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영 씨가 웨슬리신학대학원 졸업식 마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 박예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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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지난 1997년 ‘고난의 행군’ 시절 중국으로 탈북했다 강제 북송과 2001년 재 탈북해 한국에서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지난 5월 초 워싱턴 D.C. 소재한 웨슬리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를 받았다고 탈북자 박예영 씨가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박 씨는 영어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졸업하게 됐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목요대담 오늘은 탈북자 박예영 씨로부터 탈북과정부터 목회학 박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함께 듣습니다.
박예영 씨가 자신을 소개해 줍니다.
: 저는 첫 탈북을 1997년에 했고 고향은 함경북도 김책시입니다. 제가 22살이던 1997년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때였습니다. 그때 처음 탈북해서 중국에서 한 3년 살다가 2000년도에 북송 당해 갔다가 다시 2001년도에 중국으로 재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한국으로 오려고 결심을 했고 2002년, 태국 방콕을 경유해서 한국에 들어왔어요. 한국에 온지는 17년이 됐습니다.
기독교를 접하게 된 동기는
: 기독교는 1997년 6월 경 중국에서 처음 접하긴 했지만 예수님은 태국 방콕 한인연합교회에서 3개월 지낼 때 예배를 드리 는 중에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서 일반 대학에 가려고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으셔서 감리교 신학대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후 학부에 이어 대학원에서 신학석사과정도 마치고 이번에 웨슬리 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학위까지 받게 됐어요.
북한에서 기독교를 알았는지
: 몰랐습니다. 알았다고 하면 어렸을 때 저희가 TV를 통해서 성황당이라든지, 영화, 연극 등을 통해서 들은게 전부였습니다. 그런 연극에서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다 미신이다.”라고 가르치거든요. 성황당이라는 연극에서는 기독교, 무당, 불교 모두 나오거든요. 여튼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크게 없었어요. 그리고 철이 들어서도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 본적도 없었고 전혀 그런 그림이 없었어요.
신학교 다니 던 때 이야기
: 신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선교단체인 예수전도단을 알게 됐어요. 한국에 있는 제주 열방대학에 가서 6개월 훈련을 받았어요. 그곳에서 훈련 받으면서 좀 더 주님을 깊이 알게 되었고, 그 뒤에 바로 중보기도학교를 들어가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을 받으면서 다양한 예배와 강의, 독서를 통해 분단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한국에 온지 3년 밖에 안됐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 역사를 잘 몰랐는데 하나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으로 기독교 역사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학 박사 과정을 하겠다고 다짐한 때 이야기
: 솔직히 저는 신학교 학부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을 갈 생각을 안 했어요. 근데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학부 때부터 저에게 도전을 주셨던 교수님이 계시는 데 그분이 말씀하시길 “북에서 온 탈북인 중에 통일과 관련한 국내외 사역이나 운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군가 연구하고 학문적으로 갈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하시면 저에게 공부할 것을 권면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그 연구자가 저는 아니라고 완강하게 거부했었는데 결국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 논문을 쓰게 되었어요. 논문의 주제가 우리 북향민(北鄕民)들의 신앙체험을 연구하는 것이었는데요, 석사 논문이 끝날 때 즈음에 더 연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교수님에게 더 연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문의를 드렸습니다. 저는 원래 감신대에서 PH D(종교학 박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당시 이 과목의 과정이 없었고 지도교수님께서 제게 웨슬리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을 하셨어요. 제가 연구만 계속 할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문제는 영어가 두려워 어떻게 영어로 공부를 할 수 있겠냐고 다시 교수님께 되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해보라고 도전을 해주셔서 결국 웨슬리신학대학원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영어로만 강의를 받았을텐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 처음부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처음에 면접보고 시험 보는 것 다 영어로 했거든요. 그런데 영어 실력이 워낙 약하다 보니 면접 보는 것도 다 영어로 써서 외우고 영어 시험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은 됐지만, 공부할 때에도 웨슬리 신학대학원에서 다 영어로 강의를 한다고 하니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강사는 모두 미국 교수님이시니까요. 저희는 1년에 한 번씩 여름에 웨슬리 신학대학원으로 가서 공부했고, 겨울학기 한 번은 미국 교수님들이 한국으로 나와서 가르쳤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감리교 신학대학교에 교실을 빌려서 매주 월요일마다 나가서 저희가 공부할 교재를 가지고 공부를 했거든요. 그런데 교재가 거의 다 원서인데 그 원서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분담해서 발제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했어요. 그러니 영어를 잘 못하는 저는 그냥 아주 죽을 맛이었죠.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도 받고 영어를 붙잡고 씨름도 하고...우리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약한 게 영어이거든요. 그래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탈북자로서 목회학 박사를 받기까지 끈기로 이겨냈다고 하는데
: 많이 힘들었고 사실 졸업을 이번에 할 수 없었어요. 작년인가 재작년에 논문 프로포절을 통과해야 논문을 쓸 수 있는데 제가 그걸 통과를 못했어요. 그래서 논문을 나중에 쓰겠다고 했어요. 하는 일도 많은데, 미국교수님하고 메일로 논문 프로포절을 두세번 주고 받으니 너무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포기를 했고 다음에 쓰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교수님도, 옆에 동기 목사님들도 할 때 안 하면 나중은 더 못한다고 제게 도전을 주셨고 격려를 해주셨어요. 공부할 때 해야 감도 잊어버리지 않고 쓸 수 있지 손에서 놓아버리면 더 쓰기 힘들다는 거예요. 생각을 해보니 저는 학부도 대학원도 모두 3학기씩 휴학을 했는데 이번 과정도 쉬면 또 언제 졸업할지 모르겠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진짜 하고 싶었던 건 학위가 아니고 더 연구를 하고 싶었던 건데, 이렇게 미루면 나중에 정말 연구를 못할 수도 있겠다 싶은 위기감이 들었어요. 결국 ‘해야겠다.’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니 다른 분들보다 1년이나 떨어졌는데 논문 프로포절을 다시 써서 계속 미국 교수님과 주고받았고 결국은 논문을 완성하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목요대담 오늘은 탈북자 박예영 씨로부터 탈북과정부터 목회학 박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함께 들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박예영 씨가 탈북 이후 하는 일들에 관한 얘기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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