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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LA 유의영 전 교수가 겪은 6.25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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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영 씨가 전남 보성 녹차밭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유의영 씨 제공

625 당시 90일여간의 공산치하 압제로부터 남한의 수도 서울이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서울 수복 중 희생된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날이 9.28 서울수복일이다. 한국전쟁 중 12살의 소년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피난처에서 서울의 집을 수차례 왕래하며 옷가지를 날라 전쟁 중에 가정 살림을 도왔던 이가 있다. 재미동포 캘리포니아 스테이트 대학 (California State University) 유의영 은퇴교수이다. 유 교수는 당시 서울과 시골 안팎의 상황과 어려움을 경험하고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유의영 교수로부터 자신이 겪은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듣는다.

 

유 교수의 한국전쟁 수기는 자유아시아방송 낭독 프로그램 김익창 지음 사선을 넘어서 부록에 실린 부분을 현재 낭독 중으로 ‘책 낭독’(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cc45-b0adb3c5/crossing_lines-05232013165400.html)에서 들을 수 있다.

 

유의영 씨는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열두 살이었고 양정중학교를 입학한 지 1개월도 안 된 때였다고 한다. 일요일 아침 주일학교를 마치고 교회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단다. 그때 고등부 학생 하나가 집에서 라디오를 가지고 와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유의영: 그때 12살 중학교 1학년으로 주일학교에 가서 주일 아침에 예배를 마치고 밖에 나와서 공치기하고 놀고 있었는데 전쟁이 났다고 웅성웅성하고 그랬는데, 아 갑자기 비행기 편대가, 북한 비행기이죠. 4-5대가 바로 우리 예배당하고 집이 영등포 기찻길 인천하고 수원으로 가는 영등포 기찻길이 나 있는데 거기서 가까운 거리인데 마침 한 화물차가 영등포역으로 들어가고 있었어요. 바로 교회 앞인데 화물차 화통을 타깃으로 해서 기관총을 쏴대고 처음으로 그런 것을 목격했지요. 천둥 번개 소리 같이 굉장하니까 깜짝 놀라서 집으로 뛰어들어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생각이 나고요.

 

유 씨는 당시 기억에 일요일 전쟁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듣고도 월요일 학교에 갔다고 들려준다.

 

유의영: 그 다음 날 월요일인데 학교에 갔습니다. 양정중학교 1학년 때지요. 서울역 뒤 봉래동에 양정중학교가 있었어요. 화학실험 시간에 들어가 있었는데 갑자기 또 기총소사하는 소리가 밖에서 나고 해서 깜짝 놀라 나와 보니까 어디를 공격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일찍 끝내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러다가 사흘 만에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을 당했지요.

 

유 씨 가정은 급기야 피난길에 오른다

 

유의영: 국군이 후퇴하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했는데 밤 1시나 2시경 된 것 같아요. 그 소리에 식구들이 다 깨었지요. 아버님이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서울도 위험한 가보다 하고 다 가자 해서 짐을 싸서 아버지 어머님하고 하고 여섯 형제들과 그때 넷째 삼촌이 연세대학교 1학년에 다니셨는데 같이 짐을 싸서 시흥을 거처 안양, 수원 쪽으로 걸었지요. 옛날 국도인데 후퇴하는 군대 차량, 추럭, 군인들, 피난민으로 꽉 차 섞여서 남쪽으로 걸었어요. 그렇게 같이 밤새도록 걷고 그 다음 날도 하루종일 걸어서 아마 제 생각에 수원 어느 교회에 도착했어요. 아버님 아시는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교회였는데 거기도 벌써 피난민들로 가뜩 차 있더라고요.

 

유 씨 가정은 또 용인 쪽으로 피난처를 옮기면서 아버지가 큰 고초를 당할 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유의영: 그 다음 날 저녁 아버님은 식구들을 다 데리고 용인 쪽으로 걸었습니다. 아버지 친구 목사님이 있는 용인읍의 한 교회로 가서 그 댁에서 이틀인가 삼일을 지냈는데 밤에 전투가 벌어졌어요. 인민군들이 거기까지 온 것이지요. 초저녁부터 전투가 시작돼서 밤새도록 총소리 났어요. 이쪽 아군은 군인들은 별로 없었고 경찰하고 인민군 간에 서로 총격을 벌인 것 같아요. 우리 식구들하고 목사님 가정과 다른 몇 가정이 뒤에 조그마한 산 언덕에 굴이 있었는데 거기에 들어가서 밤 새도록 피해 있었어요. 갑자기 새벽녘에 번개 치는듯한 총소리가 굴 앞에서 나면서 다 손들고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났지요. 그래서 다들 손을 들고 나갔는데 보니까 인민군 댓 명이 총부리를 입구에 대고 있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인민군을 본 거지요. 아마 동네 아주머닌가 한 분이 피난민이 굴에 있다고 해서 같이 온 것 같아요.그때 아버님과 삼촌이 동네 어른들과 함께 따로 인민군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몇 시간 동안 돌아오시질 않아 어떻게 잘못 되는 것은 아닌가 해서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떨면서 기다렸지요. 얼마 후에 다행히 아버님과 삼촌이 우리에게 무사히 돌아오셨어요.

 

유 씨 아버지는 더이상 남쪽으로 피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 가까운 곳에 피난처를 갖게 된다. 그리고 유씨는 아버지와 함께 도림동 집을 찾아가기도 한다.

 

유의영: 우리 식구들은 다음날 용인 읍을 탈출하여 안성 주례까지 갔다가 더 이상 남쪽으로 가지 못하고 용인 구읍까지 다시 와서 자리를 잡고 3개월을 인민군 점령하에서 지났지요. 삼촌은 아버지가 혼자라도 가야 한다고 남쪽으로 보내셨고요. 용인구읍은 신갈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에요. 조그마한 한 칸짜리 예배당이 있더라고요. 거기에 들어가서 다른 피난민 두 가정과 함께 피난생활을 했지요. 며칠 후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서울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신길동에 있는 어느 권사님 댁에 숨어 계시고 나 혼자 도림동에 있는 우리 집으로 갔어요. 도림동 동회 앞을 지나가면서 보니까 벽에 조선인민공화국 헌법이라는 것을 부쳐놓았어요. 우리 집은 교회 바로 밑에 있었는데 모르는 사람들 대 여섯 가정이 차지하고 있었고, 안방 하나를 우리 교회 사찰 하시던 집사님 댁이 차지하고 계셨고요. 우리가 피난 나갈 때에 어머니 시집 올 때부터 있던 비단옷 등을 현관 마루 밑에 감추어 놓았는데 그것이 그대로 있더라고요. 사찰집사님이 자기들이 잘 지켜줄 테니까 나보고 조금씩 가져가서 곡식으로 바꾸어 피난살림에 보태라고 하셨어요. 그분들이 끝까지 그렇게 해 주셨어요. 내가 10살, 8살짜리 동생을 데리고 용인 구읍에서 영등포 도림동까지 다섯 번을 왔다갔다하면서 가지고 간 옷을 어머니가 여기저기 다니며 보리 밀 등으로 바꾸어 우리 여섯 형제를 3개월 동안 먹여 살리신거지요. 지금은 돌아가셔서 안 계시지만 그때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들 굶어 죽지 않게 애쓰신 것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져요. 기적과 같은 일이지요.

 

유의영 씨는 당시 아버지와 함께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북한 인민위원회에서 아버지 찾는다는 것을 알고 유 씨는 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단다.

 

유의영: 처음 갔을 때 옷을 한 뭉탱이 만들어서 등에 지고 나오는데 동네 아저씨를 만났어요.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너 어떻게 왔느냐고 그래요. 그 아저씨가 절대로 아버지가 여기 오시면 큰일 난다고 벌써 어저께도 인민위원회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아버지 찾고 야단났었는데 아버지 오시면 잡혀 들어가면 그만이니까 절대로 여기 오시면 안 된다고 그래라 그렇게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우리 가족을 위해 바른 말씀을 해 주신 그 아저씨를 평생 있지 못하고 감사해 하고 있어요.

 

유 씨가 집을 왔다 갔다 하는 데는 이틀을 걸어야 했단다.

 

유의영: 용인 구읍에서 도림동까지 오는데 하루종일 걸어와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 날 또 하루종일 걸어야 우리 집에 도착하는데 과천으로 해서 관악산을 넘어 오기도 하고, 수원으로 해서 철도를 따라 오기도하고, 어떤 때는 안양까지 와서 철도를 따라서 다시 오기도 하고 그렇게 대 여섯 번 제가 동생들과 함께 왔다 갔다 했지요. 철길을 따라 걸을 때는 계속 송장 썩은 냄새가 났지요.

 

유 씨는 서울수복을 위한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고 증언한다.

 

유의영: 인천 상륙할 때, 그때는 인천상륙작전을 하는 줄도 모르고 인천상륙작전 일주일 전에도 제가 동생들 데리고 서울 집에를 다녀갔거든요. 그때 비행기 편대가 굉장히 많이 김포 쪽으로 서울로 가면서 폭격을 하는데 쿵쿵 소리가 나고, 계속 멀리서 대포 쏘는 소리가 났는데 그것이 함포사격을 하는 건지 몰랐지요. 집에까지 가지고 온 옷을 아버지하고 나하고 둘이서 등에 메고 안성까지 걸어가서 그걸 밀로 바꿔서 한 짐씩 등에 지고 오다가 용인읍 근처에서 비행기 폭격에 맞아 죽을 뻔 했어요. 용인 읍에 거의 다 왔는데 미군 비행기 편대가 우리를 보고 굉장히 낮게 떠서 뱅뱅 돌더라고요. 인천상륙을 해서 진격을 하고 그럴 때인데 우리는 그런 걸 아무것도 모르고 모르는 어른들 대 여섯 명과 함께 같이 걸어오고 있었지요. 그 비행기가 우리들을 보고 낮게 떠서 돌고 있는데 아버지가 얼른 나보고 저 논 가운데 가서 서 있으라 하셔요. 그래서 나는 얼른 논 가운데로 가서 서 있고 아버지가 다른 어른들께는 우리가 여기서 도망가면 큰일 나니까 여기에 서 있자고, 그러면 저 사람들이 우리가 민간인인 줄 알고 폭격을 않할거라고, 가만히 서 있는 게 좋겠다고, 그래서 어른들은 거기서 서 있었어요. 아버지는 만일 폭격을 하면 나라도 살리자! 그래 나보고 논 가운데 가서 서 있으라고 (눈물) 그러신 것 같아요. 그래 논 가운데 가서 서 있는데 비행기가 빙빙 돌면서 굉장히 낮게 떠서 비행기 조종사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뭣도 모르고 우리 편인 미국 쪽 비행기니까 손을 흔들었어요. 그 비행사들이 우리를 봤는지 어쩌는지 돌다가 날아 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까딱 잘못했으면 죽을 뻔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오고

 

유 씨의 동생 다섯 살짜리 의선이의 병사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단다.

 

유의영: 연합군이 인천상륙을 해서 그 동네까지 진격해 왔는데 오기 전날 경기가 일어나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정신을 잃고 덜덜 떨면서 신음을 했어요.아버님이 아침부터 나가셔서 의사를 찾으러 동네를 헤매시다가 피난온 의대생을 하나 찾아 데리고 와 진단을 하는데 동생이 숨을 거두더라고요. 그래서 아버님이 동네 아저씨하고 포대기에 싸서 뒷산에 묻었지요. 그 다음 날이 추석날이에요. 미군이 하루만 일찍 왔어도 의선이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울었지요. 동네에서 추석이라고 또 미군과 국군이 들어오고 그러니까 어디서 쌀이 나왔는지 떡을 해서 한 접시 가져왔더라고요. 우리 식구들이 모두 먹지도 못하고 의선이를 생각하며 울었어요.

 

유 씨는 인민군 점령의 3계 월 동안 부모님의 사랑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단다.

 

유의영: 그때 참 아버지 어머님이 어떻게 해서 우리를 이렇게 3개월 동안 먹여 살리셨는지 그게 참 기적이고 어머니가 또 옷을 가지고 동네 다니면서 양식되는 거 쌀은 거의 없고 그저 보리나 밀 조 이런 걸로 바꿔다가 해 먹이시면서 얼마나 많이 우셨을까 생각이 됩니다.

 

12살의 유 씨는 장남으로 가족을 도왔던 일은 참으로 훌륭하다.

 

유의영: 그때 인민군 점령 기간에 제가 장남이니까 12살짜리인데도 장님이니까 뭐 12살짜리보다 더 많이 일한 거지요. 시간이 나는데로 서울 왔다갔다 하면서도 옷도 가져오고, 참외도 받아다가 거리에서 팔곤 했어요. 한번은 참외를 놓고 파는데 인민군 병사 두 사람이 와서 참외를 사 먹고 돈을 주는데 보니까 돈이 한국은행권이고 아주 새 돈이더라고요. 아 인민군들도 한국은행권을 쓰는구나 속으로 생각한 것을 잊지 않고 있지요.

 

유 씨의 집은 전쟁 상처로 반이 부서졌단다.

 

유의영: 서울 수복 후 구루마를 하나 대여해서 우리 가재도구를 싣고 그때는 수원으로 해서 국도를 따라 서울 집으로 왔는데 집에 도착해보니까 우리 집 반이 부서졌어요. 미군이 진격해 올 때에 예배당 언덕 위에 인민군이 진지를 만들어 대항했는데 이때 미군의 포 사격 포탄이 우리 집으로 떨어진 것이지요. 다행히 우리 집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앞마당에 파 놓았던 지하실로 들어가 있어서 괜찮았다고 합니다.

 

유 씨가 서울 수복 후 일해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 함께 들어보자!

 

유의영: 서울수복 직후 미군이 인부들을 모집하러 스리쿼타를 타고 우리 동네에 왔어요. 그때 내가 마침 거기에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다 데리고 타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올라탔지요. 그래 한참 가다가 감독하는 미군이 아니 쪼그만 놈이 왜 탔느냐고 그리드라고요. 그래서 나도 일하려고 탔다고 하니까 껄껄 웃으면서 IT’S OK 하면서 저도 데리고 갔지요. 저에게는 어떤 어른 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해서 도왔지요. 그리고 거기서 점심도 먹고 저녁도 잘 먹었는데 그때 보니까 한국군도 있더라고요. 젊은 군인인데 그 사람이 나를 보더니 자기가 쓰던 야전 그릇을 갖다 주면서 이거 내가 먹는 그릇인데 이 그릇을 쓰라고 하여 처음으로 미군들 먹는 식사를 잘 먹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일당을 타가지고 왔지요. 그래서 그것도 새 돈으로 은행권 받아 가지고 어머니에게 갔다 드렸지요. 그게 일하고 받은 처음 임금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깜짝 놀라서 어디서 이 돈을 가져왔느냐고 해서 이야기를 드렸더니 네가 간 것 마음은 기특한데 앞으로 절대 가지 말라고 나이가 어린데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느냐고요.

 

유 씨는 지금도 추석이면 병사한 동생 의선이를 생각하며 가슴이 아프단다.

 

유의영: 제가 서울에 갈 때마다 고속도로를 지나갈 때 신갈 인터체인지를 지나가면서 항상 눈물을 흘려요. 우리 동생이 거기서 가까운 용인 구읍에 묻혔는데 묘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거기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제가 지금도 추석 때마다 동생 생각을 합니다. 수복한 다음 그리고 휴전 후 여러 해 동안 추석날이 되면 어머니와 함께 동생 생각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유의영 씨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군 공병대에서 약 한 달 동안 하우스 보이로 일했는가 하면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고 또다시 제주도로 피난해 피난 중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대학을 거쳐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68년부터 40여 년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캘리포니아 스테이투 유니버시티(California State University) 교수로 재직했고 지금은 은퇴한 후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유의영 교수가 겪은 한국전쟁의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