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장의 고민 / 육군 급식제 자원 / 우군포가 아군을 포격한다
나는 지휘경험이 없던 만 28세의 청년으로 사단 지휘를 위해 고심 하였었다. 또한 나는 미 3사단을 우측방으로 좌측방은 미 1군단의 미7사단 과 경계되며 군단 예비 사단도 미군 사단인 미 9군단 소속으로 연합작전의 복잡성도 이겨내야 했다. 내가 사단장으로 있는 기간은 휴전 선을 유리케 하기 위해 적의 공세가 심할 때였다. 나의 관측으로는 휴전이 가까워 지면서 미군의 희생을 아끼는 상부의 눈치가 역역하였다. 이러한 실정이 적으로 하여금 유리한 차후의 방어선 선택을 위한 공세의 기회가 되 었다. 철원 평야를 수중에 넣키 위해 백마산이 필요했고 백마산을 위해 평소에 소대 가 점령하고 있던 미 7사단과의 접경선의 배수진이었던 100메터의 화살머리 고지가 휴전 수일을 앞두고 격전장이 되었다. 전쟁중
하루 약 300명의 희생과 두 차레에 걸처 진지가 적 수중에 들어 갔었으나 재 탈환되었다. 이 전투 에서 확보된 화살머리 고지는 미 7 사단과 백마고지 능선을 확보할 수 있는 결과를 갖이고 왔다. 사단은 후일 이 전투로 말미암아 부대 표창이 되고 사단장은 한국 정부로부터 태극 무공 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는 Legion merit(officer’s degree) 훈장을 희생된 장병을 대신해 받게 되었다.
육군 급식제 자원
젊은 나이에 지휘를 하다보니 나의 능력부족으로 고귀한 부하 생명이 희생되지 아니 할까에 대한 반성과 자책을 하게된다. 사단장으로서 나는 지휘방침을 정해야 했다. 나는 지휘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과 부하를 사랑한다는 인식을 주는 길 밖에 없었다. 사단 내에는 기동 작전간 이름을 얻은 용맹한 소부대 지휘관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사단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주로 포로를 취득해 정보를 얻어야하는 진지 방어전이었다. 방어전에는 자기가 얻어야할 화력지원과 인접부대에 관한 정보가 중요했다. 이를 위해 나는 매일 대대를 순방하며 인접부대와 지원능력 을 정확히 장악하게 하였다. 또 나는 비 오는 날이나 야밤을 이용해 일선을 방문하며 거이 매일 사단 후송병원을 들려 부상된 장병을 통한 전선 소식과 환자를 위문 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나로 하여금 주간 적의 포화를 피해 전선 방문함을 도왔으며 군의관과 간호장교로 하여금 부상자와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드는 길이 되었다. 나의 전선 경험 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사심 없고 비교적 청념하다는 사단 장병들의 인식 이라 생각하였다. 육군의 급양제도가 발전되지 못해 전선 사단마다 자체적으로 부식 을 구매할 때이다. 사단의 급식의 질 여하는 장병 들의 사기의 근원이며 사단이 부식을 조달하는 한에는 사단 고위 책임자 들의 정직성을 의심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육군본부 소속 급양대가 급식을 책임 질 사단을 모집할 때 급식도 기술에 속하며 경제적 의심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급양대를 통한 사단 급식제를 신청한 첫 사단이 되었다.
우군포가 아군을 포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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