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의 한국인

158개국 704만여명…‘한인 네트워크’세계 묶는다

                                                               문화일보

구한말 시작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글로벌시대를 맞아 전세계 각국을 연결하는 한인 네트워크로 부상하고 있다. 1860년 간도 및 연해주 이주로부터 시작된 한인의 해외 이주는 세계 곳곳에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괄목하게 성장했다. 2007년 외교통상부가 발표한 재외동포현황 자료에 따르면 6대주 158개국에 총 704만여명의 한인들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해당 국가에서 정치 문화적 영향력을 키우는 것은 물론 상호 네트워크를 통해 한반도와 세계 각국을 촘촘히 연결하는 글로벌 한인파워로 성장하고 있다. 정부도 이를 반영해 지난해 10월5일을 ‘세계한인의 날’로 지정하고 매년 10월초 재외동포관련 행사를 마련, 700만 글로벌 한인을 국내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건국 60주년인 올해엔 세계한인정치인포럼, 세계한인회장대회, 세계한상대회, 코리안 문페스티벌까지 마련되어 국내외를 잇는 글로벌 한인 네트워크는 날이 갈수록 깊고 다양해지고 있다.


◆ 일본 = 1895년 12명에 불과했던 재일 한국인수는 1911년 2500명으로 늘어났으며 조선총독부가 ‘국민총동원법’을 근거로 노동자 징발을 본격화했던 40년에는 100만명을 넘어섰다. 해방되던 45년에는 200만명을 넘었는데 이중 강제징용자가 116만여명이다.

이 중 70%는 해방 후 귀국했고 60여만명은 일본에 남았다. 재일동포 1세대인 이들은 일본의 뿌리깊은 한인차별과 한국 정부의 냉대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지냈다. 교포 2세 이후부터는 모국과의 연대의식이 희박해지면서 일본귀화자가 늘고 있다. 외교부에 따르면 1952년부터 2005년까지 재일동포 귀화자는 총 9만6000여명에 달한다.

◆ 중국 = 19세기 중엽 생계를 위협받던 농민들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중국이민사는 시작됐다.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항일운동을 하기 위한 망명 이민이 늘었고 만주사변부터 광복때까지는 일본의 조직적인 한인이주정책에 따라 이뤄진 이주민이 많아졌다.

한인의 중국이주는 1907년에 7만여명, 1910년에 10만여명, 1921년에 30만여명으로 늘었다. 1945년 이전까지 약 216만명의 한인이 만주지역에 거주했는데 해방 후 80만명이 귀국하고 나머지는 잔류했다. 중국 교민들은 냉전시대 동안 남한과 별다른 접촉을 가질 수 없었으며,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진 후 중국 동포와의 교류가 본격화됐다.

◆ 미주지역 = 미주지역으로의 한인이주는 노동이민으로 시작됐다. 1902년 11월 고종황제는 미국 정부가 원하는 노동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수민원이라는 관아를 만들고 전국 곳곳에 방을 내걸었다. 그해 12월22일 미국배 캘릭호가 102명의 조선인을 태우고 제물포항을 떠나 다음해 1월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한인의 미국이민사는 이처럼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시작됐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중단될 때까지 3년 동안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와 미국 본토로 이주했고 이민 1세대가 형성됐다. 미국 교민사회는 1970년대부터 취업이민이 번창하면서 질적·양적 팽창이 이뤄졌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이룩하면서 취업이민보다 가족초청 이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역이민도 이뤄지고 있다.

현재 재미동포들은 전미지역을 총괄하는 한인회를 기반으로 미국 내에서 정치세력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과 비슷한 시기에 중남미 지역으로도 한인의 이주가 시작됐다. 1905년 5월15일 1031명의 조선인 계약노동자들이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에네켄(henequen·속칭 애니깽) 농장지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4년의 계약기간 동안 노예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이들 중 300여명이 1921년 쿠바로 넘어가면서 남미 이민의 효시를 이뤘다.

◆ 구소련 독립국가연합 지역 = 1930년대 농토를 찾거나 항일투쟁을 위해 두만강 국경을 넘은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 정부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터전을 옮겨야 했다. 당시 스탈린은 극동지역에서 일본과 전쟁을 할 경우 한인들이 일본을 지원할 것이라고 판단해 연해주의 한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사할린의 한인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정착해야 했던 경우다. 일본은 패전 후 사할린의 일본인은 본국으로 귀환시키면서 일본 국적을 부여했던 한인들에 대해서는 송환의무를 저버렸다. 1990년대 소련이 무너졌을 때 이미 독립국가연합 영역 내 한인 주민들의 총수는 약 50만명에 달했다.
                                                         10/2/08 문화일보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00201033023316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