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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엄마를 부탁해> 연속 설교 1-와싱톤 한인교회 김영봉목사

가정의 달을 위한 특별 연속 설교
                             말씀과 문학의 만남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보는 삶의 길
  
5월 3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5월 10일 사랑은 만족하지 못한다
5월 17일 마음은 누구나 같다
5월 24일 죽음, 이별 그리고 용서
5월 31일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소설 <다빈치코드>(2006년)와 영화<밀양>(2007년)에 이어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시도하는 또 하나의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통해 말씀과 문학의 신선한 조우를 경험하시고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이 설교만은 노치지 마십요.***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와싱톤 한인교회
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Fax: (703)448-5384  contact@kumcg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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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연속 설교 1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 주일째다”
(It's been a week since Mom is missing)
요한복음 12:23-26


                                                                       
                                                                        (김 영봉 목사)      

1.

지난 2월 초, 편찮으신 어머님을 뵈러 한국을 다녀 온 후, 아내가 어느 교우에게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빌려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눈물을 훔치며 읽고 있는 아내를 지켜보면서, 저는 그 책에 대해 겁을 먹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아버님과 어머님을 뵈면서 여러 번 울컥하는 순간을 직면했고, 그 순간들을 애써 잘 견뎌왔는데, 그 책을 읽었다가는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다 읽고 난 후 응접실 탁자에 놓여 있던 그 책은 며칠 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안 읽을 거라면 주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아내의 협박(?)에 밀려 며칠을 갈등했습니다. 며칠 후, 슬그머니 그 책에 손에 들었다가 그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방문 중에 회피하고 참았던 눈물이 자주 흘러내렸고, 때로는 혼자서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울기에 지쳐 책을 덮어 두고 한 참 있다가 다시 읽기를 반복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독서였습니다.

이 소설은 읽고 난 후에도 저를 쉬이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부모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은혜를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 저의 불효에 대해 뼈아픈 자각을 하게 했으며, 제 아내에 대한 저의 태도를 반성하게 만들었으며, 제 아이들에 대한 저의 사랑을 되짚어 보게 만들었습니다. 사랑과 용서와 이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이 충격과 감동과 회한과 반성을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 연속설교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이 소설을 읽도록 기회를 드렸습니다. 자칫 분주하고 건조해지기 쉬운 것이 이민자의 삶이기 때문에, 좋은 소설을 읽도록 기회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실한 신자는 성경만 읽으면 된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어느 시인이 그랬습니다. "까막눈보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말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한 책의 사람’(a man of one book)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한 책’은 성경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말한 존 웨슬리 목사님은 당시로서는 놀라울 만큼 여러 분야의 책들을 광범위하게 읽었습니다. 그렇게 안목이 열려야만 성경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경을 제일 중요한 책으로 삼되 다른 좋은 책들을 벗 삼아 읽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속설교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 소설을 읽도록 유도하는 데 있었습니다.

교우들이 보여 준 독서의 소감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저처럼 한 번에 읽어 내려가기 어려울 만큼 감정 이입이 컸던 분들도 계십니다. 특히,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유학 생활을 한 분들이 주로 그렇게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정도로 강한 감정 이입은 없었지만,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서 오랜만에 독서의 즐거움을 누린 분들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아픈 상처를 다시 기억하게 되어 고통스러웠다고 하십니다. 이번 연속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2.

오늘은 연속 설교의 그 첫 번째 시간으로서,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도구로 선택한 첫 문장, 즉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에 초점을 두려 합니다. 이 문장으로 시작한 소설은 마지막 장에서도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 개월째다"로 시작합니다. ‘엄마의 실종’이 이 소설의 중심 주제인 셈입니다.

새 집을 사서 이사하는 작은 아들집에 가기 위해 상경한 박소녀 할머니가 서울역에서 그만 실종되었습니다. 박소녀의 남편은 지하철 출입문이 열리자 당연히 아내가 따라 들어올 줄 알고 차를 탔는데, 차가 떠나고 돌아보니 아내가 없었습니다. 다음 역에서 내려 아내와 서 있던 그 자리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서울에 사는 자식들은 어머니를 찾아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만, 끝내 찾아내지 못합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지 구 개월째라면,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실종된 박소녀씨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던져줍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은 곧 "엄마를 잊고 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굳이 책 뒤에 첨부되어 있는 정흥수씨의 비평의 글이나 작가의 후기를 읽지 않더라도, 웬만한 안목이 있는 독자라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 신경숙씨는 집을 떠난 지 거의 삼십년 만에 고향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보름 동안 지내면서 자신이 얼마나 엄마를 잊고 살았는지, 엄마의 존재를 무시하며 지냈는지를 절감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가 잊고 살았던 어머니를 찾는 과정이 되었을 것이고, 많은 독자들에게 그런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보통의 소설들은 소위 ‘일인칭 작가 시점’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나는……"이라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거나,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그는……"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매 장(chapter)의 주어를 다르게 만듭니다. 큰 딸에게 말하는 첫째 장에서는 "너는……"이라고 했다가, 큰 아들에 대해 말하는 둘째 장에서는 "그는……"이라고 합니다. 남편에 대해 말하는 셋째 장에서는 "당신은……"이라고 말하고, 둘째 딸에 대해 말하는 넷째 장과 큰 딸에 대해 말하는 마지막 장에서는 다시 "너는……"이라고 합니다.

비평가들은 이 같은 설정에 대해, 마치 재판정에서 ‘박소녀 실종 사건’에 대해 가족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고발하는 것 같은 장면 설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작가는 마치 검사처럼 박소녀씨를 실종되도록 방치하여 객사하게 만든 가족들을 하나씩 데려다가 재판정에 세웁니다. 그리고는 "박소녀씨, 진술하세요. 큰 딸이 당신에게 어떻게 했지요? 남편은요? 큰 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둘째 딸과 둘째 아들은요? 아, 여기 시누이도 있군요. 당신을 평생토록 종처럼 부려먹고 마침내는 방치하여 실종시키고 객사하게 한 이 비정한 가족들을 고발하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박소녀씨는 일어나 자신을 잊고 살았던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내용은 고발이 아닙니다. 아무런 원망도 없습니다. 박소녀씨는 자신을 객사하게 한 가족들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검사님, 제 가족들을 그냥 두세요. 다, 내 박복한 탓이고, 다, 저희들 살기 바빠서 그런 거지요. 그냥 두세요. 나는 아무도 탓하거나 고발할 마음이 없어요. 저를 그냥 보내 주세요."

3.

일평생 자신을 무시하고 살았던 가족들을 책망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더 사랑하지 못한 자신을 책하는 박소녀씨의 진술은 가족들의 마음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고 죄스럽게 만듭니다. 차라리, 목 놓아 울면서 "내 인생을 어쩔 거야? 내 인생을 돌려줘! 나를 이렇게 만들고 너희들은 잘 살 것 같아?"라고 원망했으면 좀 낫겠습니다.

남편에 관한 장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박소녀씨는 남편 모르게 십년 동안이나 매 달 고아원에 사십오만원을 후원금으로 보내고 직접 찾아가 아이들 목욕이며 청소를 거들어 주었습니다. 고아원 직원이 너무도 고마워서 뭔가 해 줄 것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 주면 고맙겠다고 했습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박소녀씨는 소설가로 출세한 큰 딸의 소설을 고아원 직원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그 대목에서 박소녀씨는 남편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가 딸이 쓴 책을 읽어달라고 했으면 그 때의 당신이 읽어 주기는 했을까? 아내를 잃어버리기 전에 당신은 아내를 거의 잊고 지냈다. 잊고 지내지 않을 때는 대부분 무엇을 청하거나 탓하거나 방치했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공손한 말씨를 쓰다가도 아내에게만 오면 말투가 퉁명스럽게 변했다. 가끔은 이 지방 사람들만이 쓰는 욕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당신은 공손한 말투는 아내에게 써서는 안 된다고 어디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랬다."(147-48쪽)

우리나라 말로 ‘남편’이란 ‘남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 혹은 ‘남이 편하게 느끼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 다 편하게 해 주는 남편은 아내만은 결코 편하게 해 주지 않고, 그래서 다른 사람 다 편하게 느끼는 남편을 아내만큼은 편하게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박소녀씨의 남편은 남편 중에서도 남편이었습니다.

자식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큰 딸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 박소녀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시로 나온 뒤의 너는 어땠는가. 너는 엄마에게 늘 화를 내듯 말했다. 엄마가 뭘 아느냐고 대들듯이 말했다. 엄마가 돼서 왜 그래? 책망하듯 말했다. 엄마가 알아서 뭐 할 건데? 무시하듯 말했다."(45쪽) 어느 교우께서는 이 대목에서 목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친정어머니에게 했던 말투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가족 모두에게 박소녀씨는 실종되기 이전에도 이미 실종 상태였다는 것이 작가의 고발입니다. 그것이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들이밀고 싶은 질문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당신이 가장 사랑해야 하고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그 사람을, 당신은 잊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서 진실로 사랑받고 사랑해야 할 그 사람을 잊고 사는 것이 가장 큰 실패이며 결함이고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엄마를 잃고 나서 소설가로서 큰 성공을 이룬 큰 딸의 삶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렸습니다. 큰 아들도 건설 회사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이루었지만, 그 모든 성공이 빛을 잃어 버립니다. 가끔 한 밤중에 일어나 밤거리를 쏘다니지 않고는 외면할 수 없는 큰 어둠이 그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아무 것도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박소녀의 남편과 시누이의 마음에도 채울 수 없는 큰 구멍이 뚫려 버렸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사람을 잃는 것 혹은 잊고 사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상실인지를 여기서 발견합니다.

4.

그래서 저는 저 자신과 여러 교우들께 여쭙고 싶습니다. 혹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잊고 산 것은 아닙니까?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잊고 산 것도 아니라면, 무시하고 산 것은 아닙니까? 잃어버리지도 않고 잊지도 않았으며 무시한 것도 아니라면, 진실로 그 사랑을 감사하며 귀중히 여기고 마음 다해 사랑하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너 나 할 것 없이 아내를 무시하고 박대한 남편이거나, 제 사는 것에 매어 엄마를 잊고 산 자식들과 같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만, ‘나는 예외다’라고 큰 소리 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시인 김시천씨가 동구 밖 고목나무를 보고 어머니를 생각하고 쓴 시가 있습니다. 이 소설만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망각하고 살았던 우리의 허물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내가
그러진 않았을까?

동구 밖
가슴살 다 열어 놓은
고목나무 한 그루

그 한 가운데
저렇게 큰 구멍을
뚫어 놓고서

모른 척 돌아선 뒤
잊어버리진 않았을까
아예, 베어버리진 않았을까

이 시를 읽을 때 제 마음은 아리게 아팠습니다. 나를 사랑해 준 사람을 잊고 산다면, 나는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요! 그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고 산다면, 나는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지요!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요!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하나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고 그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고 산다면, 내가 세상을 다 얻는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시종일관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설사 간헐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 해서 허물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일평생 무시당하고 희생을 강요당하다가 마침내 실종되어 객사한 박소녀는 바로 저의 부모일 수도 있고, 저의 배우자일 수도 있으며, 저의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친구일 수도 있고, 교우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나 같은 남편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나 같은 아버지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자식은 아버지에 대한 터질 듯 한 분노로 인해 괴로워하는데, 아버지는 "내가 못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답답해하는 가정이 한 둘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요? 이런 생각을 하면 때로는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잃어버린 사랑, 잊고 살았던 사랑, 무시하고 살았던 사랑, 당연시하고 언제나 있어 주려니 하고 살았던 그 사랑을 다시 찾아 나서라고 우리의 등을 떠밉니다. 잃었다면 찾고, 잊었다면 기억해 내고, 무시했다면 알아주고, 무심했다면 감사하라고 우리를 흔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을 찬찬히 읽어 보라고 권합니다. 그 숨소리를 귀기우려 들어 보라고 권합니다. 그 마음속을 들여다 볼 시간을 마련하라고 권합니다.

우리 모두 잃어버린 사랑, 잊어버린 사랑, 무시해 온 사랑을 찾아 나서십시다. 잃어버린 사랑, 잊혀진 사랑을 찾고 회복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대면하기 싫지만 대면해야 합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사랑 없음을 인정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기억하기 싫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풀어가야 합니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왜 이렇게 틀어졌는지, 아이들과의 관계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처음으로 돌아가 그동안 걸어온 자리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내게 쏟아 붓는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고 그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알 가능성도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거듭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요일 4:7-8). 그렇기 때문에 2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집에서는 아내와 자식들을 질식시키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예배한다면, 그 찬양과 예배는 하나님 앞에 올려 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겸손히 고개 숙이고 우리의 사랑 없음에 대해 통회하고 회개하십시다. 진실한 무너짐은 돌파구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쏟아 부어졌던 사랑에 대해 무심했고 둔감했으며 때로는 사랑을 배반했던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자복하고 회개의 영을 구하십시다. 진실로 뉘우치는 마음을 달라고 구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영을 허락해 달라고 구하십시다. 나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감사히 여기고 받아들이며, 그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5.

이번에는 방향을 돌려 이 소설의 주인공 박소녀씨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 실제로 살고 있는 박소녀씨는 수 없이 많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일관된 헌신과 순종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남편으로부터 무시당하고 가슴 졸이며 살아가는 아내들. 아내에게 바치는 사랑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남편들.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이제는 "알았어요. 됐어요. 몰라도 돼요. 그만 하세요"라는 말로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부모들. 부모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모든 것을 당연하게 취급당하고 따뜻한 말 한 마디 듣지 못하는 자식들. 이들이 모두 현실 속의 박소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몇 말씀 드리려 합니다. 여러분의 한숨과 근심이 풀어지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그 사랑과 희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알아주고 감사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 소설에서 진실로 초라한 사람, 불행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박소녀씨의 남편과 그 시누이와 자식들 아닙니까? 그들에 비해 박소녀씨는 오히려 거룩해 보이지 않던가요? 현실의 박소녀 여러분,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위대하십니다. 여러분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을지요!

물론, 이 말로써 약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풍조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이 소설이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회복시키고 강요된 희생을 미화하려 한다고 비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작가인 신경숙씨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비판에 대해 매우 안타까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기대했던 것은 과거에 엄마들이 져야 했던 짐을 모두가 나누어지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박소녀씨가 생겨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홀로 짊어진 짐을 모두가 함께 나누어 져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박소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저항하고 투쟁하여 자신의 권리를 찾아내는 것이 한 방법일 것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진행된 여권 신장 운동이 바로 그 같은 노력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권 신장 운동의 덕을 많이 입었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릅니다. 1989년 10월, 제 딸이 태어났을 때, 저는 아내의 침상 곁에서 드렸던 감사 기도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하나님, 제 딸을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이 남김없이 꽃피어 나도록 도와주옵소서."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법도 있습니다. 그 고난과 희생과 아픔을 끌어안는 방법입니다. 권리를 위한 투쟁의 시대를 살아 온 사람에게 이 방법은 별 매력이 없어 보입니다. 별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어리석은 선택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진실로 큰 사람이 아니면 이 같은 선택을 할 수 없고, 이 선택은 많은 사람들을 살게 하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진실을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발견합니다. 소설의 종결부에서 로마 여행을 하는 큰 딸이 엄마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한 여자, 태어난 기쁨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 전에 결혼을 해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에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여인.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너는 엄마와 너를 견주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275쪽) 소설가로서 나름대로 명성을 얻고 인정을 받은 큰 딸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어머니 앞에서 초라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의 크기는 오직 사랑의 크기로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6.

작가는 이 소설의 마지막을 성 베드로성당 안에 있는 ‘피에타상’에서 마무리합니다. 피에타상은 미켈란젤로가 남긴 명작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한 아들의 시신을 안고 내려다보고 있는 조각입니다. 왜 작가는 이 소설을 피아타상 앞에서 마무리했을까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 두 분이야말로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아픔과 희생과 죽음을 끌어안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두 분의 이 한 없는 ‘고난 흡인력’은 결국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고, 참된 사랑의 능력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박소녀씨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네가 죽더라도 나는 살겠다"는 데까지 갔습니다만, 박소녀씨처럼 "내가 죽어 네가 산다면 나는 그 길을 가겠다"는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 12:24). 이 땅에 많은 박소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마음으로 지금 당하는 아픔과 고난과 희생을 끌어안아 보시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견디는 고난과 희생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건 없는 희생으로 그것을 끌어안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그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힘을 구하십시다.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는 큰 가슴을 구하십시다. 모든 아픔을 견딜만한 힘을 구하십시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구하십시다. 고난의 왕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 많은 열매가 여러분이 사랑한 그 사람들에게 맺힐 것입니다.

묵상: 이제 다 같이 눈을 감고 기도하십시다. 기도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잠시 살피는 시간을 가집시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박소녀입니까?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속히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한숨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까지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갈 힘을 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사랑해야 할 그 사람을 박소녀가 되게 한 장본인입니까?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사랑 없음을 고백하고, 내게 부어진 사랑을 무시하고 망각하고 외면하고 살았던 것에 대해 회개하십시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주님, 제 완악한 마음을 깨뜨려 주셔서, 제 곁에서 눈물짓고 있는 박소녀를 돌볼 마음과 사랑을 주옵소서."

이 시간, 잠시 동안, 각자의 사정에 맞게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