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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내 기도엔 아무도 없다"-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2009.3.15 (김 영봉 목사)

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115)
"내 기도엔 아무도 없다"
(Nobody Is in My Prayer)
요한복음 John 17: 9, 
   (김 영봉 목사)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여러분의 기도에는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그 기도에 담겨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세계입니다. 그 사람의 기도에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관심사가 기도에 담기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번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에 누가 있습니까? 내 기도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내게는 기도가 없다"고 말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기도가 너무나도 짧고 형식적이며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는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개인적으로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도를 배우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기도를 회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의 배후에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나는 기도 할 줄 모른다"고 핑계를 대지만, 실은 기도하기를 꺼리는 겁니다. 몸은 예배에 나오지만, 일대일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피하려 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나누는 사귐입니다. 그분의 임재 앞에 나 자신을 노출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또한 내 말씀을 아뢰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큰 도약을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는 분들의 경우에는 더욱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까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마주 앉아 관계를 트기 전까지, 그 믿음은 불완전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못합니다. 거기서 도약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타 죽을지라도 그분 품에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두둔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그 은혜를 믿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직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계십니까? 아직 하나님 주변에서 맴돌고 있습니까? 그렇게 믿어서 얻을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도약하시기 바랍니다. 떨치고 일어나십시오. 숨은 곳에서 나오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게 말씀하옵소서. 제 말씀도 들어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이 도약이 얼마나 중요한 전환인지,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2.

기도를 하지 않다가 기도의 문을 여는 것은 크나 큰 도약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하지만 기도에 있어서 또 한 번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나 자신과 자신의 관심사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품는 전환입니다. "내 기도에는 나밖에 아무도 없다"고 말하는 단계에서 도약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귀면 점점 내 기도가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기도에 담기게 되고, 내 기도에서 다루는 문제들이 점점 커집니다. 이웃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의 관심사를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기도가 깊어지면서 자연히 내 기도 안에 담기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intercessory prayer)라고 부릅니다.

반면, 기도를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구하기만 하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로써 무엇을 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기만 하는 기도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가운데서 구하는 것은 좋지만, 사귐이 전혀 없는 가운데 구하기만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런 기도로는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기도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늘 자신과 자신의 관심사 안에 묶여 있게 됩니다.

결혼을 간절히 원하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그 여자는 "좋은 신랑감을 주시옵소서"라고 매일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어느 날, 예배 중에 기도에 대한 설교를 듣습니다. 그 설교의 요지는, 기도가 자기의 관심사에만 묶이면 안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가 너무 이기적으로 기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바꿉니다. "하나님, 우리 부모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좋은 사위를 선물로 주시옵소서. 주님, 사랑하는 여동생을 위해 기도합니다. 동생에게 좋은 형부를 선물로 주시옵소서."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이 없는 한, 기도가 바뀌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관심사를 나의 관심사로 품어 안는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의 초점이 하나님과 만나 사귀는 일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중보기도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혹은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감히 중재자로 혹은 중보자로 자처할 수 있느냐?"는 것이 그분들의 주장입니다. 그분들이 걱정하는 바는 알겠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신약성서의 빛에서 보면, 모든 믿는 사람들은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 혹은 중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믿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합니다.

3.

예수님은 그 무엇보다도 기도하시는 분이었다고, 저는 몇 주일 전의 설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초점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만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기도 중에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영국의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포사이스(P. T. Forsyth)는 <기도의 영혼>(The Soul of Prayer)이라는 책에서 "목회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모두 중보 기도에 속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깊은 기도를 통해 충만한 영성에 이르면, 그 영성을 통해 다른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데 더 큰 능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진리를 목회자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믿음과 영성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모두 중보기도에 속합니다. 그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영성, 즉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부단히 그리고 많은 시간 동안 기도하셨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성부 하나님의 관심사들을 끌어안고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그분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보면, 그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기도하셨습니다. 한 공동체 전체를 두고 기도하기도 하셨고, 한 개인을 품고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는지, 그분은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해야 했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말했던 바대로, 예수님은 할 일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많은 시간 동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Too busy to pray)고 말합니다만, 기도의 사람들은 달리 말합니다. "너무 바빠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Too busy not to pray)고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일어나 기도에 전념했고, 때로는 밤늦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4.

중보기도를 하기 어려운 이유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중보기도의 원리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중보기도가 어떤 경우에는 사생활 침해처럼 보입니다. 미국에 있는 내가 한국에 있는 내 부모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슨 힘을 발휘할까 의문이 듭니다. 나라와 민족 혹은 아프리카의 질병과 가난 문제 혹은 훼손되고 있는 지구 환경을 두고 기도할 때면, "저 거대한 문제에 대해 나의 이 짧은 기도가 무슨 소용이 될까?" 싶습니다. 이 같은 많은 의문들 때문에 중보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겪었습니다.

이런 의문 때문인지, 때때로 의학자들이 중보기도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하곤 했습니다. 한 병동의 환자들의 이름을 주변 교회들의 중보기도팀에게 나누어 주고 치유를 위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유사한 질환을 앓고 있는 다른 병동의 환자들의 경우에는 그런 노력 없이 의료적인 치료만을 행합니다. 그런 다음, 두 병동의 환자들의 치유 과정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비교합니다. 이렇게 연구하고 비교한 결과, 중보기도와 함께 치료한 환자들에게서 뚜렷한 치유의 차이가 있었다는 보고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저는 전에 이 같은 연구 결과들을 흥미롭게 보았지만, 이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대개 연구하는 사람들의 목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며, 이 같은 연구 결과에 설득 당해 중보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물증’(물질적 증거)이 아니라 ‘영증’(영적인 증거)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영적 세계를 경험해 가노라면, 왜 중보기도가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영적 세계를 몸소 경험했던 기도의 대가들은 모두 중보기도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저는 물증을 제시해 가면서 중보기도를 하라고 설득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 대신, ‘사귐의 기도’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귀라고 권면합니다. 진실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지고 그로 인해 영적 세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관심사를 알게 되면 자연히 중보기도는 터져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진실로 관심하게 되면, 그 관심사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두에서 여러분에게 여쭌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안에 누가 담겨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 안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기도 중에,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두고 눈시울을 붉히며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기도 중에, 나와 내 가족의 관심사가 아닌, 좀 더 커다란 문제를 두고 가슴 아프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상태에 있는지 모릅니다.

5.

중보기도를 하기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고 기도했을 때, 그 기도가 실제로 효력을 나타내고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주 낙심합니다. 우리의 중보기도가 때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응답되는 경우도 있지만, 또 때로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말썽 부리는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만, 아이는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질병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지만, 병은 악화되기만 합니다. 어찌 보면 그런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교회도 여러 교우들을 두고 중보기도를 해 왔습니다. 교우들이 각자 기도하기도 했고, 우리 교회의 중보기도 팀에서 합심하여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를 경험한 분도 계시고, 그렇게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떠나보내야 했던 분들도 계십니다. 응답된 기도를 생각하면 기도에 힘을 얻지만, 우리가 기도한 바대로 응답되지 않은 사례만을 생각하면 기도에 힘을 잃습니다. 그럴 때면, "중보기도란 안타까운 마음에 그냥 하는 것일 뿐, 아무런 효력도 없지 않을까?" 라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거나 꺾으려 하는 노력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을 굴복시키려는 집단 농성이나 연좌데모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드리는 모든 중보기도는 하나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구하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 안에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십니다. 그 사랑을 그분의 방법대로 우리가 기도한 그 사람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기도로써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의식을 잃고 사투를 벌이는 환자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때, 나는 그 사람의 싸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질병과 노환으로 어려움을 겪는 어머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저는 미국 대륙과 태평양을 건너 어머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제가 이 단에 무릎 꿇고 우울의 늪에 빠져 고통 받는 교우를 위해 기도할 때, 저는 하나님의 영적 세계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하며, 그분과 함께 싸우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제대로 기도하려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마음에 대비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기도로써 구한 것과 다른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뭐 하러 합니까?"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기도는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으로 드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했던 응답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듣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바랐던 응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드린 기도는 어떤 방도로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사람이 결국 세상을 떠났을 때, "내 모든 기도가 소용이 없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기도는 분명 그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크나큰 힘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6.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믿고 기도하십시다. 우리의 기도의 오지랖이 넓어지도록 더욱 깊이 기도하십시다. 우리의 기도 안에 낯선 사람들이 담길 때까지 기도하십시다. 우리의 기도 안에 전혀 상관없다고 느꼈던 문제들이 담길 때까지 기도하십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도 기도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도 기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기도의 도움이 필요할 때 선뜻 기도의 도움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담에 "병은 널리 알리라"고 했는데, 영적으로도 이 속담은 진실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발생하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보기도팀에도 알리십시오. 출석카드에 기도 제목을 써서 알리십시오. 기도의 도움을 얻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약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진실로 강한 사람만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놓고 기도를 부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사귐과 섬김’의 본질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 공동체로서 교회는 교회 바깥의 문제들을 끌어안고 중보할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7장 20절, 즉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라는 기도는 2천 년 전에 한 번 올려진 기도가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성부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기도입니다. 참되고 영원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내가 아무런 기도도 할 수 없을 때조차 내 안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분을 기억하십시다. 그분의 모범을 닮아 우리도 우리의 기도 안에 많은 사람들을 품고 큰일들을 품으십시다.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담겨지기를 기뻐하십시다. 서로 기도를 부탁하고, 기도로써 서로를 품어주십시다. 그것이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로 향해 나가는 첫 걸음입니다.

이 일이 우리 각자의 기도 생활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속회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속회에서 서로를 믿고 자신을 열고, 서로 기도하며 하나가 되는 은총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중보기도 사역이 더욱 든든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이 이 사역에 참여하여 기도로써 교우들을 돕고, 가정을 돕고, 교회를 돕고, 나라를 돕는 일에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 자체적인 문제만을 붙들고 씨름하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제사장 공동체로써 바깥 사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하며 헌신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거룩한 열망이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영원한 중보자이신 주님,
주님의 영원한 중보기도를 믿게 하소서.
그 중보의 힘으로 살고 있는 저희이오니
저희도 역시 중보의 삶을 살게 하소서.
더 깊은 기도로써 주님을 알게 하시고
더 많은 사람들을 기도로써 품게 하시며
더 많은 일들을 끌어안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