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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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5
성경에 ‘젊은이는 비전, 즉 환상을 보라’는 말씀이 있다. 한국 젊은이에게 꿈의 비전을 주는 억척 삶의 이야기가 담긴 책 ‘2등 해서 서러운 사람들’ ‘남이 안 하는 거 해봐’가 출간되어 화제다. 바로 책의 저자는 미국 워싱턴의 전종준 변호사다. 2등의 길목에서 서성이다 마지막 결승점에서 성공한 이야기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학창시절 쓰라린 패배를 딛고 일어서 워싱턴 로펌 대표로 꿈을 이룬 ‘전종준 변호사의 삶의 역정 2부’ ‘꿈은 이루어진다.’를 함께한다.
전종준 씨의 삶에는 슬픈 이야기가 많다. 삶의 길목에 쓰라린 낙방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슬픔 뒤에는 기쁨도 오는 법이다. 미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것은 부모의 지극한 사랑과 자기가 믿는 신앙의 열매라고 설명해 준다.
전종준 씨는 연방 정부에 취업을 신청하고 기다리는 동안 잠시 변호사로 일할 때 전철요금도 아꼈다는 일화나, 5달러가 넘지 않는 점심을 먹던 초창기의 변호사 시절의 경험은 한인 젊은이의 근면함을 바라보는 듯하다.
전종준: 제가 연방정부에 취직하고 싶었는데 왜냐하면 제가 국제법을 공부했으니까? 취직이 곧 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1차 2차 3차 인터뷰를 해야 하고, 신원 조회하는 데 1년 걸리고, 한 2-3년은 기다려야 취직이 되겠더라고요. 그래 이러다가는 처, 자식을 굶겨 죽이겠더라고요. 신청했지만, 금방 답이 오질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족 생계를 위해서 제가 아는 미국 변호사 사무실의 조그마한 방 하나를 빌려 변호사 업무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때는 돈이 없으니까? DC에 출퇴근할 때 지하철을 타는데 9시 30분이 넘으면 NON RUSH HOUR(지하철 이용시 바쁜 출퇴근 시간이 지난 시간) 라고 해서 60센트를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하철역에서 9시 30분까지 기다렸다가 출근해 60센트를 절약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은 컵라면도 많이 먹었고,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는 5달러가 넘지 않도록 점심을 먹으면서 초창기 변호사 시절을 지냈습니다.
전종준 씨는 2등 인생을 졸업하고, 초창기 변호사 시절의 어려움에도 꿋꿋하게 미래를 개척해간다. 전 씨는 한국 최초 ‘이민법 책’ 저자가 됐다는데 어떤 일이 있었을까?
전종준: 그 당시는 의뢰인이 별로 없는데 어느 날 워싱턴에 한 주간지에서 이민 기사를 써주면 5단 광고를 무료로 해 주겠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기꺼이 쓰겠노라고, 그래서 이민법 칼럼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년 정도 되니까? 이게 책이 되겠다 싶어 그걸 엮어 한국에 가서 책을 발행했습니다. 그게 바로 ‘알기 쉬운 새 이민법’이라고 1994년도에 발행했는데 그게 최초의 이민법 책이 됐습니다. 저는 그때 최초인지도 모르고 책을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책 발행으로 얻어진 금액을 전액 기증해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전종준 씨는 한때 위암 진단을 받고 슬픔의 눈물을 흘렸는가 하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자녀의 손톱을 깎아 줬다는 얘기는 한인들의 자녀사랑 표상인 것 같다.
전종준: 제가 변호사로 일하며 또 책을 쓰면서 신경을 쓰다 보니까? 유학시절 아팠던 위가 계속 쓰려서 한번은 의사를 찾았는데 위 사진을 찍어보라고 해서 위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에 점이 나와 있더래요. 그러면서 의사가 아마 위암일지 모르겠다. 내시경을 해봐라.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위암이라는 말을 듣는데 청천벽력 같더라고요. 왜 우리 살만하면 죽는다는 말이 이런 말이구나 그래 제가 젊었을 때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면서 달려갔던 것을 후회해도 이제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면서 창문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줄줄 흐르고 집에 와서 아이들 손톱을 다 깎아주고 이제는 내가 너희 손톱을 못 깎아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에게 매달려보자 해서 기도하고 내시경 검사를 했습니다. 내시경 결과 다행히도 위암이 아니고 위에서 산이 많이 나와서 위산 과다 증세로 위벽이 헐었다고 약을 처방해서 약을 먹고 그리고 제 나름대로 민간요법으로 해서 지금은 잘 관리를 하고 있는데 지금도 조심하고 있습니다.
전종준 씨는 바쁜 중에도 10여 권의 책을 썼다. 남보다 일찍 출근해서 맑은 정신에 자신이 원하는 책들을 썼다고 말한다.
전종준: 저는 모두 10권의 책을 발행했는데요. 9권은 이민법과 관련된 책과 에세이 책이고, 앞으로 두 달이나 3달 있으면 최신판 이민법 책이 발행됩니다. 일본판 이민법이 다 됐는데 현재 일본의 사정으로 출판을 못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말 있잖아요. 바쁠 때 일을 더 많이 한다. 제가 바쁠 때 오히려 더 책을 많이 썼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침 일찍 사무실에 와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주말에도 책을 쓰고 지금은 글을 쓰는 것이 거의 한 20여 년 동안 습관화돼서 오히려 글을 안 쓰면 심심하고 답답할 정도로 습관적으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전종준 변호사에게는 혼혈인 대부라는 별명이 붙어 다니는데 어떻게 혼혈인에 관심을 가졌는지 물어봤다.
전종준: 어느 날 우연히 신문 논평에서 한국의 혼혈인들이 50% 이상 자살 경험이 있고, 직장도 못 갖고 결혼도 못하고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제 아이들이 혼혈인이기 때문에 제 아이들이 한국에 있었다면 저런 시련을 겪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7번째 책을 한국의 하이 패밀리의 송길원 목사님께 전액 기증해서 혼혈인 운동을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송길원 목사께서 한국의 인권위원회에 혼혈인 문제로 제소도 하고 군대에 못 가던 혼혈인들에게 본인 선택에 의해 군에도 가도록 시정되고 또 혼혈인 대신에 ‘다문화 가족’이란 신종어가 탄생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다문화 가족에 관해 한국에서 여기까지 진행됐지만 더는 진척이 없어서 미국에서도 활동해야겠다고 해서 2004년 4월에 미국 의회 에반스 의원을 통해서 혼혈인 법안을 미국 의회에 상정해서 혼혈인에게 자동 시민권을 주자라는 법안을 제출하게 됩니다. 그 업적을 통해서 한국 국회 초청으로 2006년 2월에 한국을 방문하는데 그때만 해도 혼혈인에 대해서 별로 한국에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한국 국회 방문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오고 약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하인즈 워드가 슈퍼볼 MVP(미식축구 최우수선수)가 되니까? 한국의 모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혼혈인에 대한 인식도 바꿨고, 그 덕분의 우리 혼혈인 이슈가 더 크게 돼서 잘 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의회에 상정했던 혼혈인 법안이 아직도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행할 생각입니다.
전종준 변호사는 미국에 난민으로 들어온 탈북자 중 첫 탈북자 영주권 취득을 도왔다. 그가 도운 탈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종준: 어느 날 탈북자가 찾아와서 영주권 신청을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탈북자가 중국에서 태국으로 갈 때 메콩 강을 건너는데 보통 태국 수비대를 피해서 밤에 몰래 건너야 하는데 그날은 부로커, 중개인이 약속 때문에 낮에 무조건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메콩 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하늘이 시커머 지면서 폭우가 쏟아지고 하늘이 깜깜해지더래요. 그러니까 수비대들이 전부 초소에 없었고, 메콩 강을 건너니까 다시 하늘이 맑아지면서 환해지더라는 거예요. 탈북자로부터 이런 간증을 듣고 저도 감동 받아서 이분들을 도와줘야겠구나! 그래서 제가 무료로 변론해서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2008년도인데 2008년 9월 30일 날 북한인권법이 만기가 돼서 연장되느냐 안 되느냐고 고민할 때인데 영주권 받은 게 9월 15일경 됩니다. 그때 한국의 모든 언론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했는데 이 보도 때문에 저는 나름대로 북한 인권법이 세계적인 이목을 받아서 연장된 좋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북한인권법이 연장되고 최근에는 중국에서 온 탈북자가 찾아왔습니다. 태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탈북한 사람이 왔는데 그것도 유일한 경우로 제가 맡게 되어서 무료 변론해 줘 그분도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제가 탈북자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태국으로 오는 것은 너무 힘들고 중국에서 오면 참 바람직한데 유엔에서 좀 더 탈북자의 미국 입국을 계속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인권법이 그림의 떡이 되기가 쉬우니까? 이런 의미에서 좀 더 연구하고 탈북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전종준 변호사에게 이렇게 인권 운동을 하면 돈을 벌지 못하는데 돈 버는 것에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법의 목적에 따라 함께 나눔의 삶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전종준: 아니지요. 관심이 있지요. 그렇지만 법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도움이 필요하고 저의 도움으로 인해서 그 사람이 살 수 있다면 저는 어느 정도 먹고사는 여유가 있으니까? 같이 나누는 것이 저는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는 것이 받는 거로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영어 때문에 사법고시에 떨어지고 2등 인생의 역경을 딛고, 미국에서 영어로 변호하는 변호사가 됐는데, 앞으로 변호사를 지망하는 한인 젊은이에게 주는 말이다.
전종준: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사랑해라! 이런 게 아니고 DO NOT BE AFRAID(두려워 하지 말아라)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도전을 두려워 말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영어 때문에 사법고시 떨어진 저도 포기하지 않고 영어 극복해서 LAW SCHOOL(법률대학원)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는데 여러분은 저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LAW SCHOOL 졸업해서 변호사만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변호사도 다른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변호사 출신이요. 클린턴 전 대통령도 변호사 출신으로 정계나 경제계나 모든 영역에 나가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수많은 일이 있으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한 여러분도 변호사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전종준 변호사는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달고 다니는데, 최초의 일에 무엇이든 관심을 갖는지 물어봤다.
전종준: ‘최초는 최고가 아닙니다.’ 그러나 최고는 아무나 할 수 없으나 최선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할 때 남이 하지 않는 최초를 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비록 2등이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추진한다면 여러분이 최초로 할 수 있고 그래서 여러분이 개척자 정신으로 이 세상을 더욱더 성숙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종준 변호사는 이민은 매국이 아니라 애국이라고 말한다. 한국도 이제는 젊은이들이 해외로 눈을 돌릴 때라고 설명한다.
전종준: 지금 한국의 가장 큰 문제가 저출산, 과잉경제, 취업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밖으로 눈을 돌리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구가 많아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아스포라(흩어진 백성)가 있듯이 이제는 한국이 밖으로 나가 흩어 모여 할 때가 됐습니다. 한국인과 유대인을 비교할 때 한국인은 유대인처럼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똑똑하지만, 한가지 뒤진 것이 하나 있다면은 유대인은 인구 3분의 2가 해외 나가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인은 10분의 1만 지금 해외에 나가 있는데 우리가 지금 해외로 돌리는 것이 글로벌(지구촌) 시대에 세계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종준 변호사는 남이 안 하는 것을 할 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전종준: 우리가 보통 아이들이 공부 안 하면 야! 공부해서 남 주느냐! 그러는데 이제는 그래 공부해서 남 줘라, 그럴 때가 됐습니다.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제한된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함으로써 남의 행복을 추구할 때 그 안에 진정한 나의 행복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될 때 우리는 자랑스러운 세계 속의 한국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이 안 하는 것은 멀리서 찾지 마시고 바로 내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약점이 나의 단점이 곧 나의 강점으로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시고 그것을 통해서 남이 안 하는 것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 자식들이 혼혈인이기 때문에 제가 혼혈인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저의 부끄러움이 저의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전종준 씨가 자신의 아들에게 주는 이야기다.
전종준: 아들아! 아빠가 살다 보니까? 반대말은 없더라. 불행은 행복의 시작이요.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더라. 그리고 오늘에 충실하라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나 잘못된 연속이 아니고 오늘은 내일의 연장이나 내일일을 염려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거라 숨 쉬는 것도 감사하고 기댈 가족이 있는 것을 감사해라! 하나가 있어도 감사하고 열이 있어도 감사하고 하나를 잃어도 감사하고 열을 잃어도 감사하고 진정한 감사를 통해 참 의미를 발견하거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라! 그리고 힘이 없으면 흠이 된다. 힘을 키우고 그것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덕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최선을 다하며 플러스 알파를 해라! 상사가 하나를 시키면 둘까지 할 수 있는 성의 있는 고용인이 되어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해라! 아빠를 지키셨던 하나님이 너를 지키실 것을 나는 안다. 사랑한다. 아들아!
전종준 씨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육신적인 부모의 사랑과 자기가 믿는 신이 최대의 선물이었다고 회고한다.
전종준: 두 부모님과 하나님의 사랑은 지각하는 것같이 느껴졌지만, 항상 나에게는 최고의, 최대의 선물을 주는 시간이었다고 지금 깨닫고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학창시절 쓰라린 패배를 딛고 일어서 워싱턴 로펌 대표로 꿈을 이룬 ‘전종준 변호사의 삶의 역정 2부’ ‘꿈은 이루어진다.’를 함께했다.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학창시절 쓰라린 패배를 딛고 일어서 워싱턴 로펌 대표로 꿈을 이룬 ‘전종준 변호사의 삶의 역정 2부’ ‘꿈은 이루어진다.’를 함께한다.
전종준 씨의 삶에는 슬픈 이야기가 많다. 삶의 길목에 쓰라린 낙방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슬픔 뒤에는 기쁨도 오는 법이다. 미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것은 부모의 지극한 사랑과 자기가 믿는 신앙의 열매라고 설명해 준다.
전종준 씨는 연방 정부에 취업을 신청하고 기다리는 동안 잠시 변호사로 일할 때 전철요금도 아꼈다는 일화나, 5달러가 넘지 않는 점심을 먹던 초창기의 변호사 시절의 경험은 한인 젊은이의 근면함을 바라보는 듯하다.
전종준: 제가 연방정부에 취직하고 싶었는데 왜냐하면 제가 국제법을 공부했으니까? 취직이 곧 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1차 2차 3차 인터뷰를 해야 하고, 신원 조회하는 데 1년 걸리고, 한 2-3년은 기다려야 취직이 되겠더라고요. 그래 이러다가는 처, 자식을 굶겨 죽이겠더라고요. 신청했지만, 금방 답이 오질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족 생계를 위해서 제가 아는 미국 변호사 사무실의 조그마한 방 하나를 빌려 변호사 업무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때는 돈이 없으니까? DC에 출퇴근할 때 지하철을 타는데 9시 30분이 넘으면 NON RUSH HOUR(지하철 이용시 바쁜 출퇴근 시간이 지난 시간) 라고 해서 60센트를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하철역에서 9시 30분까지 기다렸다가 출근해 60센트를 절약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은 컵라면도 많이 먹었고,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는 5달러가 넘지 않도록 점심을 먹으면서 초창기 변호사 시절을 지냈습니다.
전종준 씨는 2등 인생을 졸업하고, 초창기 변호사 시절의 어려움에도 꿋꿋하게 미래를 개척해간다. 전 씨는 한국 최초 ‘이민법 책’ 저자가 됐다는데 어떤 일이 있었을까?
전종준: 그 당시는 의뢰인이 별로 없는데 어느 날 워싱턴에 한 주간지에서 이민 기사를 써주면 5단 광고를 무료로 해 주겠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기꺼이 쓰겠노라고, 그래서 이민법 칼럼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년 정도 되니까? 이게 책이 되겠다 싶어 그걸 엮어 한국에 가서 책을 발행했습니다. 그게 바로 ‘알기 쉬운 새 이민법’이라고 1994년도에 발행했는데 그게 최초의 이민법 책이 됐습니다. 저는 그때 최초인지도 모르고 책을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책 발행으로 얻어진 금액을 전액 기증해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전종준 씨는 한때 위암 진단을 받고 슬픔의 눈물을 흘렸는가 하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자녀의 손톱을 깎아 줬다는 얘기는 한인들의 자녀사랑 표상인 것 같다.
전종준: 제가 변호사로 일하며 또 책을 쓰면서 신경을 쓰다 보니까? 유학시절 아팠던 위가 계속 쓰려서 한번은 의사를 찾았는데 위 사진을 찍어보라고 해서 위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에 점이 나와 있더래요. 그러면서 의사가 아마 위암일지 모르겠다. 내시경을 해봐라.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위암이라는 말을 듣는데 청천벽력 같더라고요. 왜 우리 살만하면 죽는다는 말이 이런 말이구나 그래 제가 젊었을 때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면서 달려갔던 것을 후회해도 이제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면서 창문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줄줄 흐르고 집에 와서 아이들 손톱을 다 깎아주고 이제는 내가 너희 손톱을 못 깎아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에게 매달려보자 해서 기도하고 내시경 검사를 했습니다. 내시경 결과 다행히도 위암이 아니고 위에서 산이 많이 나와서 위산 과다 증세로 위벽이 헐었다고 약을 처방해서 약을 먹고 그리고 제 나름대로 민간요법으로 해서 지금은 잘 관리를 하고 있는데 지금도 조심하고 있습니다.
전종준 씨는 바쁜 중에도 10여 권의 책을 썼다. 남보다 일찍 출근해서 맑은 정신에 자신이 원하는 책들을 썼다고 말한다.
전종준: 저는 모두 10권의 책을 발행했는데요. 9권은 이민법과 관련된 책과 에세이 책이고, 앞으로 두 달이나 3달 있으면 최신판 이민법 책이 발행됩니다. 일본판 이민법이 다 됐는데 현재 일본의 사정으로 출판을 못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말 있잖아요. 바쁠 때 일을 더 많이 한다. 제가 바쁠 때 오히려 더 책을 많이 썼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침 일찍 사무실에 와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주말에도 책을 쓰고 지금은 글을 쓰는 것이 거의 한 20여 년 동안 습관화돼서 오히려 글을 안 쓰면 심심하고 답답할 정도로 습관적으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전종준 변호사에게는 혼혈인 대부라는 별명이 붙어 다니는데 어떻게 혼혈인에 관심을 가졌는지 물어봤다.
전종준: 어느 날 우연히 신문 논평에서 한국의 혼혈인들이 50% 이상 자살 경험이 있고, 직장도 못 갖고 결혼도 못하고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제 아이들이 혼혈인이기 때문에 제 아이들이 한국에 있었다면 저런 시련을 겪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7번째 책을 한국의 하이 패밀리의 송길원 목사님께 전액 기증해서 혼혈인 운동을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송길원 목사께서 한국의 인권위원회에 혼혈인 문제로 제소도 하고 군대에 못 가던 혼혈인들에게 본인 선택에 의해 군에도 가도록 시정되고 또 혼혈인 대신에 ‘다문화 가족’이란 신종어가 탄생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다문화 가족에 관해 한국에서 여기까지 진행됐지만 더는 진척이 없어서 미국에서도 활동해야겠다고 해서 2004년 4월에 미국 의회 에반스 의원을 통해서 혼혈인 법안을 미국 의회에 상정해서 혼혈인에게 자동 시민권을 주자라는 법안을 제출하게 됩니다. 그 업적을 통해서 한국 국회 초청으로 2006년 2월에 한국을 방문하는데 그때만 해도 혼혈인에 대해서 별로 한국에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한국 국회 방문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오고 약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하인즈 워드가 슈퍼볼 MVP(미식축구 최우수선수)가 되니까? 한국의 모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혼혈인에 대한 인식도 바꿨고, 그 덕분의 우리 혼혈인 이슈가 더 크게 돼서 잘 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의회에 상정했던 혼혈인 법안이 아직도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행할 생각입니다.
전종준 변호사는 미국에 난민으로 들어온 탈북자 중 첫 탈북자 영주권 취득을 도왔다. 그가 도운 탈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종준: 어느 날 탈북자가 찾아와서 영주권 신청을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탈북자가 중국에서 태국으로 갈 때 메콩 강을 건너는데 보통 태국 수비대를 피해서 밤에 몰래 건너야 하는데 그날은 부로커, 중개인이 약속 때문에 낮에 무조건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메콩 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하늘이 시커머 지면서 폭우가 쏟아지고 하늘이 깜깜해지더래요. 그러니까 수비대들이 전부 초소에 없었고, 메콩 강을 건너니까 다시 하늘이 맑아지면서 환해지더라는 거예요. 탈북자로부터 이런 간증을 듣고 저도 감동 받아서 이분들을 도와줘야겠구나! 그래서 제가 무료로 변론해서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2008년도인데 2008년 9월 30일 날 북한인권법이 만기가 돼서 연장되느냐 안 되느냐고 고민할 때인데 영주권 받은 게 9월 15일경 됩니다. 그때 한국의 모든 언론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했는데 이 보도 때문에 저는 나름대로 북한 인권법이 세계적인 이목을 받아서 연장된 좋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북한인권법이 연장되고 최근에는 중국에서 온 탈북자가 찾아왔습니다. 태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탈북한 사람이 왔는데 그것도 유일한 경우로 제가 맡게 되어서 무료 변론해 줘 그분도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제가 탈북자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태국으로 오는 것은 너무 힘들고 중국에서 오면 참 바람직한데 유엔에서 좀 더 탈북자의 미국 입국을 계속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인권법이 그림의 떡이 되기가 쉬우니까? 이런 의미에서 좀 더 연구하고 탈북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전종준 변호사에게 이렇게 인권 운동을 하면 돈을 벌지 못하는데 돈 버는 것에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법의 목적에 따라 함께 나눔의 삶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전종준: 아니지요. 관심이 있지요. 그렇지만 법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도움이 필요하고 저의 도움으로 인해서 그 사람이 살 수 있다면 저는 어느 정도 먹고사는 여유가 있으니까? 같이 나누는 것이 저는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는 것이 받는 거로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영어 때문에 사법고시에 떨어지고 2등 인생의 역경을 딛고, 미국에서 영어로 변호하는 변호사가 됐는데, 앞으로 변호사를 지망하는 한인 젊은이에게 주는 말이다.
전종준: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사랑해라! 이런 게 아니고 DO NOT BE AFRAID(두려워 하지 말아라)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도전을 두려워 말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영어 때문에 사법고시 떨어진 저도 포기하지 않고 영어 극복해서 LAW SCHOOL(법률대학원)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는데 여러분은 저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LAW SCHOOL 졸업해서 변호사만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변호사도 다른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변호사 출신이요. 클린턴 전 대통령도 변호사 출신으로 정계나 경제계나 모든 영역에 나가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수많은 일이 있으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한 여러분도 변호사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전종준 변호사는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달고 다니는데, 최초의 일에 무엇이든 관심을 갖는지 물어봤다.
전종준: ‘최초는 최고가 아닙니다.’ 그러나 최고는 아무나 할 수 없으나 최선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할 때 남이 하지 않는 최초를 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비록 2등이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추진한다면 여러분이 최초로 할 수 있고 그래서 여러분이 개척자 정신으로 이 세상을 더욱더 성숙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종준 변호사는 이민은 매국이 아니라 애국이라고 말한다. 한국도 이제는 젊은이들이 해외로 눈을 돌릴 때라고 설명한다.
전종준: 지금 한국의 가장 큰 문제가 저출산, 과잉경제, 취업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밖으로 눈을 돌리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구가 많아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아스포라(흩어진 백성)가 있듯이 이제는 한국이 밖으로 나가 흩어 모여 할 때가 됐습니다. 한국인과 유대인을 비교할 때 한국인은 유대인처럼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똑똑하지만, 한가지 뒤진 것이 하나 있다면은 유대인은 인구 3분의 2가 해외 나가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인은 10분의 1만 지금 해외에 나가 있는데 우리가 지금 해외로 돌리는 것이 글로벌(지구촌) 시대에 세계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종준 변호사는 남이 안 하는 것을 할 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전종준: 우리가 보통 아이들이 공부 안 하면 야! 공부해서 남 주느냐! 그러는데 이제는 그래 공부해서 남 줘라, 그럴 때가 됐습니다.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제한된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함으로써 남의 행복을 추구할 때 그 안에 진정한 나의 행복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될 때 우리는 자랑스러운 세계 속의 한국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이 안 하는 것은 멀리서 찾지 마시고 바로 내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약점이 나의 단점이 곧 나의 강점으로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시고 그것을 통해서 남이 안 하는 것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 자식들이 혼혈인이기 때문에 제가 혼혈인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저의 부끄러움이 저의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전종준 씨가 자신의 아들에게 주는 이야기다.
전종준: 아들아! 아빠가 살다 보니까? 반대말은 없더라. 불행은 행복의 시작이요.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더라. 그리고 오늘에 충실하라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나 잘못된 연속이 아니고 오늘은 내일의 연장이나 내일일을 염려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거라 숨 쉬는 것도 감사하고 기댈 가족이 있는 것을 감사해라! 하나가 있어도 감사하고 열이 있어도 감사하고 하나를 잃어도 감사하고 열을 잃어도 감사하고 진정한 감사를 통해 참 의미를 발견하거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라! 그리고 힘이 없으면 흠이 된다. 힘을 키우고 그것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덕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최선을 다하며 플러스 알파를 해라! 상사가 하나를 시키면 둘까지 할 수 있는 성의 있는 고용인이 되어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해라! 아빠를 지키셨던 하나님이 너를 지키실 것을 나는 안다. 사랑한다. 아들아!
전종준 씨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육신적인 부모의 사랑과 자기가 믿는 신이 최대의 선물이었다고 회고한다.
전종준: 두 부모님과 하나님의 사랑은 지각하는 것같이 느껴졌지만, 항상 나에게는 최고의, 최대의 선물을 주는 시간이었다고 지금 깨닫고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학창시절 쓰라린 패배를 딛고 일어서 워싱턴 로펌 대표로 꿈을 이룬 ‘전종준 변호사의 삶의 역정 2부’ ‘꿈은 이루어진다.’를 함께했다.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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