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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남북한 3.1운동 100주년기념행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오늘 3.1운동 100주년입니다. 남북한에서 기념행사와 함께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3.1운동은 매우 큰 뜻을 갖습니다. 그래서 통일문화산책 오늘은 3.1운동 100주년의 큰 의미와 남북한에서 보는 3.1운동에 대해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이야기 나눕니다.

임채욱 선생: 정말 뜻이 큰 날이지요. 3.1운동 같은 민족의 저항운동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쟁 후 처리를 하던 연합국들이 일본 점령국이던 코리아란 나라의 독립을 문제 삼기라도 했겠느냐 싶습니다. 다 3.1운동과 그 결과로 나온 대한민국 임시정부활동이 있었기에 카이로회담이나 포스담회담에서 코리아의 독립문제가 논의됐던 것이지요.

남북한에서 3.1운동 100주년 행사는 어떤 모습이였습니까?

임채욱 선생: 한국에서는 3월 1일 아침에 전국 모든 사찰에서 범종을 울렸습니다. 절에서 종교의식이 아닌 일로 종을 울리는 일이 있습니까? 그러나 3.1운동은 종교 이전에 우리 민족이 다 함께 한 거대한 운동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또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중심이 된 각종 행사가 열렸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선종교인협회가 연 기념행사가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도 3.1운동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어났고 일제의 야만적인 통치에 항거해서 일어난 거족적인 반일애국항쟁이었다고 말하는 것까지는 남쪽이나 같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이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모습으로 전개됐느냐, 그 결과가 어떠했느냐에 이르면 완전히 남쪽과는 견해를 달리합니다. 우선 3.1운동의 명칭도 ‘3.1인민봉기의 날’이라고 합니다.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은 어떤 내용입니까?

임채욱 선생: 북한에서는 3.1운동이 평양에서 제일 먼저 시작돼서 전국적으로 펴져나갔다고 주장합니다. 평양에서 3.1운동을 일으킨 주동세력들은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이 가르친 청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3.1운동은 평양 장대재 숭덕여학교에서 제일 먼저 시작됐고 이를 김형직이 이끌었고 8살 먹은 김일성도 이 때 30리 길을 걸어와서 참가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부르죠아 사대주의자들이 만세운동을 바르게 이끌지 못하고 적에게 항복했다고 합니다. 3.1운동을 이끌었던 민족대표 33인도 인정하지 않거니와 총을 들고 싸우지 않은 이들 부르죠아 사대주의자의 의존적 태도 때문에 3.1만세운동은 결국 실패한 운동이 됐다고 규정합니다. 나아가서 3.1운동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두고도 사대매국노 집단으로 규탄합니다. 임시정부를 차려놓고 애국동포들로부터 자금이나 거둬들이고 이를 탕진하고 서로 물고 뜯는 싸움이나 일삼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체를 틀리게 주장하는 것이야 바로 잡을 수 있을 터이니 그만두고라도 평가에서 틀리게 보는 것은 어째서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임채욱 선생: 북한에서도 1970년대까지는 3.1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졌다면서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았다는 식으로 설명해 왔지요.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는 평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고 김형직이 이끌었고 김일성도 참가했지만 이런 애국적 열기를 옳게 이끌지 못해서 실패했다면서 김일성 같은 지도자의 영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결국 김일성 부각이 목적이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에서는 3.1운동의 정신, 그러니까 3.1운동 때 읽은 독립선언서에 담긴 정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1운동의 정신, 독립선언서에 담긴 정신을 설명해 주시지요.

임채욱 선생: 우리가 잘 아는 독립선언서에는 정의, 인도, 생존이 민족적 요구라고 밝히면서 광명정대하게 행동할 것을 주장합니다. 3.1정신은 자주와 단결 그리고 평화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결국 단순히 일본에 항거하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과 약소국이 공존하는 국제질서를 호소한 것입니다. 1910년대 그 때는 우월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지배하고 강한 나라가 힘없는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보는 제국주의 시대였습니다. 바로 약육강식이 제국주의 시대 논리이지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런 제국주의 시대를 끝내자고 미국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의 원칙을 내세웁니다. 바로 이 민족자결주의 정신이 3.1독립선언서에도 담깁니다. 즉 강대국과 약소국이 공존하기를 바라면서 이를 비폭력으로 추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3.1독립선언서 중 한 구절을 보면 “....일본의 배신을 죄 하려는 것이 아니다. ...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을 두고 북한에서는 적에게 항복하는 투항주의라고 비난해 옵니다. 사실 이건 오늘날 보면 평화공존 논리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투항주의라고 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임채욱 선생: 사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그날 민족대표 33인은 만세시위 군중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태화관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하는 것으로 변경합니다. 여기에는 이런 뜻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는 만세운동에서 많은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되면 이게 도화선이 돼서 군중들이 폭력으로 치닫게 되고 많은 희생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서 실내에서 낭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투항주의가 아닙니다. 비폭력을 전제로 한 저항입니다.

3.1운동의 정신은 비폭력 만세운동으로 끝나지 않고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지요.

임채욱 선생: 바로 그것입니다. 3.1만세운동이 폭력저항운동으로만 전개됐다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무자비 한 탄압으로 우리 민족의 고난은 더욱 깊어지고 민족생존이 위태로웠을 지도 모르지요. 3.1운동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일제는 당장 무단통치를 거두고 신문을 발행케 하는 등 약간의 문화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물론 이것도 통치의 수단이지만 일본이 국제적인 비난의 눈초리를 의식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3.1운동 결과로 태어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평가한다면 어떤 것입니까?

임채욱 선생: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활동하면서 대외적으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 독립전쟁을 벌이기도 하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한국독립에 관심을 기우렸겠습니까? 상해에서 일어난 윤봉길의사 폭탄투척사건도 임시정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이를 평가한 장개석 중국주석이 한국의 독립을 도우려고 국제외교무대에서 이를 안건으로 올린 것도 그런 결과에서 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하면서 왕조시대와 결별하는 정체를 주장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와의 결별뿐 아니라 우리 민족사에서 군주시대와의 결별을 뜻하는 계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3.1정신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만나서 독립운동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보편주의적 가치를 실현시키려는 정신입니다. 여기에는 자유와 평등, 주권과 평화는 물론 세계보편적 모든 가치가 녹아 있습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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