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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통일문화산책(남북 수도건설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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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한반도에는 지금 두 개의 수도가 있습니다)

광복 이후에 남북한에는 서울과 평양이 수도로 돼 옵니다. 남북 각기 수도건설을 보다 잘하려는 노력을 지금도 기울이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수도건설과 관련된 74년간의 명암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도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합니다.

임채욱 선생: 한 나라의 수도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수도는 정치적, 행정적으로 중심지가 되기 때문에 결국은 지리적 중심지로도 됩니다. 한반도에는 지금 두 개의 수도가 있습니다. 서울과 평양은 남북이 분단되기 전부터 이 땅에서 첫째가고 둘째가던 도시였습니다. 북쪽에서는 1972년 말까지는 평양이 수도가 아니라 서울이라고 했고 남쪽에서는 2000년대 초 수도를 서울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1972년 말까지 서울을 수도라고 했다는데 왜 그랬습니까?

임채욱 선생: 서울이 남조선만의 수도가 아니라 통일된 나라의 수도가 돼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뭐니 뭐니 해도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선지지(首善之地)였으니까요. 그래서 분단 후 북한 통치층은 평양을 ‘붉은 수도’로 건설하면서도 헌법에는 수도를 서울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우리나라 수도로서의 상징성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다가 1972년에는 평양을 북한의 수도로 바꿨다는데 그럴 계기가 있었습니까?

임채욱 선생: 아시다시피 1972년 7월 남북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북한은 그간 유엔의 승인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도전하지 못하고 링 밑에서 맴돌았지만 남북대화를 계기로 링 위로 올라와서 대등한 위치가 됐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말씀하신 수선지지(首善之地)는 어떤 의미 입니까?

임채욱 선생: 수선지지는 으뜸가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서울은 예로부터 수선지지라고 불려왔는데 조선조가 한양이란 이름으로 도성을 건설할 때 인(仁), 의(義), 예(禮), 지(智),신(信)이라는 오륜에 따라 4대문을 세우고 중앙에 보신각을 세웠습니다. 이건 사람의 도덕과 윤리가 조화와 묘합을 이루게 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수선지지라고 말하고 한반도의 상징도시가 된 것입니다. 미군이 38분단선을 그을 때도 서울의 수도로서의 상징성은 중요했습니다.

그건 뭣을 말합니까?

임채욱 선생: 당초 미국은 일본 패전에 따른 전후 처리를 할 때 기독교 세력이 상대적으로 우세한 38선 북쪽지역을 미군 주둔지역으로 정하려다가 수도 서울이 38선 이남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남쪽을 택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수도의 상징성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인데 분단 후 서울의 수도건설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임채욱 선생: 1894년 갑오경장 이후부터 서울에는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게 됩니다. 하지만 도시모습이 크게 바뀌는 것은 분단 후 1970년대입니다. 한국의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때인데 이 때 넓이도 확장되고 인구도 크게 늘어납니다. 2000년대에 와서는 인구 1000만 명의 도시로 됩니다. 이렇게 인구가 밀집되다 보니 주택부족, 교통체증, 환경공해 같은 문제를 안게 되고 건물 신축과 역사유적 보존 사이에 갈등도 생기게 됩니다.

서울에서는 세계에서 5번째로 높다는 롯데타워가 세워졌습니다만 도시건설이라는 면에서 최근에는 어떤 일이 이슈로 되고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네, 555m 높이의 롯데타워는 서울의 자랑이기도 하지요. 최근 서울의 도시정비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도시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한 것이 되겠지요. 지금 서울에서는 도로 위에 집을 짓는 계획으로 떠들썩하기도 하는데 서울 북부 간선도로 위에 청년들을 위한 집을 1000채 정도 짓겠다고 하니까 도로 위에 집을 지어서 그게 쾌적한 집이 되겠느냐는 비판도 일고 광화문 광장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하는 문제로 논란이 늘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평양건설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임채욱 선생: 분단 후 평양은 북한지역의 정치중심 도시가 돼 갑니다. 광복되던 그 해 11월 김일성은 평양시 행정책임자를 불러 평양을 북조선 혁명의 중심지가 되게 하는 과업을 줬습니다. 이 지시에 따라 그 해 12월 노동당 대표자회의가 열리고 그 방안이 토의됐습니다. 다음해인 1946년 5월부터 7월까지 평양 중심지대를 흐르는 보통강 정비공사를 비롯해서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게 됩니다. (보통강 공사가 시작된 5월 21일을 북한에서는 건설자 절로 지정하고 있지요.) 9월에는 평양시를 평안남도에 분리시킵니다. 면적도 넓혀가다가 현재 평양은 서울 크기의 4배가 됩니다.

6.25전쟁 후 재건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임채욱 선생: 6.25전쟁 때 평양은 크게 파괴 됩니다. 그 때 미군의 폭격으로 100년이 가도 재건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오늘날 공원 속의 도시가 됐다고 자랑합니다. 김일성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에 평양재건을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전쟁 후 실제로 도시건설이 시작될 때 녹지면적을 늘리는데 관심을 갖고 시가지 가로수를 평양의 옛 이름 유경(柳京)의 명성처럼 버드나무를 많이 심으라고 지시하면서 가로수로 버드나무를 심을 때 한 줄로만 심지 말고 두 줄, 세 줄로 심어 녹음터널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김정일 시대에는 영광거리, 광복거리를 비롯해서 창광거리, 개선문거리, 낙원거리, 봉화거리, 붉은거리, 통일거리가 건설돼서 웅장하고 화려한 도시가 됐다고 합니다.

오늘날 평양은 어떻습니까?

임채욱 선생: 김정은 시대에 와서는 과학자거리가 생겨났습니다. 은하과학자거리도 생기고 미래과학자거리도 생기더니 만리마 속도로 려명 거리가 크게 들어섰습니다. 평양거리 건물들은 무더기가 크고 겉모양도 화려합니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보고는 사용하는 사람들이 잘 안보여서 무슨 거대한 세트장 같다고 평가합니다. 무엇보다 평양 거리들에서는 탑이 많고 동상도 많습니다. 평양은 탑과 동상의 도시입니다. 주체 사상탑, 당 창건기념탑, 김일성 영생탑,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통일 전선탑,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등 커다란 탑들이 많고 곳곳에 통치자 동상들이 늘어섰습니다. 북한 전체로 김일성, 김정일 동상이 38000여개라는 설도 있더군요.

앞에서 한국에서 수도를 옮기려는 시도도 했다고 했는데 그 전말은 어떻게 됩니까?

임채욱 선생: 그 때 새로 들어선 정권 대통령은 선거공약대로 한다면서 수도이전을 추진했지요. 명분은 국토균형 발전이라 했는데 큰 반대에 부딪쳐서 뜻대로 되지 못했지요. 결국은 충청남도 공주 안에 도시를 건설하고 세종시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행정수도라고 하고 말았습니다. 순전히 정치적 뜻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공약이라는 것은 선거 때 내가 당선되면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정책방향을 말하는 것이지만 대개는 표를 얻으려고 말하는 선거전술일 때가 많지요.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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