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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재미동포 음악인 조상구의 음악 세계 1부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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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가수 조상구 씨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대 4살의 나이로 피난살이 굴속에서 피난살이 관객에게 노래를 선사해 뜨거운 박수를 받은 이가 있다. 그는 미국 워싱턴 인근에 사는 조상구 씨이다. 아버지 팔베개로 배운 황성 옛터, 청실홍실, 백마야 울지마라 등 1950년대 최대의 한국인의 애창곡을 가수처럼 불러줘 피난살이의 아픔을 달래주었단다. 그는 지금도 워싱턴 일원에서 크고 작은 음악행사에 초대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동포 음악인 조상구의 음악 세계 1부 ‘깜깜한 밤에 나는 가수예요.’을 함께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린이가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면 어른들의 귀여움 독차지 한다. 조상구 씨의 음악세계를 찾아가보자! 깜깜한 밤의 가수로 데뷔한 그의 이야기 들어보자!

조상구: 제가 4살 때 625전쟁이 나서 진해로 피난 갔어요. 어린 나이에 제가 깜깜한 밤에 할머니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할머니들이 눈물 흘렀던 생각이 나거든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조상구 씨는 어떻게 노래를 배웠을까?

조상구: 그때 당시 저희 아버지가 팔베개하면서 가르쳐 주던 노래가 백마야 가자, 황성 옛터, 청실 홍실 등인데 지금 생각나는 건 백마야 울지마라! 이 노래는 지금도 생각이 나거든요. 그때 그 노래를 부르면 할머니들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4살짜리 가수의 노래를 듣고 아주머니, 할머니가 쌈짓돈을 주셨단다.

조상구: 노래를 듣고 나서 주위의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좋아하시는 것에 기뻤어요. 제가 노래를 하고 나면 아주머니나 할머니가 손자나 아들에게 줄 쌈짓돈을 저에게 줬던 생각이 나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기뻤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게 굉장히 좋은 일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불렀던 노래 잠시 들어본다!

조상구: 백마는 가자 울고 날은 저문 데 거 치른 타관 길에 주막은 멀다 ---이런 노래입니다.

어린 나이에 노래를 시작해 인기도 얻었다면 국민학교와 중학교 때 이야기도 들어본다.

조상구: 국민학교 때는 노래를 잘한다는 생각은 못했고요. 형이 노래를 굉장히 잘했습니다. 형이 쇼팽의 이별곡, 짐 리브스의 노래를 가끔 불렀던 기억이 있고 50년대에 영화 주제곡들을 콧노래로 부르는데 그걸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나거든요. 영어 노래이기 때문에 제대로 따라 하지 못했는데 중학교에서 ABC를 배우면서 영어 노래를 배우게 됐어요.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 일 겁니다. 영어 알파뱃을 읽으면서 I AM A STUDENT를 배우면서부터 냇 킹 콜(Nat King Cole, 1919년 3월 17일 ~ 1965년 2월 15일, 아프리카 계 미국인 재즈 가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조상구 씨는 중학교 때 냇 킹 콜의 노래를 불러 학교에서 유명세를 한 몸에 받았단다.

조상구: 중학교 2학년 때인데요. 저는 노래를 좋아했는데 친구가 노래보다는 기타를 잘 쳤어요. 그래 학교 소풍 가면 둘이서 독무대를 했습니다. 그때 저희가 불렀던 노래는 가곡하고 가요가 한 두 곡이 있었는데 정확한 곡명은 생각이 안 나는데 그때 냇 킹 콜 노래를 불러서 선생님들이 저를 인정해 줬던 기억이 납니다. 냇 킹 콜 노래는 그때 당시만 해도 냇 킹 콜이 20대에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625동란 이후에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을 때 미군을 위로하려고 한국에 와 공연해 한국의 음악인들에게도 냇 킹 콜의 노래가 보급됐던 상태이기 때문에 제 노래는 중학생으로서 냇 킹 콜 노래를 불렀다고 해 선생님들이 칭찬했으며 앞으로 노래 공부 열심히 하라고 칭찬해 줬던 기억이 납니다.

조상구 씨는 고등학교 때 학교대항 음악경연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조상구: 그때 당시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어도 가사는 쉽게 구할 수가 없었어요. 선배들을 찾아다니면서 가사를 구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서 그 당시 충무로에 기쁜 소리 사에 가면 제가 원하는 노래의 한 두 가사를 얻으면 그걸 며칠 연습해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이런 식으로 노래를 배웠고 이렇게 노래가 조금씩 쌓여 지면서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정식으로 학교에서도 인정을 받고 학교 대항이나 친구들 모임 같은 때 나가기도 하고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오디션은 보기 시작했어요. 그때 당시 명동에 작은 음악 살롱들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고등학교 학생이었기 때문에 대학을 들어가서 노래를 불러보려는 욕심은 있었지만, 노래는 많이 알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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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조상구의 추억여행 앨범표지
조상구 씨의 노래 마이웨이 노래 함께 들어본다.

조상구 씨의 대학 시절 이야기 들어보자! 그는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자연스레 음악 활동에 활력소가 되기도 한 것 같다.

조상구: 문예창작보다는 노래하는 게 좋아서 중학교 때부터 같이 활동하던 친구와 듀엣으로 오디션을 몇 군데 봤는데요. 오디션은 미도파 5층에 미도파 살롱 등에서 했어요. 그리고 무교동에 세시봉이란 곳이 있었습니다. 이런 몇 군데서 오디션을 보고 친구하고 그룹 이름은 없고 상구와 창원이라고 해서 듀엣으로 노래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상구와 창원 그룹의 활동은 작지만 조용하게 활동했단다.

조상구: 그때 대부분 솔로보다는 그룹이 인기가 있었고 그때 저희가 듀엣으로 나갈 때 미 8군에서 활동하는 그룹들이 많았어요. 키보이스, 키브라더스, 조카스 등 저보다 한 4-5년 선배 되는 형들이 그룹을 형성해서 8군에 있으면서 일반 무대로 나오는 계기가 됐었는데 1969년에서 1971년도 2-3년 사이인데요. 저희가 그때 듀엣으로 활동하던 때인데 선배 그룹들이 이름 있는 음악 살롱에서 노래했고 선배들이 가지 않는 작은 살롱에는 저희들 듀엣이나 솔로들이 활동했지요.

조상구 씨의 음악활동을 찾아가보자! 비틀스의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 세시봉의 식구로 활동하게 됐단다.

조상구: 제가 음악 활동을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이예요. 대학가기 전에는 제가 고등학생 때는 뭐 대학 가려고 공부하지! 그러나 팝송을 좋아하니까? 팝송을 배우려고 특별한 매개체가 없으니까? 기쁜 소리사를 들려서 팝송을 듣고 제목을 물어서 방송국에 찾아가서 가사를 부탁한 것이 고등학교 시절이에요. 그래 고등학교 때도 기타를 쳤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동아리 등에 활동하기 위해서 명동 쪽에 나오게 된 거고, 그때는 이미 비틀스가 64년에 결성되면서 비틀스 음악이 동양권에 들어와서 한국도 기타 치며 노래하는 등 유행이 시작된 거지요. 65년도 이후 67-8년도에 저희가 68년도에 대학에 들어가면서 음악 붐이 불기 시작했는데 그때 8군에서 활동하던 선배 되는 키보이스나 키브라더스 식구들이 일반 무대로 나오게 됐어요. 그래서 명동이나 무교동 음악 살롱에서 선배들의 활동이 시작되고 저희도 그때를 즈음해서 코스모스 백화점 5층, 미도파 옆 4시즌이라고 있는데 무교동의 세시봉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가 조금 활동을 한 거고, 그때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씨가 같이 있었고 세시봉의 식구들이 50명 정도가 5년 동안 다녀가기도 했고요. 일반 무대에 명동이나 무교동이나 소공동 음악 살롱들이 생겨나면서 거기서 우리들의 음악 활동이 시작된 거지요.

조상구 씨는 지금도 미국 활동에서 주로 팝송을 부른다고 한다.

조상구: 지금 미국서 저를 불러주는 데가 가끔 있어요. 옛날 음악 하던 친구들 몇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지금은 없거든요. 그 시절에 음악하던 친구가 히식스에 멤버였던 친구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국에 가버리고 없고 여기서 불렀던 노래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라는 영화 주제곡 문리버 그리고 러브 스토리, 갓파더 주제곡,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초청되면 부르는 곡 들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동포 음악인 조상구의 음악 세계 1부 ‘깜깜한 밤에 나는 가수예요.’을 함께 했다. 지금까지 진행에 RFA 이현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