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4.12 (김 영봉 목사)
부활주일 설교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 "
Fake Like Genuine, Genuine Like Fake
누가복음 Luke 24:28-35
우리는 ‘진짜 같은 가짜’로 가득한 세상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산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진짜를 대치할만한 가짜 상품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 산업의 발달은 진짜 같은 가짜를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소위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컴퓨터는 현실을 가상공간에서 진짜처럼 경험하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 인간의 오감(five senses)으로 가상현실 즉 ‘진짜 같은 가짜’를 체험할 수 있는 Immersive Cocoon이 영국에서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NAU라는 단체에서 만든 이 가상현실 체험 기구를 우리말로 이름 짓는다면 ‘체험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 내부의 360도 전면이 컴퓨터 화면으로 되어 있고, 시각만이 아니라 후각, 촉각, 미각, 청각으로 종합적인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공 안에 들어가 자신이 체험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면, 그것을 실제처럼 체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 체험공이 TV처럼 저렴한 가격으로 각 가정에 보급되는 날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많은 돈을 들여 여행 다닐 이유가 없어질지 모릅니다. 페루에 있는 마추픽추 산 정상에 올라서는 경험을 선택하면, 그곳에서 부는 바람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고, 그곳을 거닐며 유적들을 만져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신의 자유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질지 모릅니다. 외로울 때면 그 공에 들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불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배우들을 차례로 불러내어 데이트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의 스위치 작동에 따라 절대 복종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기가 막힙니까? 좋아서 기가 막힙니까?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힙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이렇게 한탄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아, 그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겠군!" 정말 좋을까요? 진짜는 하나도 없고, 진짜 같은 가짜로 대리 만족을 하고 살아가는 그 삶이 과연 행복할까요?
2.
과학 문명, 기술 문명으로 인해서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진짜 같은 가짜로 가득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진짜를 포기하고 가짜에 만족하고 살도록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짜에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완전히 망가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진짜가 없이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영혼을 깨워 진짜를 추구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종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반문화적(counter-cultural)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는 이들로 하여금 그 시대의 문화에 젖어 함께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는 이들의 영혼을 깨워 일으킴으로써 그 시대의 문화를 거슬러 살게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시대의 정신을 이끌고 갔습니다. 시대마다 문화의 문제는 달랐지만, 기독교 정신은 언제나 그 시대의 문화의 맹점을 보고, 그 문화에 거슬러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문화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가짜에 만족하게 하는 경향’입니다.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부터, 탁자에 놓여 있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꽃다발, TV와 아이팟과 컴퓨터를 통해 경험하는 가짜 세계까지, 우리 시대의 문화는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속게 만들고, 그것에 만족하여 살도록 세뇌시킵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껍데기가 되고 있습니다. 가짜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 가짜로 살아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꾸민 가상의 세계에서 스스로 꾸민 시나리오에 따라 연극하듯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이 시대에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깨워 일으켜 진짜를 추구하도록 이끄실 것이라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속성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입니다. 모든 거짓과 허구를 들추어내고 진짜를 회복시키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는 참된 것, 진실로 존재하는 것,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깨인 사람이라면, 현실을 대리 체험하도록 만든 가짜에 속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보고 참된 것,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을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의 영혼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짜는 무엇입니까? 참되고 영원한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실로 참되고 영원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신(God)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로 참되고 영원한 것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물질 세계 안에서는 그런 것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뭔가 참되고 영원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신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 신이, 그 신의 세계가 우리 인간에게는 가짜처럼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그 신을 만난다는 것도 모두 거짓말처럼 보입니다. 허깨비에 속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영혼의 눈이 떠지기 전까지는 그렇습니다. ‘부활’이니, ‘영생’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착각의 산물이거나 속임수처럼 보입니다. 영혼의 눈을 뜨고 보면, 그 모든 것이 ‘가짜 같은 진짜’인데, 그 눈이 떠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가짜투성이로 보입니다.
3.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상태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회생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키는 말은 따로 있습니다. ‘소생’(resuscitation)이 그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의 상태에 들어갔다가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부활 주일 예배를 드리고는 있지만, 마음이 겉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부활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렇게 느끼는 분이 계시다면 외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닙니다. 혹시 그렇게 느끼는 분이 계시다면 ‘나는 왜 이런가?’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물질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적 세계는 가짜처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의문과 불신을 책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그 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 7 마일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로 가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그들은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고 예루살렘까지 따라 왔다가 그분이 허망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길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낯모를 사람이 그 여정에 합세합니다. 두 제자는 그 낯선 사람에게 지난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에 관한 일들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매장해 두었던 무덤에서 시신이 사라졌다는 당황스러운 소식을 들었노라고, 그 낯선 남자에게 털어 놓습니다. 도대체 누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고, 그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그 낯선 사람은 성경 말씀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해 가며 그리스도가 마땅히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그 낯선 사람은 두 사람과 작별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려 합니다. 두 제자는 그 사람의 가르침에 매료되었던지, 하루 밤을 묵어가라고 청합니다. 그 사람은 그 청을 받아들여 제자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식사 때가 되어 식탁에 앉자 그 낯선 사람은 식탁에 놓인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목가적인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의 이성에 위배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옵니다. 그 낯선 사람이 빵을 들어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자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31절)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신 예수, 무덤에 장사되어 사흘째가 된 예수, 바로 그 예수님이 그들 앞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너무나 보고 싶었던 나머지 그 사람을 예수님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더 황당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 제자들이 그 낯선 사람이 예수님인 것을 알아보자마자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31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건 또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함께 길을 걷고 대화를 나누었고 식사까지 나누었던 그 사람이 갑자기 온 데 간 데 없어진 것입니다. 두 제자가 만났던 그 사람은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백주에 꿈을 꾼 것입니까? 유령도 아니고, 실제 사람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4.
알고 보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들은 모두 이와 비슷합니다. 어느 하나, 손에 꽉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알쏭달쏭합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때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 그분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두려워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사라져 버립니다.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만, 우리의 몸과 같은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알듯말듯합니다. 그분을 만난 사람도 자신이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가 본 것이 유령인지 실체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것이 영적 세계의 속성임을 아십니까? 물질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영적 세계는 완전히 손에 쥘 수 없는 대상임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세계를 경험할 수는 있지만 잡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영적 세계를 볼 수는 있지만, 사진을 찍어 둘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는 있지만, 녹음해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영적 세계는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를 넘어서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신을 입고 물질세계 안으로 들어왔던 예수께서 죽음에까지 이르셨다가 영적 세계로 건너가신 사건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예수님이 과거로 뒷걸음질 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해 가신 사건입니다. 물질세계에서는 우리가 걸어 나갈 수 있는 종착점이 죽음입니다. 죽음으로부터 더 나갈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셨습니다. 물질의 세계를 뚫고 영적 세계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이야기들이 모두 알쏭달쏭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들은 모두 꾸며낸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거짓말 같습니다. 누군가가 오늘 읽은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두고서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말하면 저로서는 반박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그 낯선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할만한 자료가 제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 낯선 청년이 진실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단서(clue)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32절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두 제자 앞에서 그 낯선 청년이 홀연히 사라졌을 때 그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보다 더 황당하게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도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그것을 알기 위해 여러 가지를 따져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그들의 마음에 집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32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나타났다 사라진 그 청년이 부활하신 예수님인지 아니면 유령인지를 과학적으로 조사할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두 제자는 그와 함께 있는 동안에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동안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불신이 믿음으로 바뀌고, 마음에 어둠이 사라지고 환한 빛이 비쳤습니다. 차갑게 식어있던 마음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마음의 변화가 단순히 심리적인 현상으로 일어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유령이나 환영을 보는 것으로는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런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그들에게 나타났던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5.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실로 부활하셨는지 어떤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의 마음에 남긴 자취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께서 나를 만지신 것인지, 내가 심리적인 착각을 일으킨 것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진짜입니다. 그 변화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마음 놓고 "내가 주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고,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다"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지난 3월에 있었던 영성 수양회에서 어느 교우가 겪은 이야기를 하나 나누겠습니다. 이 체험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시고 또한 그 이야기를 설교에서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그 교우께 감사를 드립니다.그 자매는 참 어렵게 수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분에게 영적 휴식과 충전이 꼭 필요하다 싶어서 목회자들도 권유하고 속장님도 강권했으나, 사정이 도대체 받쳐주지 않았습니다. 수양회를 시작하기 며칠 전까지도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는데, 당일에 가 보니 와 계셨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에 수양회에 참여한 모든 식구들이 한 분씩 돌아가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하나님께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고, 일행은 간절히 그 자매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분이 마음 안에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그 다음 날 아침, 아침 기도회에서 묵상 기도를 드리는데, 그 자매의 마음에 그림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넓은 초원에 양 한 마리가 외로이 서 있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양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목자가 서 있습니다. 목자가 보이기는 했지만, 양은 초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아서 외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잠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홀로 서 있는 그 양 곁으로 많은 양들이 모여 들었고, 다음 순간에 보니 그 목자가 처음 보았던 그 양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매는 목자가 안고 있는 양이 자기 자신임을 직관적으로 느꼈습니다.
그 자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찬송가 453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 양"이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전에는 1절 가사밖에 기억을 못했는데, 신기하게도 부르다 보니 3절 가사 전체가 정확하게 기억이 났습니다. 그렇게 그 찬송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불렀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났을 때, 그 자매는 자신의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분노와 증오와 불만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마음에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로부터 한 달 여가 흘렀습니다. 그 자매 자신도 자신이 겪은 경험이 그냥 상상 안에서 일어난 것인지, 성령께서 주신 환상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자매 자신도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잠시 잠깐의 감정적인 변화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 그 경험을 통해 치유된 마음이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마음의 변화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치유되고 나니 그분은 사랑할 수 없던 사람을 사랑하고 품어 안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 자신보다 가족들이 그 변화를 더 먼저 알아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자매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진짜 영적 경험입니까, 아니면 감정적인 착각입니까? 저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자매의 마음을 만져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 터치의 결과로 그의 마음에 용암(magna)처럼 끓고 있던 분노와 증오와 불만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사랑하기 어려웠던 사람을 사랑하고 용납하게 되는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자매가 본 것이 환상인지 아닌지를 조사할 방법이 제게는 없지만, 그분의 마음에 남겨진 영향을 볼 때, 그것은 분명 부활하신 주님의 터치였음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 있다고 생각하면 혼란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영적 세계 안으로 들어가신 주님은 더 이상 육신을 가진 우리처럼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사는 육적인 차원과 물질적인 차원을 초월하시는 방식으로 존재하시며 살아 역사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과학적 사고로는 부활이 무엇이며 부활하신 주님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이해할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그분, 아리마대 요셉의 돌무덤에 장사되었던 그분, 죽은 지 사흘째가 되어 시신의 부패 과정이 시작되었을 것이 분명한 그분이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구요?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의 마음에 남겨진 흔적이 그 근거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그 자매의 마음에 일어난 변화가 그 근거입니다. 제 마음에 일어난 변화와 제 삶에 일어난 변화가 그 근거입니다. 우리 중에 그 증인으로 나설만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 마음의 증거로 인해 우리는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믿습니다.
지난 주, 저는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시고 잠시 한국 방문 중인 새 교우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제 발로 우리 교회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새벽기도회와 수요 예배까지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은혜를 사모해 오셨습니다. 사순절을 다 채우고 가고 싶었지만 직장 일로 인해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주 아쉬워하면서 "한국에 가서도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는 부탁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받은 은혜를 사모하여 한시 바삐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인가, 새벽기도회가 끝난 후, 홀로 남아 기도하시는데, 그분이 울고 계셨습니다. 50대의 남성입니다. 나중에 만나서 제가 여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기도하시면서 우시던데요."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웬걸요. 이렇게 늦게 돌아온 것이 후회되어서 울고, 이제라도 부르셔서 은혜 주시니 웁니다." 그분이 제게 보낸 메일 마지막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새로 발견한 이 믿음이 순간적 감정에 의한 반짝 믿음이 될까봐 너무나도 두렵습니다. 성령님이 주관해 주시는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주님의 종이 되기 위한 참 믿음이 될 수 있도록 저는 항상 기도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마음의 증거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 마음의 증거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도 사도들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라고 말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가짜처럼 느껴지겠지만 진짜 중에도 진짜입니다. 그 사실이 의심이 될 때마다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남긴 흔적이 보일 것입니다. 누군가 부활을 부정하며 여러분의 믿음을 흔들면, 찬송가 151장의 가사처럼 대답하십시오. 이렇게 말입니다.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구요? 내 맘에 살아 계시거든요!"(You ask me how I know He lives. He lives within my heart).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허구성을 입증하기 위해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설명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에 다시 집결하여 목숨을 내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전하고 다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고, 죽었다고 생각했던 예수가 제자들을 만나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는 설명 외에는 그 변화를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마음의 증거 때문에 초대 교인들은 생명을 걸고 부활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7.
현대 문화와 문명은 우리로 하여금 가짜에 만족하여 진짜를 잊고 살아가도록 오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성을 망각하게 만들고 인생을 껍데기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같은 문화적인 위협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밖에 없습니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진짜를 추구하며 진짜를 알아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참되고 영원한 것, 진짜 중에도 진짜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참되고 영원한 것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가짜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것만이 영원하고 참된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참되고 영원한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보다 더 참되고 영원한 것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나타나십니다. 그분이 정한 때에 그분이 택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로서는 그분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 우리가 잡힐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잡혔는지, 악령에게 잡혔는지, 아니면 백일몽을 꾸었는지는 오직 우리 마음을 들여다봄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그분이 만진 흔적이 있다면, 그래서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이 생기고, 나도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있고, 나도 이해할 수 없는 평화가 있으며, 웬일인지 알 수 없이 눈물이 나고, 이유를 알 수 없이 미소가 번진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겸손히 그러나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나를 만져 주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의심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마음의 증거는 우리의 내면뿐 아니라 삶 전체를 바꾸어 줄 것입니다. 이 마음의 증거만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짓눌리지 않고 기쁨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이 마음의 증거로 인해 우리는 가는 곳마다 평화의 도구로, 화해의 도구로, 사랑의 도구로, 진리의 도구로 사용될 것입니다. 이 축복이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주님,
저희 마음을 엽니다.
저희 마음에 오소서.
저희 마음에 부활의 증거를 남겨주시고
주님의 영적 세계에 눈 뜨게 하소서.
진짜 같아 보이는 가짜에 인생을 걸지 않게 하소서.
가짜 같아 보이는 진짜에서 생명을 찾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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