서 음악을 했던 시절이 있었고요. 대중적인 음악보다는 대중에서 좀 벗어나는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까? 결국은 직업을 음악으로 갖지 못했고, 가수의 길을 가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군 제대 후에 다른 직업을 가져서 생활하다가 음악은 취미로 돌아갔는데 결국은 40대에 들어서 음악과 관계되는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조상구 씨는 1970년대 한국에서 재즈 음악 발전에 한몫을 했단다. 그의 재즈 사랑 이야기 함께 들어보자!

조상구: 팝송을 번안해서 불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70년 초인데요. 번안 팝송이 매스컴이나 대중 인기를 얻다가 보니까? 고전음악이나 재즈 음악은 소수가 하면서 그 사람들이 전혀 갈 곳도 없고 그 사람들은 생계가 곤란할 정도로 음악 활동이 어려웠던 때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이르기까지 그랬거든요. 이런 시절에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살롱 같은 것을 몇 군데 성공적으로 운영했었어요. 그래서 그때 재즈 하는 식구들을 제가 거의 후원해 줬습니다. 그래서 1987년도 제1회 청평 재즈 페스티벌을 개최했었고요. 그때 한 50명 정도가 새로운 어떤 발판이 되어서 재즈를 사랑하는 식구들끼리 모이게 됐고, 재즈 동우회도 그때 결성하게 됐고, 그때는 몇 그룹사운드 중에서도 재즈 좋아하는 식구들이 해체되어서 재즈 동우회로 들어왔고요. 재즈 하는 식구들이 별도로 소그룹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재즈 계통의 일을 제가 조금 했었고 그러다가 제가 1988년도에 강남에 극장식당인 코리아타운 운영하면서 거기에 재즈 2팀을 공연시켰어요. 그래서 그게 재즈계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재즈 인들은 지금도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상구 씨에게 재즈 음악의 특징도 물어봤다.

조상구: 그때 재즈는 소수인들이 했거든요. 재즈는 악보대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악기대로의 음악을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멜로디, 리듬, 금관 등의 악기가 모여서 각자 자기의 악보 상에 있는 소절을 자기 스타일로 만들어서 꾸며내서 하는 음악이거든요. 일종의 악보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창작해서 그 소절을 맞추는 거지요. 그래서 자기의 개인적인 기술이 들어갑니다. 재즈는 원래 흑인들 음악이기 때문에 흑인들은 고향을 떠나서 어려울 때 시절을 생각해서 부모나 친구나 아니면 형제들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에서 자기 마음대로 구사했던 음악이 재즈 음악이거든요. 그래서 재즈가 몇몇 사람들에게는 아주 호응이 좋았고 예술성을 추구하는 음악인들에게 굉장히 효과적인 음악이라고, 자신의 생을 바쳐야 된다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재즈가 이뤄졌는데요. 지금도 한국에서 홍대 근처에 문 그로우라는 재즈 카페를 운영하시는 분도 유명한 재즈인이시고, 지금 재즈인의 우상이라고 불리며 피아니스트인데, 그리고 동숭동에 야누스라는 재즈 카페가 있는데 그분은 노래하신 분인데 이런 분들이 모델이 되어서 재즈를 이끌어 왔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조상구 씨는 미국에 와 20여 년이 됐지만, 자신을 뒤 돌아보면 음악과는 천생연분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조상구: 미국은 20년 전에 왔고요. 미국 올 때까지의 한국에서의 생활은 60- 70년대 통기타 시절에 음악생활은 끝났고 음악관계를 지탱하다가 결국은 제 인생에서 땔 수 없는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해서 미국에 와서 다시 음악생활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워싱턴에서 저보다 젊은 세대 사람이 저와 듀엣이 잘 맞는 사람이 있어요. 듀엣을 같이하게 되면 동요 스타일로 일반 대중가요는 아니고요. 건전가요로 언덕 위에 올라, 가수 원길 등으로 듀엣으로 불렀고요. 제가 혼자 솔로로 나갈 때는 주로 제가 70년대 불렀던 팝송을 위주로 불렀는데요. 좋아했던 곡들이 대부분 영화주제곡 들이거든요. 영화 주제곡을 위주로 마이 웨이, 갓 파더 그리고 재즈 노래를 부릅니다.

조상구 씨가 앞으로 할 일은 한인들에게 한국의 대중음악을 보급하는 일이란다.

: 한국의 대중음악이 고전음악에 밀려서 빛을 못 보고, 새로 커가는 아이들의 음악성도 클래식 위주로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 음악성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 한국의 K-POP이라고 해서 대중화된 음악들이 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데 미국 이민사회에 대중음악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앞으로의 계획이 1-2년 안에 대중음악을 펼칠 수 있는 그런 공연장을 만들고 싶다는 게 제 꿈이고요.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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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조상구의 추억여행 앨범표지
조상구 씨에게 언제까지 음악 활동 하겠느냐고 물었다.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면 가서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고 했다.

조상구: 미국 생활하는 동안 음악 활동을 접고 다른 사업으로 활동하다 조금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다음부터 음악에 대한 예전 생각을 하게 되고 음악인으로서 살지 못한 후회도 있고요. 아쉬움이 있지요. 그래도 지금 이 나이에도 어디 가서 내가 노래를 부를 때가 있다는 것에 대한 자신감도 생기고요. 나머지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은 기쁨도 있고요. 그래 지금도 저를 필요로 하는 데가 있다면 가서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조상구 씨에 통일되면 북한에 가 공연하고 싶으냐고 여쭸다. 그는 그러한 미래를 위해 지금 새로운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려준다.

조상구: 대중음악을 가지고 워싱턴에 사는 한인 커뮤니티와 음악을 공유하는 게 제 꿈이거든요. 공유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고 그래 그 장소는 물색 중이고요. 거기서 필요한 음악 세계가 펼쳐질 수 있는 팀들이 구성되면, 제가 그 팀을 소중히 간직했다가 제가 못해도 그 팀들이 가서 북한 사람들과 같이 우리 문화를 함께 나눴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램이면 바램이고 저의 마지막 할 일 인 것 같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동포 음악인 조상구의 음악 세계 2부 ‘미국에 한국 대중음악을 알린다.’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진행에 RFA 이현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