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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통일문화산책(서울 대학교와 김일성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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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김일성 대학 안에서는 인터넷도 잘 안 된다는데 ‘국제학술회의’ 다운 것이 가능했겠나! 싶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북한이 개방돼야 남북한 두 대학 교수들의 학술교류나 학생들의 접촉과 교류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국립서울대학교와 김일성 종합 대학은 남북한을 대표하는 대학입니다. 두 대학이 다 10월에 창립 70주년을 맞았습니다. 서울대학교는 10월 15일 창설 70주년이었고, 김일성 대학은 10월 1일이 70주년이었습니다. 통일문화산책 오늘도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두 대학 창립배경과 창립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위상과 영향력을 중심으로 비교해 보기로 합니다.

임채욱 선생: 네. 두 대학이 다 창립 70주년입니다만 서울대학교는 창립해서 개교한 시기는 1946년 10월이지만 학교의 연원을 따지면 1895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제나 미 군정이 아닌 우리 손으로 만든 법관양성소가 1895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는 올해 2016년이 개교 70주년, 개학 121주년이 되는 해라고 합니다.

법관양성소는 어떤 학교입니까?

임채욱 선생: 조선조 말 법원은 평리원이라 했습니다. 이 평리원 안에 조선조 27대 왕 고종은 법률가를 양성하는 관립학교를 세웁니다. 이것이 법관양성소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법학교육기관이지요. 이때가 1895년 3월입니다. 갑오경장으로 우리나라도 근대적인 사법제도를 가져야 했고 이를 운영할 법관을 양성하려고 법관양성소를 만든 것이지요. 이 학교가 처음에는 수업기간이 6개월이다가 1년 6개월, 다시 2년, 1907년이 되면 3년이 됩니다. 졸업생은 이 학교가 요즘으로 말해서 법무부에서 교육부로 이관되기 전까지 209명을 배출합니다. 그러나 다음 해 1910년 8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학교이름도 경성전수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로 바뀝니다. 이 경성법학전문학교가 1946년 10월 서울대학교를 만들 때 흡수됩니다. 물론 이때 다른 전문학교 6개와 사범학교 2개, 경성대학도 함께 흡수되는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학교가 법관양성소에서 이름이 바뀐 법학전문학교입니다. 그래서 이 학교 창립연도를 가져온 것입니다.

개학연도를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서까지 가져올 이유가 뭡니까?

임채욱 선생: 세계의 많은 대학이 개교연도를 밝히면서 출발할 때 조그마한 학교이고 그 이름도 현재 이름과는 다른 곳이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하버드 대학만 해도 목사양성소로 출발한 1636년을 개교일로 잡고 있습니다. 교사 1명에 학생이 9명인 목사양성소가 하버드대학의 출발입니다. 이런 예는 아주 많습니다. 서울대학교는 개교는 1946년 10월에 했지만, 대학의 뿌리가 되는 것은 이미 1895년에 시작됐다는 것이고, 그것은 갑오경장으로 근대화를 지향하던 시기라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높이는 정신과 연결되지요. 갑오경장이 비록 완전하게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요. 그렇더라도 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이룩하겠다는 뜻은 우리나라 역사의 큰 전환점을 가져왔던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데 서울대학교 설립 때 전문학교, 사범학교와 함께 경성대학도 포함되는데, 경성대학은 따지고 보면 경성제국대학의 후신 아닙니까?

임채욱 선생: 광복되던 해 10월 이미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우리나라 대학으로 새 출발을 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설립 때 흡수된 것은 일제의 대학이 아니라 새로 개편된 경성대학이었지요. 그땐 서울이 아직 경성이라고 불리던 때지요.

김일성 종합 대학은 설립과정이 어떻게 됩니까?

임채욱 선생: 김일성 대학은 북한정권이 들어서기 전인 1946년 9월 1일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설립을 결정하고 한 달 뒤인 10월 1일에 개교를 합니다. 약칭 김대라고 하는 이 대학도 서울대학교처럼 평양의학전문학교와 대동공업전문학교를 흡수하면서 설립되는데, 7개 학부에 24개 과가 설치되고 교원 68명에 학생 1500여 명 이였습니다. 교사는 여러 곳의 임시교사를 쓰다가 개교 2년이 되는 1948년 9월이 돼서 모란봉 동남쪽 용남산 기슭에 본 교사를 완공하게 됩니다. 지금은 크기가 부지만 156만 평방미터이고 건물면적은 40만 평방미터로 아주 넓고 학생 수가 12000여 명에 교직원 수는 2500여 명이나 됩니다.

북한에서 김일성 대에 들어가기는 아주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임채욱 선생: 인민경제와 문화를 건설할 고등기술 인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김일성 대학은 지금까지 졸업생이 8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들은 북한 200만 명 지식인 중에서도 으뜸가는 사람들이지요. 입학도 당연히 어렵지요. 고등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국가고사를 거치지만 실제는 입학자격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출신성분과 사상성에 중점을 두고 선발하지요.

두 대학은 남북한에서 각기 큰 영향력을 끼치는 학교로 그 위상은 대단합니다.

임채욱 선생: 서울대학교는 이런 모토를 내세웁니다. ‘진리의 빛은 이곳으로부터’ 이런 모토 아래 연찬에 연찬을 하면서 자부심을 가집니다. 그 자부심이 이런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누가 조국의 가는 길을 묻거든 눈을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관악산에 있는 서울대학교는 ‘민족과 국가의 명운을 짊어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김일성 대학도 이런 구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아 너를 빛내리라.” 북한의 민족간부 양성기지로서의 책무를 다하겠다는 말이지요. 대한민국을 이끄는 인재집단이 서울대 출신이듯이 북한에서도 당이나 정권기관 부부장급 이상의 20%가 김대 출신이지요.

두 대학의 국내 위상이야 대단하지만 세계적으로는 어떤 수준에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대학평가기관인 영국 타임스 고등교육 발표로는 서울대가 72위입니다. 이것은 세계 100대 대학 안에 든다는 것이지요. 김일성 대학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이 정도로는 세계 12위가 되는 경제대국 수준에는 걸맞지 않지요. 갈 길이 멉니다. 아시아권에서 싱가폴 대학, 베이징대학, 도쿄대학보다 떨어지고 있으니 더 분발해야 하지요. 물론 김일성 대도 100위권에는 들도록 노력해야겠지요.

그런데 김일성 대 출신도 많이 탈북해서 한국에서 활동한다지요?

임채욱 선생: 네. 김일성 대 출신이 많다 보니 평양에서는 엄두도 못 내는 동창활동도 한다는 것 아닙니까? 북한에선 종파주의를 하게 된다고 동창회 같은 것을 못하게 합니다. 한데 서울에서는 김대 출신들이 동창회를 만들어 교류도 하고 친목도 도모하고 있다니 주체교육도 헛것이 된 것이지요. 이렇게 북한의 민족간부들이 북한정권을 등지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오면 어떻게 될지 가늠이 잘 안 되는군요.

서울대학교는 현재 베이징대학교와 도쿄대학교와 함께 베세토(BeSeTo)라 해서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대학과 교류를 하는 계기가 마련되면 남북한에 큰 파장을 일으킬 텐데요? 어떤 물꼬를 틀 수 있는 계기가 없을까요?

임채욱 선생: 작년 2015년에 중국 길림 성에 있는 연변대학을 매개로 해서 연변에서 서울대와 김일성 대 세 대학이 연합학술대회를 연 일은 있습니다만 두 대학이 개별적으로 만나고 교류한 일은 없습니다. 아 참 학생들이 만난 일은 있지요. 1996년인데 미국 버클리대학 심포지엄에서 서울대 학생과 김일성 대 학생이 만나서 대화한 일 정도는 있지요. 지난 9월 말 김일성 대학은 창립 70년을 기념해서 중국, 러시아, 프랑스 학자들을 불러서 국제학술토론회도 열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 대학 안에서는 인터넷도 잘 안 된다는데 ‘국제학술회의’ 다운 것이 가능했겠나! 싶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북한이 개방돼야 남북한 두 대학 교수들의 학술교류나 학생들의 접촉과 교류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