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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세계기독간호재단 이송희 회장 (1)

2010-09-24

사진제공-이송희 씨

지난 6월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간호재단 정기 총회에서 이송희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간호사는 역사적으로 고대, 중세의 의료 보조 인력에서도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으나 근대의 간호사는 크리미아 전쟁(러시아가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 때 전문직업으로서의 간호사로 종군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로부터 비롯하였다 할 것이다. 한국에서 간호사의 역사는 아무래도 6 25전쟁과 더불어 큰 역할일 것이다. 그들의 보살핌으로 한국 군인들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의 한 증인으로 6 25를 증언해 주고 있다. 한국의 백의의 천사들은 또한, 한국 근대사의 경제발전과 세계 곳곳의 병원에서 봉사의 손길을 펴고 있어 자랑스러운 한국의 여인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625전쟁 당시 백의의 천사로 부상군인들과 함께한 이송희 여사의 도전 삶의 현장 1부를 함께한다.

이송희 여사의 생애 속에 60여 년을 훨씬 넘게 간호사로서 한국과 미국 등에서 일해왔다. 이 여사의 생애를 찾아보면 꿈틀거림의 도전의 정신을 찾게 된다. 이 여사는 1928년 2월 평북 신의주에서 기독교 가정의 6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고 한다. 그는 일제하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인가 국어과목이 없어져 우리의 역사를 배울 기회가 없어 늘 아버지로부터 한국의 역사, 인물사를 배우게 된다. 이송희 여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송희: 아버지로부터 자라면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 우리나라 임금들의 이야기, 충신, 효자, 효부, 효녀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아버지는 이순신 장군의 16대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우리 덕수 이씨인데 덕수 이씨 중에서 이율곡 선생님, 신사임당 이야기도 많이 들어 이야깃거리가 많았어요. 그래 저희 집에는 학교에 갔다 오면 친구들이 같이 모여 같이 공부했는데 친구들과 아버지에게서 재미있게 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만주로 꽃구경 간 것과 큰 빨래를 할 때에는 압록강에 나가 어머니는 뗏목 위에서 빨래를 하고 이 여사는 물놀이를하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이송희: 우리 집의 연례행사로 봄이면 압록강 다리를 건너 만주에 가서 마차를 타고 안동 진강산으로 아름다운 벚꽃 꽃구경을 가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마차를 타면서 기장 떡을 먹었거든요. 참 맛 있었어요. 또 부모님 그리고 친구 부모님 친구들도 같이 만주 오룡내(오룡천)라는 곳에 가서 온천욕을 하면서 즐겁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송희 여사의 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떤 일들이 기억이 날까? 일본의 전쟁놀음에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고 들려준다. 1941년 당시에는 쌀 구하기가 어려웠고 군것질하기도 어려웠단다.

이송희: 제가 입학한 1941년에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졸업할 때까지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4년간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교실에서 기계를 놓고 가마니를 짠다든가 군인들이 끼는 장갑을 만든다든가 심지어 운동장을 밭을 갈아서 농사도 짓고 이렇게 근로봉사를 많이 해서 공부는 제대로 할 수 없었고 특별히 영어과목은 원수의 나라라고 해서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배우지 못했고 그 당시는 쌀도 배급제가 되어서 어머니들이 쌀 구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곤 하셨는데 그 당시는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군것질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자랐는데.

이송희 여사의 고등학교 시절은 일제의 전쟁놀음에 빼앗겼는가 하면, 해방되자 북쪽에는 김일성이 주도하는 공산국가가 탄생하자 급기야 38선을 넘어 남하하게 된다.

이송희: 고등학교를 졸업한 1945년 8월에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지만, 곧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어서 평양에 김일성이 주도하는 인민공화국이 세워져 분위기는 살벌해지고 공포 분위기였다. 그리고 제가 본 것은 신의주 학생 사건이 일어나 그때에 학생들이 소련군이 발사한 총에 맞아 쓰러지고 피를 흘리는 이런 광경을 봤습니다.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과 윤화영 목사님은 얼마 가지 않아서 체포령이 내려서 학생들이 보호해서 남하하셨다는 그런 소식을 들었어요. 점차로 신의주 제1 교회와 제2교회 성도들 가정도 목사님들이 떠나신 후 계속 남하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저도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으로 서울에 남하할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가 해방되는 다음 해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와 같이 남쪽으로 가기로 했는데 그때 마침 저의 둘째 오빠가 중국에서 살고 있었는데 배편으로 한국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때 큰 오빠의 아들이 수원 농사시험장에 직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직장에 사택이 있었는데 셋째 오빠가 같이 가서 살았어요. 그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같이 삼팔선을 넘어서 남하했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간호사로의 인연이 남다르다. 그 당시 혼란의 어려운 시기에도 이 여사에게는 공부의 열정이 가득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간호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이송희: 저희 오빠가 서울에 가셨다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간호학교 학생 모집 광고가 있는 신문을 가지고 오셨어요. 그 내용을 보니까? 입학시험에 합격만 하면 장학금을 받고 기숙사 생활을 하는 조건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간호사가 된다고 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선택할 여지가 없었어요. 그래서 시험에 합격하어서 간호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꿈은 교수가 되는 것이었지만 625전쟁을 맞게 된다.

이송희: 나는 공부하는 것이 좋아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특별히 영어와 독일어도 열심히 공부했는데 간호학교를 졸업한 후에 진로를 어떻게 할까? 생각 중에 이화여자대학교에 마침 김활란 박사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간호교육학부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교육자가 되려는 생각으로 간호교육학부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입학 한 지 한 달도 안되어서 6 25전쟁이 터졌어요. 그래서 6월28일 학교에 갔는데 당분간 휴교한다는 공고가 나왔습니다.

이송희 여사의 청년기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으로 서울 침공 시에도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 시에도 서울대학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그때 하마터면 북한으로 납치되어 갈 뻔 한 어려운 일도 있었단다.

이송희: 그 당시 저는 밤에 일하면서 낮에 학교 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대학병원에 남아 있었는데 돌아오자 얼마 있지 않아서 의정부에서 인민군의 총탄을 맞고 부상당한 국군이 대학병원으로 피를 흘리며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국군 부상병을 간호하기 시작했는데 제가 하룻밤 자고 나와 대학병원 시계탑 앞에 나오니까 국군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어요.(미처 피신을 못한 국군 부상병들이 총살을 당했어요.)그리고 시계탑 위에는 벌써 인민군의 인공기가 떠 있었습니다. 그래서 뭐 피신도 못하고 그대로 서울대학병원에 남아 있어서 인민군 부상병들을 간호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몇 달이 지나는 동안에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될 무렵에 인민군 병사들은 전부다 후송시키고 모든 병원기구를 청량리 기차역으로 나르게 한 후 마지막으로는 병원직원들 의사 간호사를 북한에 끌고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지 도망가려고 생각했는데 사방을 둘러보아야 도망할 구멍이 없었어요.

이송희 여사가 북한으로 강제 북송되던 날 청량이 역에서 극적으로 탈출하게 되고 어머니와도 만나게 된다.

이송희: 청량리역으로 갔는데 캄캄한 밤중인데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도망을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저의 친구와 같이 도망했어요. 다행히 조그마한 골목길이 있더라고요. 그 속에 뛰어들어가서 그 밤을 지났는데 제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어요. 어떻게든지 살려달라고!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 밤 무사히 지나고 (발견되면 총살인데) 새벽이 되었습니다. 새벽이 되어서 더는 그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 나와보니까 거리는 아주 조용했어요. 조용한 거리를 담대하게 걸어가니까 인척은 없고 인민군 병사들이 곳곳에서 총을 가지고 거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통과할 적에 어디 갔다 오느냐고 신문을 받았어요. 서울대학병원에 환자들 수송하고 모든 기계를 나르고 병원에 돌아가는 길이다 했더니 통과해 주더라고요. 통과되어서 그 당시 묵정동에 저의 언니가 살고 있었는데 저를 찾기 위해서 온 어머니가 같이 있었어요. 거기를 친구 한 명과 같이 가보니까 그 지하실에 숨어 계시더라고요. 어머니와 언니도 놀라서 지하실로 들어오라고 그 지하실에 숨어 있는데 총소리가 나기 시작해요. 총소리가 나니까 거기 더는 있을 수가 없어 뛰쳐나오니까 총알이 날아오는데 거기에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거기서 이불을 가지고 나와서 지금 기억에 충현교회가 있던 자리인데 공터가 있어서 그 밤을 지냈습니다. 그 밤을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니까 B29가 날라오더라고요. 저는 B29를 볼 때 아주 기뻤어요. 그래서 이불을 들치고 하늘을 쳐다보고 좋아서 환성을 지르니까 저의 어머니가 이불 뒤집어쓰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어요. 거기서 하루인가 이틀 밤을 지났어요. 그랬더니 인민군들은 전부 후퇴하는데 그날 밤에 서울이 불바다가 되어서 타는 그런 참담한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 밤 지난 다음에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들어왔습니다. 들어온 다음에 제가 서울대학병원에 가 보니까 그날 밤 끌려갔는데 어떻게 피신을 했는지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왔더라고요. 그래서 기쁨으로 상봉한 일이 있었습니다. (미처 피신 못한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대로 끌려가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급기야 국군간호장교에 지망해 훈련을 받고 마산에 육군병원에 배치된다. 이 병원에서 많은 동상환자를 치료했다고 증언한다.

이송희: 제가 배치된 곳은 수술실이었습니다. 수술실에서 많이 본 것은 그해 겨울에 군에 방한준비가 되지 않아서 동상환자가 많이 들어 왔어요. 그래서 발가락이 썩고 발이 썩고 다리가 썩고 해서 발가락 절단, 발 절단, 다리를 자르는 모습을 참 많이 봤는데 얼마나 아파하는지 울고 소리를 지르는데 저희 같이 울었어요. 너무너무 상태가 안타깝고 가엽고요. 특별히 이런 수술 중에는 수혈이 많이 필요했거든요. 수혈을 하는 동안에 계속해서 혈액 병이 계속해서 들어 오는 거예요. 보니까 미국 국민이 헌혈한 수혈병이 비행기로 날라오는 광경을 봤을 때 참 미국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그때 느꼈고, 그 의약품들이 참 많이 들어 왔어요.

이송희 여사의 공부 열정은 대단하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틈틈이 영어 공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리고 미국 연수 프로그램에도 참가한다.

이송희: 저는 군 복무 기간에 틈틈이 영어 공부를 계속했는데 3위 일체라는 영어책이 있었어요. 그 책을 가지고 독학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군에서 미국에 연수를 보내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 시험에 합격해서 1953년에 Texas의 Brooke Army Medical Center에 가서 약 4개월간 교육과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Medical Center의 큰 병원인데 거기 중앙공급 실에 많은 시설들을 견학한 것이 그 후에 서울대학교병원에 돌아와서 병원근무를 할 때 행정의 중앙 화라든지, 중앙공급 실의 신설과 운영 등 병원을 재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Brooke Army Medical Center에서 훈련을 받은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마산에 있는 군의 학교에 배치가 되어서 간호사관후보생들을 가르치는 교관생활을 했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휴전 이후 서울대학교 재건복구를 위해 1년 동안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간호행정과 간호교육의 기회를 갖게 된다.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송희: 휴전이 되자 그때 마침 서울대학교에서는 Minnesota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ICA)의 원조를 받아 서울대학교 재건복구사업을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의대, 공대, 수의대, 농대의 교환교수 프로그램이 있었고 간호학교는 의과대학에 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 프로그램으로 1956년에 미네소타대학으로 유학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래서 군에서 전역하고 교수들과 같이 3개월간 영어공부를 하고 대사관 시험을 거쳐서 Minnesota 대학에 유학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1년 동안 간호행정과 간호교육을 연구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서울대학병원에서 6년간 간호과장으로서 일했습니다. 이 시기에 간호행정체제를 새로이 수립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서울대학교병원에 있을 때에는 대한간호협회 중앙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조직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간호사들의 권익옹호, 처우개선을 위해 힘을 썼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서울대학병원의 근무를 마치고 대한간호협회 일도 맡아 봉사하고 특별히 미국과 뉴질랜드의 교환간호사 프로그램도 개발했단다.

이송희: 서울대학교에서 물러나서 2년 동안 대한간호협회 사무총장직을 맡았습니다. 그 2년동안에 대한간호지 발행, 미국과 New Zealand 교환간호사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미국과 뉴질랜드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때에 새로이 국가고시 제도가 생겨서 시험문제집을 발행하고 의료법개정에 의한 간호사 등록 제도를 시행하고, 한국 최초로 간호사 실태조사와 통계작성 등 많은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625전쟁 당시 백의의 천사로 부상군인들과 함께한 이송희 여사의 도전 삶의 현장 1부를 함께했다. 다음 시간에는 세계기독간호재단의 이야기로 엮는 2부를 방송한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