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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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8
미국의 한인 최초의 맹인 박사, 강영우 씨는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그는 중학교 때 시력을 잃게 된 후, 견디기 어려운 실명의 고통과 사회적 편견, 차별 등을 신앙의 힘과 결연한 의지로 극복하여 세계적인 재활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강영우 박사의 성공은 이렇다. 미국 인구 12만 명 중 1명꼴로 오르는 미국 인명사전과 세계 인명사전에 약력이 수록되는 저명인사이며, 국제 로터리 세계 본부가 선정한 75명의 봉사의 촛불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세계 장애위원회 부위원장과 루스벨트 재단 고문이기도 하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고아로 시각 장애를 딛고 전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 도전 삶의 이야기 2부 ‘도전은 희망으로 꽃핀다.’를 함께한다.
수많은 고통의 아픔을 이겨낸 강영우 박사는 드디어 자신의 꿈을 펼쳐나간다. 미국 주류사회로 큰 꿈의 나래를 펼쳐가는 강 박사에게 어떻게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는지 물어봤다. 그는 부시 가의 인연은 물론, 22명의 세계 정상들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다고 얘기한다.
강영우: 두 부시 대통령과는 다른 만남인데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제가 최초로 영어로 쓴 책 A LIGHT IN MY HEART(빛은 내 가슴에)은 1987년에 존 낙스 프레스 미국 장로교 출판사가 출간했는데 그 책을 3년 후인 1990년에 저의 둘째 아들이 다니는 필립스 아카데미 교장 선생님께 선물로 드렸더니 그 책을 아버지 부시 대통령께 보내 드리면 크게 관심 두시고 읽으실 거라고 해서 그 책을 보내 드린 것이 인연이 된 겁니다. 그 책을 읽으시고 감동이 되셔서 저에게 편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날부터 오늘의 이르기까지 인연이 이어진 거고, 아들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신 다음에 12일 되던 날인 2001년 2월 1일 백악관의 첫 손님으로 장애인계 대표들을 초청했습니다. 제가 거기서 처음 만나게 된 거지요. 거기서 부시 대통령을 잠시 만났을 때 부시 대통령에게 감동을 주는 소통의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인준하는 최고 공직자에 당당히 들어가고 다시 또 재 임명받아서 8년 동안을 근무할 수 있게 됐지요. 그러니까 아버지, 아들 대통령을 다른 시기에 다른 인연으로 맺어진 겁니다. 저는 부시 대통령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세계 13개 나라 국가 정상들 22명을 만날 수 있는 그런 축복을 받았는데요.
강영우 박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받는 고위 공직자 500명 중 한 명인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차관보가 된다. 강 박사가 상원인준을 받았을 때의 추억담을 들어본다.
강영우: 재미나는 이야기는 제가 상원인준을 받기 3개월 전에 우리 둘째 아들이 딕더빈 상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상원인준 받는 게 전체 500명밖에 안 되니까? 바로 아버지가 인준 받았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공식적으로 알게 된 건 둘째 아들이거든요. 아들이 전화해서 아버지 SLOW DOWN 천천히 가시라고 DON’T RACE THE BAR 기준을 자꾸 올리지 말라고, 그건 무슨 이야기냐면 제가 그랬거든요. 너의 아버지는 두 눈도 못 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너희는 눈도 보고 영어도 모국어로 잘하니까? 아버지보다는 잘해야 하고 더 잘돼야 마땅하지 않으냐! 고 도전을 해 줬거든요. 그랬더니 아버지 이제는 천천히 가시라고, 그리고 기준을 자꾸 올리지 말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 일화입니다.
강영우 박사에게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들어본다.
강영우: 미국에 다섯 명에 한 명이 장애인이에요. 그래서 5천4백만입니다. 한국인구보다도 많지요. 장애인들과 그 가족에 대한 정책을 개발하고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게 주 임무이고, 그래서 대통령 정책이 나오는 거고 그다음에 법으로 제정되어야 할 것은 국회로 제출해서 법이 만들어지는 거지요. 그래서 미국의 장애인 민권법(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1990년 서명한 것으로 직장 내에셔 장애인 차별금지, 공공장소와 대중교통에 장애인에게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국가장애위원회가 만들어서 제출한 게 법이 된 거지요. 그래서 제가 발의해 법으로 제정된 것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911사태후에 SAVING LIFE IN PEOPLE WITH DISABILITIES를 제가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위기 시에 장애인들이 많이 희생됐잖아요. 특히 높은 데서 휠체어로 계단으로 내려올 수 없으니까? 장애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죽는 그런 것들을 예방하고 또 그런 재난 시에 장애인을 어떻게 구출하느냐 하는 그런 정책의 보고서를 낸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업적에 들어가는 거고요. 그다음에는 유니버설 디자인, 그러니까? 첨단 기술(휴대전화 ATM 기기사용 등), 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원천적으로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회사가 물품을 만들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동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나온다면 좋은 일이니까? 그것을 정책적으로 유니버설 디자인을 연구해서 개발되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정책을 제가 CHAIRMAN(의장)으로 만든 겁니다. 그런 정책들은 역사적으로도 영원히 남고 부시 대통령 센터 도서관에도 영원히 저의 이름으로 남게 됩니다.
강영우 박사는 날이 갈수록 자신의 희망을 키워 갔다. 바로 유엔 세계 장애위원회 부의장을 맡게 된 것이다. 6억 5천만 세계 장애인의 복지 향상을 위해 헌신하는 강영우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강영우: 그것은 제가 지금 들어간 게 아니고 제가 1995년부터 시작한 겁니다. 세계 장애위원회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장애인 권리협약에서 장애인 정책이나 장애인 복지의 괄목 할만한 발전을 한 나라를 선정해서 그 나라 원수에게 루스벨트 국제장애인상(FRANKLIN ROOSEVELT INTERNATIONAL DISABILITY AWARD) 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중요하지요. 1997년에 김영삼 대통령이 수상했지요. 국가 정상들에게 상을 주는 아주 영향력 있는 그런 자리인데 거기에서 유엔사무총장을 소개하는 연설도 하게 되지요. 재작년에 뉴질랜드 총독이 상을 받을 때 제가 반기문 총장을 대한민국이 낳은 위대한 섬김의 지도자로 소개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데 총독도 정말 감동해서 저를 뉴질랜드까지 초청한 바 있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2006년에 케네디, 레이건, 클린턴 등의 미국 대통령과 함께 127인의 위인으로 선정되어 루스벨트 홍보 센터 강당 기념 의자에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강영우: 제가 루스벨트 기념관에 127명의 위인들,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상과 가치관에 가장 근접한 그런 사람들을 뽑는데 당당히 제가 뽑혀서 위인의 자리에 가게 된 거지요. 저의 의자 바로 오른쪽에 케네디 대통령이에요. 바로 뒷자리가 록펠러고 맥아더 원수, 클린턴 대통령 레이건 대통령도 제 뒷자리로 가 있습니다. 그래고 지금 현재 루스벨트 4대 자유의 공원이 유엔 맞은 편에 작년 3월에 착공이 됐습니다. 그래서 2013년에 완공되는데 거기에도 저의 CHAPTER가 154개 중의 하나로 역사 속에 남게 됐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한인 장애인은 물론 세계 장애인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강영우: 네 그 장애가 생기면 우선 세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로는 기능 문제가 생기고요. 기능이 저하되고 그러니까? 그 기능을 보상해 줘야 하는 거지요. 두 번째는 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굴하지 않고 대항해서 없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도전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다음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가 생기게 되면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고 위축감을 느낍니다. 이 열등감이 가장 나쁜 겁니다. 열등감과 자존감은 반비례하거든요. 열등감이 커지면 자존감은 없어지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요. 실망하고 좌절하고 그러는데 실망하고 좌절하는 단계가 지나가면 자포자기를 하게 됩니다. 자포자기 단계를 가면은 아무도 도와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격언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다고 하잖아요. 그 반대로 하면 스스로 포기하는 자는 하늘도 도울 수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래 장애인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도 모르게 열등감 느끼고 낙심하고 좌절하다가 스스로 포기하는 그 단계에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걸을 아시고 절대 포기하지 말고 인생의 선명한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서 매진하고 매진하라는 그런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고아로 시각 장애를 딛고 전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 도전 삶의 이야기 2부 ‘도전은 희망으로 꽃핀다.’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강영우 박사의 성공은 이렇다. 미국 인구 12만 명 중 1명꼴로 오르는 미국 인명사전과 세계 인명사전에 약력이 수록되는 저명인사이며, 국제 로터리 세계 본부가 선정한 75명의 봉사의 촛불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세계 장애위원회 부위원장과 루스벨트 재단 고문이기도 하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고아로 시각 장애를 딛고 전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 도전 삶의 이야기 2부 ‘도전은 희망으로 꽃핀다.’를 함께한다.
수많은 고통의 아픔을 이겨낸 강영우 박사는 드디어 자신의 꿈을 펼쳐나간다. 미국 주류사회로 큰 꿈의 나래를 펼쳐가는 강 박사에게 어떻게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는지 물어봤다. 그는 부시 가의 인연은 물론, 22명의 세계 정상들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다고 얘기한다.
강영우: 두 부시 대통령과는 다른 만남인데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제가 최초로 영어로 쓴 책 A LIGHT IN MY HEART(빛은 내 가슴에)은 1987년에 존 낙스 프레스 미국 장로교 출판사가 출간했는데 그 책을 3년 후인 1990년에 저의 둘째 아들이 다니는 필립스 아카데미 교장 선생님께 선물로 드렸더니 그 책을 아버지 부시 대통령께 보내 드리면 크게 관심 두시고 읽으실 거라고 해서 그 책을 보내 드린 것이 인연이 된 겁니다. 그 책을 읽으시고 감동이 되셔서 저에게 편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날부터 오늘의 이르기까지 인연이 이어진 거고, 아들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신 다음에 12일 되던 날인 2001년 2월 1일 백악관의 첫 손님으로 장애인계 대표들을 초청했습니다. 제가 거기서 처음 만나게 된 거지요. 거기서 부시 대통령을 잠시 만났을 때 부시 대통령에게 감동을 주는 소통의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인준하는 최고 공직자에 당당히 들어가고 다시 또 재 임명받아서 8년 동안을 근무할 수 있게 됐지요. 그러니까 아버지, 아들 대통령을 다른 시기에 다른 인연으로 맺어진 겁니다. 저는 부시 대통령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세계 13개 나라 국가 정상들 22명을 만날 수 있는 그런 축복을 받았는데요.
강영우 박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받는 고위 공직자 500명 중 한 명인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차관보가 된다. 강 박사가 상원인준을 받았을 때의 추억담을 들어본다.
강영우: 재미나는 이야기는 제가 상원인준을 받기 3개월 전에 우리 둘째 아들이 딕더빈 상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상원인준 받는 게 전체 500명밖에 안 되니까? 바로 아버지가 인준 받았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공식적으로 알게 된 건 둘째 아들이거든요. 아들이 전화해서 아버지 SLOW DOWN 천천히 가시라고 DON’T RACE THE BAR 기준을 자꾸 올리지 말라고, 그건 무슨 이야기냐면 제가 그랬거든요. 너의 아버지는 두 눈도 못 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너희는 눈도 보고 영어도 모국어로 잘하니까? 아버지보다는 잘해야 하고 더 잘돼야 마땅하지 않으냐! 고 도전을 해 줬거든요. 그랬더니 아버지 이제는 천천히 가시라고, 그리고 기준을 자꾸 올리지 말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 일화입니다.
강영우 박사에게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들어본다.
강영우: 미국에 다섯 명에 한 명이 장애인이에요. 그래서 5천4백만입니다. 한국인구보다도 많지요. 장애인들과 그 가족에 대한 정책을 개발하고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게 주 임무이고, 그래서 대통령 정책이 나오는 거고 그다음에 법으로 제정되어야 할 것은 국회로 제출해서 법이 만들어지는 거지요. 그래서 미국의 장애인 민권법(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1990년 서명한 것으로 직장 내에셔 장애인 차별금지, 공공장소와 대중교통에 장애인에게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국가장애위원회가 만들어서 제출한 게 법이 된 거지요. 그래서 제가 발의해 법으로 제정된 것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911사태후에 SAVING LIFE IN PEOPLE WITH DISABILITIES를 제가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위기 시에 장애인들이 많이 희생됐잖아요. 특히 높은 데서 휠체어로 계단으로 내려올 수 없으니까? 장애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죽는 그런 것들을 예방하고 또 그런 재난 시에 장애인을 어떻게 구출하느냐 하는 그런 정책의 보고서를 낸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업적에 들어가는 거고요. 그다음에는 유니버설 디자인, 그러니까? 첨단 기술(휴대전화 ATM 기기사용 등), 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원천적으로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회사가 물품을 만들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동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나온다면 좋은 일이니까? 그것을 정책적으로 유니버설 디자인을 연구해서 개발되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정책을 제가 CHAIRMAN(의장)으로 만든 겁니다. 그런 정책들은 역사적으로도 영원히 남고 부시 대통령 센터 도서관에도 영원히 저의 이름으로 남게 됩니다.
강영우 박사는 날이 갈수록 자신의 희망을 키워 갔다. 바로 유엔 세계 장애위원회 부의장을 맡게 된 것이다. 6억 5천만 세계 장애인의 복지 향상을 위해 헌신하는 강영우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강영우: 그것은 제가 지금 들어간 게 아니고 제가 1995년부터 시작한 겁니다. 세계 장애위원회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장애인 권리협약에서 장애인 정책이나 장애인 복지의 괄목 할만한 발전을 한 나라를 선정해서 그 나라 원수에게 루스벨트 국제장애인상(FRANKLIN ROOSEVELT INTERNATIONAL DISABILITY AWARD) 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중요하지요. 1997년에 김영삼 대통령이 수상했지요. 국가 정상들에게 상을 주는 아주 영향력 있는 그런 자리인데 거기에서 유엔사무총장을 소개하는 연설도 하게 되지요. 재작년에 뉴질랜드 총독이 상을 받을 때 제가 반기문 총장을 대한민국이 낳은 위대한 섬김의 지도자로 소개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데 총독도 정말 감동해서 저를 뉴질랜드까지 초청한 바 있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2006년에 케네디, 레이건, 클린턴 등의 미국 대통령과 함께 127인의 위인으로 선정되어 루스벨트 홍보 센터 강당 기념 의자에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강영우: 제가 루스벨트 기념관에 127명의 위인들,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상과 가치관에 가장 근접한 그런 사람들을 뽑는데 당당히 제가 뽑혀서 위인의 자리에 가게 된 거지요. 저의 의자 바로 오른쪽에 케네디 대통령이에요. 바로 뒷자리가 록펠러고 맥아더 원수, 클린턴 대통령 레이건 대통령도 제 뒷자리로 가 있습니다. 그래고 지금 현재 루스벨트 4대 자유의 공원이 유엔 맞은 편에 작년 3월에 착공이 됐습니다. 그래서 2013년에 완공되는데 거기에도 저의 CHAPTER가 154개 중의 하나로 역사 속에 남게 됐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한인 장애인은 물론 세계 장애인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강영우: 네 그 장애가 생기면 우선 세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로는 기능 문제가 생기고요. 기능이 저하되고 그러니까? 그 기능을 보상해 줘야 하는 거지요. 두 번째는 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굴하지 않고 대항해서 없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도전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다음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가 생기게 되면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고 위축감을 느낍니다. 이 열등감이 가장 나쁜 겁니다. 열등감과 자존감은 반비례하거든요. 열등감이 커지면 자존감은 없어지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요. 실망하고 좌절하고 그러는데 실망하고 좌절하는 단계가 지나가면 자포자기를 하게 됩니다. 자포자기 단계를 가면은 아무도 도와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격언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다고 하잖아요. 그 반대로 하면 스스로 포기하는 자는 하늘도 도울 수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래 장애인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도 모르게 열등감 느끼고 낙심하고 좌절하다가 스스로 포기하는 그 단계에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걸을 아시고 절대 포기하지 말고 인생의 선명한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서 매진하고 매진하라는 그런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고아로 시각 장애를 딛고 전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 도전 삶의 이야기 2부 ‘도전은 희망으로 꽃핀다.’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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