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어려움에 처한 분들께 이 설교 듣기를 권합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마음이 자꾸만 짓눌리는 또 다른 이유는 지금 당하고 있는 그 문제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것이 없으면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마치 그것이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그것으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재정에 문제가 생기면 그로 인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진학 문제가 좌절되면 생애가 끝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마치 지금 당한 그 문제가 자신의 전 생애를 집어 삼킬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포기해야 할 그것 말고도,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느낄만한 요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살아나가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2008.5.4 (와싱톤 한인교회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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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은 없다"
(Life Is Worth Living No Matter What)
요한복음 John 20:19-21
1.
살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느낌! 어떤 사람의 상황이 너무도 처참해 보일 때, 그리고 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일 때, 우리에게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 느낌은, 비록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으로 그렇게 느끼고 마는 것이니 큰 위험은 없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그런 처지에 처했을 때 동일한 느낌이 마음을 지배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그 생각은 마음의 느낌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취하는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참 위험합니다.
남의 일이건, 나 자신의 일이건, "죽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오늘 설교 시간 내내 이 문장만 되풀이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 진리가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지기만 한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딱한 처지를 볼 때,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고 고귀한 한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혹은 우리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상황에 직면할 때, 그 순간의 유혹을 능히 이겨 넘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영원불변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죄가 많고 악이 판을 치며 오염되고 비뚤어진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환난과 시험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과제는 환난과 시험을 피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환난과 시험을 극복해 나가는 데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평화는 바로 이 환난과 시험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입니다. 그 평화의 능력에 의지하게 되면, 우리는 환난과 시험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환난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16:33)고 할 때의 그 이김은 바로 환난과 시험을 극복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없으면, 닥쳐오는 환난과 시험에 압도되기 쉬우며, 우리 마음은 불안해지고 두려움에 질리게 됩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질리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심히 움츠러들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은 끝없이 지속되고, 그 두려움과 불안을 누구에겐가 털어놓지 않고 마음속으로 웅크리고만 있으면, 결국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넘어가 버립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한 순간의 충동적인 결심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오랜 시간 동안의 좌절과 번민과 질문의 결과로 생깁니다. 처음에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가, 중간에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지 몰라!"라고 수긍했다가, 결국 "그래, 죽는 게 더 나아!"라는 결론에 이르는 겁니다.
2.
말이 나왔으니, 자살과 관련하여, 한 가지, 아주 널리 퍼져 있는 믿음에 대해 말씀 드리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자살한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교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는 자살한 사람을 위해 장례 미사를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그 어떤 공식적인 예배 행위도 금하고 있으며, 심지어 교회 묘지에 안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직 돌아가신 분의 구원을 위해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만을 허락할 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개신교인들(Protestants) 사이에도 그런 생각이 퍼져 있습니다.
성서에는 그 어디에도 "자살한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없다"거나 혹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천주교회에서 가르치는 이 교리는 고대 교회의 주교이자 신학자였던 어거스틴(Augustine)과 천주교 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가르침에서 온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자살이 십계명의 제 6 계명 즉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위반하는 죄라고 설명했습니다. 천주교회 교리의 골격을 마련해 준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unforgivable sin)라고 규정했습니다. 첫째, 자살은 자기 보존의 욕구라는 자연법(natural law)을 거스르는 것이며, 둘째, 그것은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거부하는 것이며, 셋째,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리를 남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자살은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가장 치명적인 죄(the most fatal sin)라고 말했습니다.
자살을 가장 심각한 죄로 생각하는 점에는 개신교도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살한 사람은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교파마다 다르고 목회자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개신교회는 자살을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실수요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열려 있다고 믿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우리가 교리적인 잣대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믿기에, 개신교회에서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장례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선한 처분을 믿고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 때문에 자살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은 이중고를 겪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비극적으로 떠나보낸 아픔에 더하여, 그 사람이 지옥 불에 영원히 고통당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큰 시름을 앓아야 합니다. "자살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그런 계획을 하는 사람에게는 강력한 제동 장치가 되지만,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에게는 참으로 지기 힘 든 멍에입니다. 그게 실제로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인간이 만든 교리적인 판단이므로 전적으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자살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입니다. 성서에도 자살 이야기가 몇 개 나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자살입니다. 그런 경우는 누가 보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병을 앓는 사람이 생활고에 허덕이다가 한 순간 판단을 잘 못 하여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한 것이라면, 그 경우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것은 죄이지만, 약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신체적인 질병이 죄가 아니듯, 심리적인 질병도 죄가 아닙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심리적인 병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데, 그 앞에서 교리를 들이대며 "사정이 어쨌거나, 당신은 구원받을 수 없소"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을 눈물도 피도 없는 비정하고 편협하고 완고하며 앞뒤가 꽉 막힌 교리주의자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신 하나님은 눈물도 많고 피도 펄펄 끓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넉넉한 품 안에는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고귀한 생의 기회를 반납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도 있음에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비극적으로 이별한 분들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3.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점을 말씀 드리는 동시에, "죽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하겠습니다. 자살은 우리가 범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만한 가치가 있으며, 아무리 불우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생은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취해 가시기까지는 그 생명을 감사하고 축하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상황이 어떻든지 말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심리적으로 자꾸만 짓눌리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나만 이렇게 당하고 산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질병이든 사고든 혹은 관계의 문제든,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할 때 자주 "왜 나만 이러나?"라는 질문에 빠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만 불행이 닥치느냐?"는 감정에 빠집니다. 교회를 가 보아도 다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이고, 속회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두 다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나만 이럴까 싶습니다.
속고 있는 겁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의 감정은 아주 기가 막힌 사기꾼이거나, 아주 쉽게 속아 넘어가는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누구나 그 나름의 아픔과 고민과 불행이 있습니다. 심방을 하여 교우들의 삶의 속을 들여다보면서 얼마나 자주 그런 자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뵙기에는 아무 근심도, 아무 불행도,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분들입니다만, 사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속에 감추어 두었던 아픔과 고민과 불행을 내어 놓습니다. 그런 것을 마음에 담고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살고 있는지 놀라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아픔을 보고 나면, 그분들이 더욱 귀하게 보이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종류가 다르고, 정도가 달라서 그렇지, 모두 다 나름의 불행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민자들 중에서 삶의 기본적인 욕구조차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빡빡하고 분주한 살림살이 때문에 부부가 남남처럼 살아가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분들에 비하면, 어떤 분들은 모두 다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에게도 나름의 아픔과 불행이 있습니다. 옛말에 "꽃가마 속에도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꽃가마 안에 앉아있는 새색시야말로 가장 근심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까? 겉으로 화려해 보일수록 근심은 더 깊고 불행은 더 진할지 모릅니다. 반면, 겉으로 불행해 보이지만, 실은 그 불행이 보이는 것보다 연하고 그 근심이 보이는 것보다 얕을지 모릅니다.
나만 당하고 있다는 피해 의식이 마음을 짓누를 때, "또 내가 속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 사기꾼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다 당하고 있는 아픔이요 불행이요 근심입니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서서 우렁차게 설교하는 제게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백악관의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도 있고, 청와대의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있습니다. 영화배우보다 더 영화배우 같은 모습으로 수 만 명의 신도들에게 환각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에게도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갑부인 빌 게이츠(Bill Gates)에게도 있고, 워렌 버핏(Warren Buffett)에게도 있으며, 도날드 트럼프(Donald Trump)에게도 있습니다.
4.
어려움을 당했을 때, 마음이 자꾸만 짓눌리는 또 다른 이유는 지금 당하고 있는 그 문제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것이 없으면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마치 그것이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그것으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재정에 문제가 생기면 그로 인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진학 문제가 좌절되면 생애가 끝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마치 지금 당한 그 문제가 자신의 전 생애를 집어 삼킬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포기해야 할 그것 말고도,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느낄만한 요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살아나가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인터넷 뉴스에서 이상우라는 가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가수로 혹은 연기자로 나름대로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 전 KBS의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아픔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기독교방송의 <새롭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간증도 한 것으로 압니다. 다름 아니라, 발달 장애를 가진 14세의 아들에 관한 숨겨진 사정을 공개한 것입니다.
결혼 3년 만에 얻은 아들 승훈이가 30개월이 지나도 말을 하지 못하기에 병원을 찾았더니 발달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진단을 받고 나서 이상우씨는 그 일로 인해 자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하고는 3개월 동안 술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다행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이를 위해 씩씩하게 살아가는 아내를 통해 그는 서서히 술독에서 빠져 나와 현실을 대면했습니다.
그렇게 정상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번에는 갑자기 아내가 절망에 빠져 한 달 동안 손을 놓아 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가 그렇게 씩씩했던 것은 나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무리 노력해도 낫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을 깨닫고 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믿음으로써 그 절망감을 뿌리치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둘이 함께 아이를 위해 헌신하며 행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숨겨진 이야기를 공개하게 된 원인을 묻는 기자에게 "장애아를 키우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제 마음을 찡하게 울린 대목이 있습니다. 기사를 그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저희 부부는 승훈 이를 통해서 새 세상을 봐요.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일에도 감사하는 걸 배웠으니까요. 승훈 이가 어쩌다 단어 하나만 제대로 발음해도 행복했어요. 가장 감동했던 순간이 승훈 이가 거짓말을 했을 때예요. 다른 부모 같으면 아이가 거짓말을 하면 화가 났겠죠. 하지만 어느 날 양치질 안 하고서 '했다'고 말하는 승훈 이를 보고 눈물이 나올 만큼 감격했어요. 이제 내 아들이 거짓말을 할 줄 아는구나, 이제 이만큼 나아졌구나, 싶어서요." (조선일보 2008년4월 25일)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지!"라고 말하겠습니까?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을 포기할 만큼 커다란 문제도 없고, 그만큼 무거운 짐도 없으며, 그만큼 고통스러운 아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있을 이유가 있으며,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그 안에도 행복이 있습니다. 불행이 더 커 보일 때도 있지만, 우리의 눈을 불행의 반대편으로 돌리고 살아가다 보면, 그 불행보다 더 큰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5.
우리의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환난과 시험에 짓눌리지 않고 그것을 대면할 평화와 용기를 제공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한 죽음조차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환난과 시험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불행 속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불행으로 고정된 우리의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눈에 눈물이 가득히 고여 있어도 마음으로 웃을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온 몸에 상처투성이로 누워 있어도 마음에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고귀한 삶의 기회를 감사하고 귀하게 여기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 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팀 호잇>(Team Hoyt)으로 알려져 있는 아버지 딕 호잇(Dick Hoyt)과 아들 릭 호잇(Rick Hoyt)의 이야기로 끝마치려 합니다. 릭은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기는 바람에 뇌성 마비(cerebral palsy)를 앓게 되었습니다. 의사와 주변 친지들은 그 아이를 기관에 보내도록 권고했지만, 부모인 딕과 리즈(Liz)는 그 아이를 다른 아이와 동일하게 키우기로 결심하고 또한 그렇게 헌신합니다. 그러던 중 릭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5마일 달리기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릭이 아버지에게 함께 달릴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휠체어에 싣고 밀면서 그 경기를 완주했습니다. 그렇게 달려서 골인 지점을 통과했을 때, 아버지는 17년 동안 아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휠체어에 실려 달리는 동안 자신의 장애를 잊고 자유를 만끽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아들을 싣고 2007년까지 950회의 달리기 경기에 참여했고, 마라톤 풀코스를 60회 완주했으며, 심지어 철인 삼종 경기(triathlon)에 여섯 번이나 참여하게 됩니다. 지금 그 아버지의 나이가 67세입니다. 아들은 보스톤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특수교육 분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천재 물리학자 스테펜 호킹(Stephen Hawking)처럼 뇌파를 사용한 컴퓨터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아버지 딕은 "도대체 무슨 힘이 당신으로 하여금 아들과 함께 그토록 줄기차게 뛰게 만드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아들을 미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나를 끌고 갑니다." 릭을 비롯한 이 가족 모두는 정말 비참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 가족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영상을 하나 보시겠습니다. <팀 호잇>에 관한 영상입니다. 장애아들을 기르는 과정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경기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입니다. 아름다운 찬양 "I Can Only Imagine"이라는 곡이 배경으로 흐르는 이 영상을 보시면서, 죽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은 없으며, 인생은 어떤 경우에도 살 가치가 있으며 살 이유가 있음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진리는 아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상황은 다 다르지만, 릭과 딕이 함께 뛰면서 그 모든 장애와 불행을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도 그렇게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배경 음악의 가사가 말하듯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 갈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오직 상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we can only imagine). 실제로 그렇게 주님과 함께 걸어갈 때, 상상도 못했던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영상 속에서 보시겠지만, 릭이 뇌파로 컴퓨터에 쓴 글(CAN)처럼,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Yes, we CAN!
그러니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십시다. 담대히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걸어가십시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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