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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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진출한 한인 간호사들의 역사는 대략 50년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지면서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인 간호사들은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세계 어디서나 큰 호평을 받고 있다. 바로, 백의민족의 후손답게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백의의 천사들이기에 전 세계사람들로부터 한인 간호사들이 더욱 사랑과 존경받는 것이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어두운 곳에 빛이 되는 세계기독간호재단을 만들어 봉사자의 길에 나선 이송희 여사의 도전 삶의 현장 2부를 함께한다.
이송희 여사는 1975년에 자녀의 교육을 위해 미국 이민 길에 오르게 된다. 이 여사는 자신이 믿는 신앙으로 두려움 없이 이민 길에 나섰다며, 당시는 상당이 취직하기 어려운 시기에도 전화 한 통화로 취직이 되어 미국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회고한다.
이송희: 교회 목사였던 남편의 별세 후였기 때문에 혼자서 아이 셋을 데리고 이민을 갔습니다. 장남은 14살, 장녀는 11살, 차녀는 4살이었어요. 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두려움 없이 이민을 갈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는 전화 한통으로 취직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취직이 된 후 정식직원(FULL TIME)으로 근무하면서 아이들 뒷바라지, 모든 살림을 다 해야 했기 때문에, 또 간호사(RN) 면허시험도 봐야 하므로 하루에 2-3시간밖에는 잘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어떻게 자녀를 교육 시켰느냐고 질문하면 대답할 말이 없단다. 얼마나 바삐 살았는지 그저 ‘믿음을 심어준’ 것밖에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훌륭한 미국의 인재로 세 자녀를 키워냈다.
이송희: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라는 말이 전부입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2년 만에 마치고 Yale 대학에 입학하였고, Yale 대학을 4년 만에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UC San Diego 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현재는 Ohio의 한 Medical Center의 Associate Vice President로 일하고 있습니다. 큰사위는 버클리대학과 버클리법대와 신학대학을 졸업, 현재 부부가 같이 목회하고 있고, 둘째 사위도 버클리대학을 졸업, 스탠포드대학 교육대학원을 마치고 신학교에서 부부가 같이 신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송희 여사에게 미국 이민생활에 얼마나 고생하셨느냐고 여쭤 받다. 이 여사는 기쁨으로 일했다고 설명해준다.
이송희: 저는 어려움이 많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좀 시간이 바빠서 그렇지! 항상 기쁜 마음으로 일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행정적인 일을 많이 했는데 미국에서는 환자를 직접 돌보는 일을 했는데 정성껏 환자를 돌보고 기쁨으로 했기 때문에 저는 고생을 했다는 그런 생각을 별로 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송희 여사가 본격적인 봉사의 길에 선 것은 1997년 은퇴한 후였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과 북한에서는 같은 동족이지만 어려움을 겪는다는 뉴스를 듣고 무엇인가 해외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봉사할 것을 다짐하고 개인적인 도움을 시작으로 1998년 4월에 세계기독간호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이송희: 한국에는 IMF 자금 지원을 받는 어려움이 오고 가정들이 파산되는 등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부담을 갖게 되더라고요. 우리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됐는가? 어떻게 좀 도와야 할까? 거기다가 북한동포들이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렸을 때 여기저기서 북한을 돕는 일들을 하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도 듣고 해서 개인적으로 도왔지만, 제가 과거에 한국의 간호협회를 중심으로 해서 조직적인 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고 그때는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힘을 합쳐서 도와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저는 그 당시에 북가주에 살았는데 한국에서 간호계의 지도급에 있던 분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 제가 LA에 내려가서 1998년 4월에 세계기독간호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이송희 회장은 세계기독간호재단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변과학기술대학의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그리고 저희가 북한을 어떻게 도울까도 생각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해 어떤 일을 할까 생각 끝에 연변과학기술대학 내에 간호대학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은다.
이송희: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앞으로 동북아시대와 통일시대를 대비한 일꾼들을 키운다고 했기 때문에 저도 당장 북한을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통일시대를 대비해서 우리도 연변과학기술대학 내에 간호대학을 세워서 간호 지도자로 하여금 북한동포를 돕는 것을 생각했는데, 그 당시 1998년 4월이었는데 때마침 한국의 IMF가 왔기 때문에 김진경 총장님이 후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남가주에서 처음으로 후원의 밤을 가졌어요. 그래서 후원의 밤 행사에 참여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 대표 몇 사람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김진경 총장께 우리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북한동포를 위해서 연변에 과학기술대학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벌써 자기도 그런 생각을 했노라고 그래요.
이송희 여사는 1998년 7월 연변과학기술대학을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공동합의서에 서명하고 본격적인 일을 서두르게 된다.
이송희: 과연 우리가 연변과기대 내에 간호대학을 세울 수 있겠는가? 타당성 가능성 이런 것을 진단하기 위해서 7월 21일에 연변에 간 것입니다. 학교도 둘러보고 교수들도 만나본 뒤에 제 마음속에 온 김에 연변과학기술대학 총장과 세계기독간호재단이 공동 합의서를 만들고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공동합의서를 작성해보라고 해서 작성했습니다. 7월 27일 공동합의서에 서명하고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간호대학착공에 앞서 1999년에 건강센터를 열어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송희: 간호대학을 세우는 데는 여러 가지 절차가 있는데 교수와 학생들 한 2천 명이 있는 데 건강센터가 없어요. 그래서 1차로 쉬운 건강센터부터 시작해야겠다. 그렇게 합의를 봤습니다. 10개월 후에 다시 가서 건강센터를 열어서 미국에서 내과 전문의 한 분과 간호사 두 사람 한 사람은 간호대학설립을 위한 준비위원 등 네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5월 20일에 건강센터를 열었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한국과 미국의 회원들이 모금한 30만 달러로 기공식을 가질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해준다.
이송희: 저희는 처음 돈도 없이 시작한 단체이기 때문에 간호대학을 설립한 생각을 못했는데 건강센터를 열고 돌아와서 이사회에서 간호대학을 짓자고해서 2백만 달러 예산으로 1백만 달러는 건물을 짓는 데 쓰기로 하고 내년에 기공식을 하자고 그리고 30만 달러를 가지고 가서 기공식 하자고 했더니 돈 30만 달러 어디서 놨느냐고 그래서 돈은 하나님이 주실 것이니까? 기도하고 시작하자고 그래 진짜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2000년 그다음 해에 30만 달러를 가지고 가서 기공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건물만 100만 달러 드려서 2년 3개월 만에 완공할 수 있었어요.
이송희 여사의 배짱은 두둑했다. 2002년 9월에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준공하고 빠듯한 살림살이를 하는 가운데 2003년에 캄보디아를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벽촌에 기적의 봉사를 하게 된다.
이송희: 한인 1.5세가 캄보디아에 나병환자촌 미감 아동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착공식에 참석했어요. 거기서 은혜를 받고 이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건강문제이니까 건강센터를 지어서 보건교사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왔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순탄하게 일을 진행해 주셔서 그다음 해에 가서 캄보디아 깜뽕짬에 무의촌 건강센터를 세우는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서 1년 만에 준공을 했는데 기공식을 할 때는 이미 은혜를 받은 한 사람은 의사고 한 사람은 간호사인데 자기들이 건강센터를 짓기 위해서 각각 만 불씩을 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처녀 때부터 교회당을 짓는 게 소원이었다고 해서 5천 달러를 내서 쉽게 일 년 만에 준공해 지금까지 선교사를 보내고 건강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송희 여사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캄보디아 씨하누크빌에 기독교대학을 세워 7명의 졸업생이 한국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단다.
이송희: 건강센터 준공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캄보디아에 씨하누크빌이라는 항구가 있는데 거기에 앞으로 간호대학을 세우는데 참석을 바라서 라이프대학(Life Univ.)에 들렸습니다. 기독교대학으로 신학대학을 시작했더라고요. 사회주의 국가인데 밤중에 도착했는데 높이 십자가가 달린 것을 봤을 때 여기도 우리가 도와야겠구나! 그래서 돌아온 후에 다음에 가서 간호대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올해에 첫 졸업생이 나오는 해이고 첫 졸업생을 한국에 데려다가 7명이 대학원을 시작 했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올해로 연변에 간호대학에는 7회 졸업생이 나왔다고 한다. 이 여사는 졸업생들을 한국에 데려와 연수시키는 등 동북아 시대를 맞아 훌륭한 인재로 키워내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송희: 연변에는 올해에 7회 졸업생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간호대학을 세운 지 내년이면 10주년이 되거든요. 사실 연변지역 우리 조선족들이 학위를 가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첫 번째 간호대학을 시작하면서 지도자들을 데려다가 저녁에 야간부를 설치해서 21명의 학사학위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을 서울대학에 데려다가 학사 대학원 교육을 시키고 그다음에 졸업생 중 세 사람을 한국에 데려다가 대학원 교육을 했습니다. 우리가 신입생을 뽑을 때 영어를 하는 고등학생을 뽑았어요. 그래서 영어 중국어 한국어 등 3개국어를 할 수 있게끔 교육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 현재 중국에서 좋은 대학과 병원에 취직됐고, 처음으로 올해에 중국국가고시를 봤는데 100%가 합격을 했어요. 그래서 어디 가나 3개국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 졸업생 중에서 이미 한국에 와서 외국 환자를 진료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요. 취업이 100% 되고 있고 의료기관 아닌 데서도 우리 졸업생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서울에 와서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10명이 있습니다. 이 학생들이 졸업하면 중국이나 앞으로 동북아시아와 문만 열리면 북한에 가서 일할 일꾼들로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캄보디아 졸업생도 벌써 한 학생이 이화여대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데요. 올해 7명은 대학원을 졸업할 예정입니다.
이송희 여사는 통일의 한국을 위해 북한 간호사업 재건기금 모금 운동을 5년 전에 시작했다고 한다.
이송희: 5년 전에 저희는 북한 간호사업 재건기금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준비해서 문만 열리면 들어가서 간호대학을 시작하려고 그리고 사람들이 안가는 지역 어려운 지역에다 건강센터를 세우기 위해서 목표는 1천 개를 세웠습니다. 지금 기금을 모금하는 중입니다.
이송희 여사는 미국의 한인 간호사들의 자랑을 들려준다.
이송희: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된 것이 1965년이라고 하는데 1962년경부터 한국 간호사들이 미국에 많이 왔어요. 그런데 미국에 온 한국간호사들이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 자랑은 일리노이주 시카고대학에 김희자 박사님은 부총장까지 하셨거든요. 그런 교수직으로 활동하는 분들도 많고 병원에서 책임자로 일하는 분도 많고 해서 자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송희 여사는 앞으로의 계획도 들려준다.
이송희: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 기독대학 설립을 위해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스와질란드 기독대학에서 2013년에 간호대학을 세우도록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어두운 곳에 빛이 되는 세계기독간호재단을 만들어 봉사자의 길에 나선 이송희 여사의 도전 삶의 현장 2부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어두운 곳에 빛이 되는 세계기독간호재단을 만들어 봉사자의 길에 나선 이송희 여사의 도전 삶의 현장 2부를 함께한다.
이송희 여사는 1975년에 자녀의 교육을 위해 미국 이민 길에 오르게 된다. 이 여사는 자신이 믿는 신앙으로 두려움 없이 이민 길에 나섰다며, 당시는 상당이 취직하기 어려운 시기에도 전화 한 통화로 취직이 되어 미국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회고한다.
이송희: 교회 목사였던 남편의 별세 후였기 때문에 혼자서 아이 셋을 데리고 이민을 갔습니다. 장남은 14살, 장녀는 11살, 차녀는 4살이었어요. 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두려움 없이 이민을 갈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는 전화 한통으로 취직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취직이 된 후 정식직원(FULL TIME)으로 근무하면서 아이들 뒷바라지, 모든 살림을 다 해야 했기 때문에, 또 간호사(RN) 면허시험도 봐야 하므로 하루에 2-3시간밖에는 잘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어떻게 자녀를 교육 시켰느냐고 질문하면 대답할 말이 없단다. 얼마나 바삐 살았는지 그저 ‘믿음을 심어준’ 것밖에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훌륭한 미국의 인재로 세 자녀를 키워냈다.
이송희: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라는 말이 전부입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2년 만에 마치고 Yale 대학에 입학하였고, Yale 대학을 4년 만에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UC San Diego 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현재는 Ohio의 한 Medical Center의 Associate Vice President로 일하고 있습니다. 큰사위는 버클리대학과 버클리법대와 신학대학을 졸업, 현재 부부가 같이 목회하고 있고, 둘째 사위도 버클리대학을 졸업, 스탠포드대학 교육대학원을 마치고 신학교에서 부부가 같이 신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송희 여사에게 미국 이민생활에 얼마나 고생하셨느냐고 여쭤 받다. 이 여사는 기쁨으로 일했다고 설명해준다.
이송희: 저는 어려움이 많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좀 시간이 바빠서 그렇지! 항상 기쁜 마음으로 일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행정적인 일을 많이 했는데 미국에서는 환자를 직접 돌보는 일을 했는데 정성껏 환자를 돌보고 기쁨으로 했기 때문에 저는 고생을 했다는 그런 생각을 별로 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송희 여사가 본격적인 봉사의 길에 선 것은 1997년 은퇴한 후였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과 북한에서는 같은 동족이지만 어려움을 겪는다는 뉴스를 듣고 무엇인가 해외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봉사할 것을 다짐하고 개인적인 도움을 시작으로 1998년 4월에 세계기독간호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이송희: 한국에는 IMF 자금 지원을 받는 어려움이 오고 가정들이 파산되는 등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부담을 갖게 되더라고요. 우리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됐는가? 어떻게 좀 도와야 할까? 거기다가 북한동포들이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렸을 때 여기저기서 북한을 돕는 일들을 하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도 듣고 해서 개인적으로 도왔지만, 제가 과거에 한국의 간호협회를 중심으로 해서 조직적인 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고 그때는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힘을 합쳐서 도와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저는 그 당시에 북가주에 살았는데 한국에서 간호계의 지도급에 있던 분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 제가 LA에 내려가서 1998년 4월에 세계기독간호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이송희 회장은 세계기독간호재단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변과학기술대학의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그리고 저희가 북한을 어떻게 도울까도 생각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해 어떤 일을 할까 생각 끝에 연변과학기술대학 내에 간호대학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은다.
이송희: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앞으로 동북아시대와 통일시대를 대비한 일꾼들을 키운다고 했기 때문에 저도 당장 북한을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통일시대를 대비해서 우리도 연변과학기술대학 내에 간호대학을 세워서 간호 지도자로 하여금 북한동포를 돕는 것을 생각했는데, 그 당시 1998년 4월이었는데 때마침 한국의 IMF가 왔기 때문에 김진경 총장님이 후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남가주에서 처음으로 후원의 밤을 가졌어요. 그래서 후원의 밤 행사에 참여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 대표 몇 사람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김진경 총장께 우리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북한동포를 위해서 연변에 과학기술대학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벌써 자기도 그런 생각을 했노라고 그래요.
이송희 여사는 1998년 7월 연변과학기술대학을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공동합의서에 서명하고 본격적인 일을 서두르게 된다.
이송희: 과연 우리가 연변과기대 내에 간호대학을 세울 수 있겠는가? 타당성 가능성 이런 것을 진단하기 위해서 7월 21일에 연변에 간 것입니다. 학교도 둘러보고 교수들도 만나본 뒤에 제 마음속에 온 김에 연변과학기술대학 총장과 세계기독간호재단이 공동 합의서를 만들고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공동합의서를 작성해보라고 해서 작성했습니다. 7월 27일 공동합의서에 서명하고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간호대학착공에 앞서 1999년에 건강센터를 열어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송희: 간호대학을 세우는 데는 여러 가지 절차가 있는데 교수와 학생들 한 2천 명이 있는 데 건강센터가 없어요. 그래서 1차로 쉬운 건강센터부터 시작해야겠다. 그렇게 합의를 봤습니다. 10개월 후에 다시 가서 건강센터를 열어서 미국에서 내과 전문의 한 분과 간호사 두 사람 한 사람은 간호대학설립을 위한 준비위원 등 네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5월 20일에 건강센터를 열었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한국과 미국의 회원들이 모금한 30만 달러로 기공식을 가질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해준다.
이송희: 저희는 처음 돈도 없이 시작한 단체이기 때문에 간호대학을 설립한 생각을 못했는데 건강센터를 열고 돌아와서 이사회에서 간호대학을 짓자고해서 2백만 달러 예산으로 1백만 달러는 건물을 짓는 데 쓰기로 하고 내년에 기공식을 하자고 그리고 30만 달러를 가지고 가서 기공식 하자고 했더니 돈 30만 달러 어디서 놨느냐고 그래서 돈은 하나님이 주실 것이니까? 기도하고 시작하자고 그래 진짜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2000년 그다음 해에 30만 달러를 가지고 가서 기공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건물만 100만 달러 드려서 2년 3개월 만에 완공할 수 있었어요.
이송희 여사의 배짱은 두둑했다. 2002년 9월에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준공하고 빠듯한 살림살이를 하는 가운데 2003년에 캄보디아를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벽촌에 기적의 봉사를 하게 된다.
이송희: 한인 1.5세가 캄보디아에 나병환자촌 미감 아동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착공식에 참석했어요. 거기서 은혜를 받고 이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건강문제이니까 건강센터를 지어서 보건교사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왔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순탄하게 일을 진행해 주셔서 그다음 해에 가서 캄보디아 깜뽕짬에 무의촌 건강센터를 세우는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서 1년 만에 준공을 했는데 기공식을 할 때는 이미 은혜를 받은 한 사람은 의사고 한 사람은 간호사인데 자기들이 건강센터를 짓기 위해서 각각 만 불씩을 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처녀 때부터 교회당을 짓는 게 소원이었다고 해서 5천 달러를 내서 쉽게 일 년 만에 준공해 지금까지 선교사를 보내고 건강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송희 여사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캄보디아 씨하누크빌에 기독교대학을 세워 7명의 졸업생이 한국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단다.
이송희: 건강센터 준공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캄보디아에 씨하누크빌이라는 항구가 있는데 거기에 앞으로 간호대학을 세우는데 참석을 바라서 라이프대학(Life Univ.)에 들렸습니다. 기독교대학으로 신학대학을 시작했더라고요. 사회주의 국가인데 밤중에 도착했는데 높이 십자가가 달린 것을 봤을 때 여기도 우리가 도와야겠구나! 그래서 돌아온 후에 다음에 가서 간호대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올해에 첫 졸업생이 나오는 해이고 첫 졸업생을 한국에 데려다가 7명이 대학원을 시작 했습니다.
이송희 여사는 올해로 연변에 간호대학에는 7회 졸업생이 나왔다고 한다. 이 여사는 졸업생들을 한국에 데려와 연수시키는 등 동북아 시대를 맞아 훌륭한 인재로 키워내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송희: 연변에는 올해에 7회 졸업생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간호대학을 세운 지 내년이면 10주년이 되거든요. 사실 연변지역 우리 조선족들이 학위를 가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첫 번째 간호대학을 시작하면서 지도자들을 데려다가 저녁에 야간부를 설치해서 21명의 학사학위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을 서울대학에 데려다가 학사 대학원 교육을 시키고 그다음에 졸업생 중 세 사람을 한국에 데려다가 대학원 교육을 했습니다. 우리가 신입생을 뽑을 때 영어를 하는 고등학생을 뽑았어요. 그래서 영어 중국어 한국어 등 3개국어를 할 수 있게끔 교육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 현재 중국에서 좋은 대학과 병원에 취직됐고, 처음으로 올해에 중국국가고시를 봤는데 100%가 합격을 했어요. 그래서 어디 가나 3개국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 졸업생 중에서 이미 한국에 와서 외국 환자를 진료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요. 취업이 100% 되고 있고 의료기관 아닌 데서도 우리 졸업생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서울에 와서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10명이 있습니다. 이 학생들이 졸업하면 중국이나 앞으로 동북아시아와 문만 열리면 북한에 가서 일할 일꾼들로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캄보디아 졸업생도 벌써 한 학생이 이화여대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데요. 올해 7명은 대학원을 졸업할 예정입니다.
이송희 여사는 통일의 한국을 위해 북한 간호사업 재건기금 모금 운동을 5년 전에 시작했다고 한다.
이송희: 5년 전에 저희는 북한 간호사업 재건기금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준비해서 문만 열리면 들어가서 간호대학을 시작하려고 그리고 사람들이 안가는 지역 어려운 지역에다 건강센터를 세우기 위해서 목표는 1천 개를 세웠습니다. 지금 기금을 모금하는 중입니다.
이송희 여사는 미국의 한인 간호사들의 자랑을 들려준다.
이송희: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된 것이 1965년이라고 하는데 1962년경부터 한국 간호사들이 미국에 많이 왔어요. 그런데 미국에 온 한국간호사들이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 자랑은 일리노이주 시카고대학에 김희자 박사님은 부총장까지 하셨거든요. 그런 교수직으로 활동하는 분들도 많고 병원에서 책임자로 일하는 분도 많고 해서 자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송희 여사는 앞으로의 계획도 들려준다.
이송희: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 기독대학 설립을 위해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스와질란드 기독대학에서 2013년에 간호대학을 세우도록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어두운 곳에 빛이 되는 세계기독간호재단을 만들어 봉사자의 길에 나선 이송희 여사의 도전 삶의 현장 2부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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