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영봉 목사)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시리즈 4>
"그게 나였다" (He Was I)
마태복음 Matthew 25:40, 45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갑자기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 말이 있습니다. ‘섬기다’라는 말입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의 첫 일성이 "국민을 받들어 섬기겠습니다."라는 것이었고,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도 "국민을 섬기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섬기다’ 혹은 ‘섬김’이라는 말은 일반 사회에서는 별로 인기 없는 단어였습니다. 이 말은 본래 ‘신이나 윗사람을 모시어 받든다’는 뜻입니다. 이 말 속에는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전제되어 있고, 아랫사람이 기꺼이 윗사람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같은 차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직장에도 상사가 있고 부하가 있지만, 부하가 상사를 기꺼이 ‘섬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능적인 관계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뿐입니다.
이 말이 교회 안에서 인기 있는 단어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귀어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분을 섬깁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받들어 모신다는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닮아 이웃을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말고, 이미 받은 사랑에 만족하여 그 사랑으로 만나는 사람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독교 신자답게 ‘섬김’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자신의 국정 철학을 담아냈습니다. 대통령이 국민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 안에 포로 되어 있던 섬김의 철학을 보편화시켰습니다. 문제는 약속한 그대로 국민을 섬기고 있느냐 하는 것인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 같습니다. 지나간 날보다 남은 날이 더 많으니, 대통령과 정부가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진실하게 국민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지난 주 화요일에 새로 취임한 오바마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취임식을 지켜보면서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지금 국민이 오바마와 그의 정부에게 걸고 있는 기대와 희망은 실제보다 훨씬 더 큰 것일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부의 작은 실정도 국민을 매우 크게 실망시킬 것입니다. 저는 이 정부가 국민을 진실하게 섬김으로 건강하고 건전한 나라를 회복시켜 주기를 기도합니다.
2.
저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당신을 섬길 수 있도록 두 가지의 보이는 대상을 이 땅에 세워 두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하나는 교회인데, 교회를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섬김으로 당신을 섬기기를 기대하십니다.
창세기 1장2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과연 이것이 무슨 뜻일까? 인간의 외모가 하나님의 외모와 닮았다는 뜻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에 형상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 어구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 구약학자들이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래서 많은 제안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 세웠다"는 뜻으로 보는 해석이 제일 유력합니다. 그 옛날, 알렉산더 대왕은 다른 나라를 점령할 때마다 그곳에 자신의 형상 즉 동상을 세워 두었습니다. 그 동상은 그 땅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속해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동상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곧 알렉산더 대왕 자신에 대한 훼손으로 해석될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동상을 세우는 심정으로 인간을 지어 이 땅에 두셨습니다.하나님은 당신을 대변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당신의 성품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좁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신 인간에게 덧입혀진 특성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서 그분의 창조를 보존하고 지속해 가도록 세움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시기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해 인간에게 덧입혀준 하나님의 성품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대변하기보다는 자기를 주장하거나 사탄을 대변하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점차로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로 지어졌는지를 망각하게 되었고,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도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망각의 결과, 우리 사람들은 서로를 섬기는 대신 서로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결과에 이르렀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원수로 규정하고 미워하며 때로는 무참히 살육하는 잘못을 범해 왔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인류는 하나님의 마음에 수 없이 많은 비수를 꽂아 왔습니다.
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에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귀어 살아가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도록 세워 두신 거룩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과 함께 더불어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해갑니다.
그렇게 변화해 가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존귀함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존귀하게 지어졌다는 점에서 나와 내 이웃이 다르지 않습니다. 설사, 그 사람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죄와 악에 빠져 살거나 혹은 자신을 함부로 굴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처럼 보여도, 그가 사람인 이상 그는 하나님 때문에 온 우주보다도 더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귀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이 존귀하게 보이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분신처럼 보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두 절의 말씀은 ‘양과 염소의 비유’의 일부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그리스도께서 구원 받을 사람들과 멸망 받을 사람들을 나누기를,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는 것처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심판의 주님은 양들에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34-36절). 그러자 구원 받을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 주님을 대접했느냐?"고 반문합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절).
이번에는 심판의 주님이 염소들에게 말합니다. "저주 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주지 않았다"(42-43). 그러자 멸망 받을 사람들이 펄쩍 뛰면서 "아니, 언제 우리가 주님을 박대했다고 그러십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실로 놀랍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사람의 모양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조차도, 그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요, 그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주님께 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누구도 존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그의 외모나 재산이나 배경이나 학벌이나 지위에 따라 차별하는 것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히 혁명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가치관을 뒤집어 놓는 말씀입니다.
4.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소설가로서 크게 성공한 후 인생의 의미에 대해 회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방황을 통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게 되고, 회심 이후에는 기독교의 사상을 담은 우화를 많이 썼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Where Love Is, There God Is Also)는 우화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를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오늘의 본문과 관계되기 때문에 요약해서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주인공은 마틴 아브제이치(Martin Avdeitch)라는 구두 수선공입니다. 그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는, 매우 성실하고 성품 좋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아들들과 아내를 차례로 잃고 실의에 빠집니다. 하나님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어 다니던 교회도 발걸음을 끊습니다. 매일 술에 빠져 살면서 자신도 빨리 죽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청합니다.
그러던 중 고향 친구가 마틴을 찾아옵니다. 그는 마틴이 사는 모습을 보고 충고합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마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시간 동안 성실하게 사는 것이 마틴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마틴은 "아니, 나보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라는 말인가?"라고 묻습니다. 친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목숨이니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해. 그렇게 살다 보면, 자네 마음이 한결 편안해 질 거야"라고 대답합니다.
친구가 떠난 후, 마틴은 술에 빠져 사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어쩐 일인지, 그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성경이 술술 읽혀지고, 그 말씀의 뜻에 자주 고개가 끄떡여집니다. 한 동안 그렇게 말씀을 읽어가며 지내자, 점차 그의 마음도 바뀌고 생활도 달라집니다. 아내와 아들이 죽기 전처럼 다시 생기를 얻고 구두 수선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틴은 누가복음 7장을 읽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갔을 때 어느 죄 많은 여인이 와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이 그 여자의 행동에 화를 내자, 예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44절).
마틴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만일 내게 주님이 오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접하지? 나도 바리새인 시몬처럼 그분을 푸대접하면 어쩌지?" 그는 턱을 괴고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데, 피곤해서 그만 잠에 빠집니다. 얼마를 잤을까? 갑자기 "마틴!"하고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잘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엎드려 잠을 청합니다. 그 때 또 음성이 들립니다. "마틴, 내일 집 앞을 잘 보아라. 내가 갈 것이다." 그는 소스라치게 일어나 다시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이것이 혹시나 주님의 음성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듭니다.
5.
다음 날 아침, 그는 즐겁게 일을 시작합니다. 한 참 일을 하는데, 간밤에 들은 음성이 생각납니다. 그의 눈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을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그는 그 동네에 오래 살았고, 동네 사람들의 구두를 안 고친 것이 없으므로, 구두만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혹시나 간밤에 들은 소리대로 낯선 구두를 신고 주님께서 찾아오시지나 않을까 싶어, 구두를 꿰매는 순간순간 밖을 쳐다봅니다.
아침나절에 조금 낯선 구두가 보입니다. 자세히 보니, 부잣집 정원사로 일하는 노인의 구두입니다. 그는 퇴역 군인인데, 이제는 남의 집에 몸부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습니다. 한 참을 일하더니 구둣방 앞에서 잠시 서서 쉬는 것 같습니다. 마틴은 일손을 멈추고 문을 열고 나가서 그를 데리고 들어옵니다. 마틴은 그 퇴역 군인에게 따뜻한 차를 마시게 하고 정다운 대화를 나눕니다. 그 퇴역 군인은 마음이 따뜻해진 다음, 다시 나가 일을 계속 합니다.
마틴은 여전히 주님을 기다리며 일을 계속합니다. 이른 오후 즈음에 털실로 만든 허름한 신발이 보입니다. 처음 보는 신발이다 싶어 눈을 들어 얼굴을 보니 남루한 차림의 한 여인이 어린 아이를 안고 추위에 덜덜 떨고 서 있습니다. 측은해진 마틴은 얼른 밖으로 나가 그 여인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그 여인이 허기진 것을 알고는 자기가 먹으려고 만들어 두었던 스프와 빵을 내어줍니다. 음식을 먹고 밖으로 나가는 여인에게 마틴은 자신의 외투를 주어 어린아이를 감싸도록 합니다.
그런 다음, 마틴은 또 일을 시작합니다. "오신다던 주님은 언제나 오실까?" 그의 마음은 조급해집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사과 장수 할머니가 구둣방 앞에서 잠시 멈춰 쉽니다. 보아 하니 사과를 다 팔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꼬마 하나가 나타나더니 할머니 광주리에 있는 사과를 잽싸게 훔쳐 달아납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도 보통이 아닙니다. 사과를 훔쳐 달아나는 아이의 옷소매를 낚아채고는 심하게 나무랍니다. 보기가 딱해진 마틴은 밖으로 나가 아이 대신 값을 물어 주고 두 사람을 화해시킵니다.
그렇게 하루가 끝났습니다. 마틴은 가게를 정리하고, 저녁 요기를 한 다음, 다시 성경을 펼칩니다. 어제 누가복음 7장을 읽었으니 8장을 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곳이 펼쳐집니다. 조금 읽다가 피곤했는지, 마틴은 잠이 듭니다. 그 때 귓속말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틴, 마틴, 내가 너에게 갔었는데,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군." 마틴은 놀라서 묻습니다. "누구신데요?" 그 때, 마틴의 눈앞에 퇴역 군인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게 나였다." 이어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미소 띤 모습이 보이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음성이 들립니다. "그것도 나였어." 사과장수 할머니와 꼬마도 보입니다. 그들이 사라지자 음성이 들립니다. "그들도 나였어."
그 때, 마틴의 마음은 너무 기뻤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그가 사랑하는 주님이었습니다. 그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성경을 계속 읽으려고 눈을 돌렸습니다. 그 때 그의 눈에 들어온 말씀이 마태복음 25장 35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계속 읽다 보니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6.
믿는 사람들은 이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을 볼 때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해 찾아오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자신만을 보지 않고, 그를 지으시고 구원하셨으며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 섬김 받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그 시야가 흐려지지 않는다면, 믿는 사람들은 외모나 배경이나 학력이나 지위나 경제력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똑 같이 사랑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을 섬기되 필히 하나님을 통해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람을 섬기면 탈이 납니다. 그 섬김은 하나님에게까지 나아가지 않고, 섬김을 받는 사람에게서 멈추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섬기는 사람은 노예가 되며, 섬김을 받는 사람은 폭군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심성을 가지고는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심성으로는 다른 사람의 섬김을 제대로 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섬김은 섬기는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며 섬김을 받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일반 사회에서는 섬김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섬기기 전에 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을 만나고 사귀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고, 우리의 타락한 심성을 치료 받으며, 사람의 진정한 가치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섬김은 섬기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며, 섬김을 받는 사람을 감동하게 만듭니다. 서로 섬기는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은 모두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귀어 살아가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 섬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갑니다.
얼마 전, 어느 교우께서 ‘사귐과 섬김’에 대한 연속 설교를 들으며 느낀 점을 메일로 보내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교회에 와서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가고 계신데, 그 하나님 체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교회 안에서 만난 몇몇 교우들의 정성어린 섬김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하게 체험한 분들과 사귀며 그분들의 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 사랑을 경험하면서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메일의 일부를 그분의 허락을 받고 나눕니다.
'사귐과 섬김' 이 왜 필요하냐고 저에게 누가 묻는다면, 저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번 설교 말씀 중, 한 밤중에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또 내가 그런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물으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는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지만, 첫 번째 질문에는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저도 남에게 신세 지고는 죽어도 못사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남에게 하나 받으면 두 개로 갚아 줘야 직성이 풀리는… 너그러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신세 지는 걸 못 참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제가, 이제는 남에게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도움을 받고나서는 꼭 되갚아 줘야 한다는 부담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내 도움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게 해달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려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같이 밀도 높은 사귐과 섬김이 우리 교회 안에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사랑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렇게 또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섬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의 섬김을 받는, 참다운 사귐과 섬김이 우리에게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이 같은 일이 우리 교회 안에 가득하게 자리 잡는 것,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 내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사귐과 섬김의 능력으로 교회 바깥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을 차별 없이 존경하며 섬기게 된다면, 그는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7.
이렇게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가정에서 배우자를, 부모를, 자녀를 섬깁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관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자녀가 부모를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는 섬김입니다. 그 섬김은 아내를 질식시키고 남편을 타락시킵니다. 그 섬김은 자녀의 마음에 분노를 쌓아 올립니다. 그런 일방적인 섬김은 모두를 불행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섬김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귀어 얻은 사랑의 능력으로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서로 섬기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천국을 만드는 비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직장에서, 주인은 고객을, 고객은 주인을 섬깁니다. 주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객의 필요를 위해 섬깁니다. 고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인이 잘 되기 위해서 도와줍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직장에서, 상사는 부하를, 부하는 상사를 서로 섬깁니다. 서로의 필요와 요청에 민감하게 귀를 기우리고, 서로가 잘 되도록 힘써 도와줍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돌아봅니다. 그렇게 하여 서로를 섬깁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섬길 방도를 찾습니다. 허름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다가오시는 주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지금처럼 사람의 가치를 돈값으로 환산하는 사회에서는 그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에 맞게 대접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섬김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존귀하게 대하는 것이 섬김의 출발점입니다. 그렇게 대하면서 뭔가를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다면 더 큰 섬김이 될 것입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룰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10:45).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섬김은 우리 주님의 삶의 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그분의 삶의 원리를 따라야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섬김의 길을 걸으시고 그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섬김의 길로 우리 교회를 부르십니다. 우리 각자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그 길을 걷도록 부르십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진실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고, 교회의 문턱을 넘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섬김의 길을 걸어가도록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섬김의 길을 걸어 십자가에 이르신 주님,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뒤를 따르게 하소서.
저희도 주님처럼
모든 사람들을 존귀하게 대하게 하시고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섬기게 하소서.
변장하고 저희를 찾으시는 주님을
못 알아보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저희 각자가 진실로 이웃을 섬기게 하시고
저희 교회가 진실로 이웃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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