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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11)사단장의 고민-김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사단장의 고민 / 육군 급식제 자원 / 우군포가 아군을 포격한다

 

나는 지휘경험이 없던 28세의 청년으로 사단 지휘를 위해 고심 하였었다. 또한 나는 3사단을 우측방으로 좌측방은 1군단의 7사단 경계되며 군단 예비 사단도 미군 사단인 9군단 소속으로 연합작전의 복잡성도 이겨내야 했다. 내가 사단장으로 있는 기간은 휴전 선을 유리케 하기 위해 적의 공세가 심할 때였다. 나의 관측으로는 휴전이 가까워 지면서 미군의 희생을 아끼는 상부의 눈치가 역역하였다. 이러한 실정이 적으로 하여금 유리한 차후의 방어선 선택을 위한 공세의 기회가 었다. 철원 평야를 수중에 넣키 위해 백마산이 필요했고 백마산을 위해 평소에 소대 점령하고 있던 7사단과의 접경선의 배수진이었던 100메터의 화살머리 고지 휴전 수일을 앞두고 격전장이 되었다. 전쟁중
하루 300명의 희생과 차레에 걸처 진지가 수중에 들어 갔었으나 탈환되었다. 전투 에서 확보된 화살머리 고지는 7 사단과 백마고지 능선을 확보할 있는 결과를 갖이고 왔다. 사단은 후일 전투로 말미암아 부대 표창이 되고 사단장은 한국 정부로부터 태극 무공 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는 Legion merit(officer’s degree) 훈장을 희생된 장병 대신해 받게 되었다.

 

육군 급식제 자원

 

젊은 나이에 지휘를 하다보니 나의 능력부족으로 고귀한 부하 생명이 희생되지 아니 할까에 대한 반성과 자책을 하게된다. 사단장으로서 나는 지휘방침을 정해야 했다.  나는 지휘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과 부하를 사랑한다는 인식을 주는 밖에 없었다. 사단 내에는 기동 작전간  이름을 얻은 용맹한 소부대 지휘관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사단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주로 포로를 취득해 정보를 얻어야하는 진지 방어전이었다. 방어전에는 자기가 얻어야할 화력지원과 인접부대에 관한 정보가 중요했다. 이를 위해 나는 매일 대대를 순방하며 인접부대와 지원능력 정확히  장악하게 하였다. 나는 오는 날이나 야밤을 이용해 일선을 방문하며 거이 매일 사단 후송병원을 들려 부상된 장병을 통한 전선 소식과 환자를 위문 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나로 하여금 주간 적의 포화를 피해 전선 방문함을 도왔으며 군의관과 간호장교로여금 부상자와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드는 길이 되었다. 나의 전선 경험 부족을 극복할 있는 길이 사심 없고 비교적 청념하다는 사단 장병들의 인식 이라 생각하였다. 육군의 급양제도가 발전되지 못해 전선 사단마다 자체적으로 부식 구매할 때이다. 사단의 급식의 여하는 장병 들의 사기의 근원이며 사단이 부식 조달하는 한에는 사단 고위 책임자 들의 정직성을 의심 받을 밖에 없었다.  육군본부 소속 급양대가 급식을 책임 사단을 모집할 급식도 기술에 속하며 경제적 의심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급양대를 통한 사단 급식제를 신청한 사단이 되었다.

 

우군포가 아군을 포격한다

 

내가 사단장으로 있는 동안 사단의 편성이 확장될 때이었다.  처음으로 사단 포병이 편성되어 화살머리 고지 작전에 사단 포병의 지원이 가능했다. 군단에 속해 있었음으로 군단으로부터 포와 전차의 지원도 받을 있었다. 화살머리 고지 작전이 한참일 때이다. 일선에서 우군포가 아군을 사격한다는 불평이 들어 왔다. 그럴 이유가  없다 생각 하였다. 야밤 자정을 넘어 사단 진지를 시찰한 일이 있었다. 포수들은 잠이 들어 있었는데 옆에 있는 KSC(30 이상으로 현역병에 해당하지 아니한자로 당시 근로자로 징용되 전투 요원을 위한 보급품 혹은 지뢰와  철조망 들을 전선 고지까지 운반하던 노역자) 아저씨가 포수 대신 포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포도 때때로 포의 진동으로  밀리는 포의 위치와 조준을 점검 해야 하는데 KSC 아저씨들이 거기까지는 포수를 대신 못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일선에서의 불평에도 일리 있는 일이었다. 격전중 하루밤 사이에 20,000 이상의 포탄이 소비되었다고 군단장의 내노가 있었다고 들었다. 내가 군단 모임에 참석해 느낀 점은 기이 하게도 미군은 문맹자가 없는 알았었는데 % 기억에 없으나 문맹 퇴치 문제가 종종 거론되었다. 포트리고 연대의 문맹율은 높았다. 당시 한국군에도 문맹 퇴치 문제가 있었으나 미군에 비하면 아주 적은 편이라 세종대왕께 감사함을낀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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