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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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에 비참한 실명의 장애와 사랑하는 부모도 잃은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한인으로, 미국에서 최고위직 공무원으로 성장하기까지 도전의 삶을 살아온 한국인이 있다. 바로 강영우 박사다. 그는 끝없는 도전에 도전으로 전 백악관 국가 장애 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냈으며, 지금도 도전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고아로 시각 장애를 딛고 전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의 도전 삶 이야기 1부’를 함께한다.
강영우 박사, 그는 1944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해 중학교 시절 사고로 실명한 후, 어머니와 누나를 잃고, 일찍 맹인 소년 가장으로 온갖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도전 삶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로 세계인의 마음을 울린다.
강영우: 1957년에서 1961년 4년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가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축구공에 눈을 맞아서 망막박리 망막이 찢어지게 되는 원인이 됐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NATIONAL MEDICAL CENTER(국립의료원)에서 덴마크에서 오신 나슨 박사님이 2년 동안을 수술도하고 절대 안정하는 등 치료를 했는데 성과가 없었고,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다는 실명선고를 받게 됐지요. 그리고 저의 어머니가 보통 때처럼 면회를 왔을 때 그 선언을 제가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된데요. 한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드렸더니 어머니가 충격이 너무 커서 집에 가시다가 의사에게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집에서 8시간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2년 사이 양친과 시력을 잃게 되고, 4남매가 있었는데 누나가 제일 나이가 많으니까? 누나가 평화시장에 있는 봉제공장 직공으로 취직해서 생계비를 벌어오는 동안에 저는 기도로 눈을 고치려고 2년을 보내지요. 그러다가 눈도 고치지 못하고, 누나는 과로로 세상을 떠나면서 불행이 시작됐는데, 저의 3남매가 제가 공장에도 갈 수 없고 살아갈 방법이 없어 여동생은 고아원에 보내고 남동생을 남의 집 철물점으로 보냈으며 저는 맹인 재활센터로 이렇게 세 식구가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가장 아래로 떨어졌던 때에 거기서 출발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강영우 박사에게 어떻게 장애를 극복하는 힘이 나왔는지 물어봤다. 행운의 석은옥 여사와의 만남이라고 들려준다.
강영우: 제가 맹인이 돼서 맹학교 중등부 1학년에 들어갔을 때는 18살로 5년 지각생으로 시작됐는데 5년 지각생이 된 게 좋은 면은 그만큼 제가 중학교 1학년이지만 18살 성숙했지요. 그래서 대학을 가는 분명한 목적을 세우고 그다음에 공부하는 데는 당시 점자 도서가 전혀 없고 참고서도 하나도 없고 그럴 때였어요. 그때에 오늘의 제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제 아내가 숙명여자대학교 영문과 1학년 생으로 만났는데 적십자가 청년봉사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대학생들을 맹학교에 데려와서 봉사 할 때에 그 대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지 말고 참고서를 읽어달라고 해서 참고서 읽어주고 또 모르는 것은 가르쳐 달라고 하고 그래서 대학생들에게 배우기 시작하고, 제 아내가 그 당시 유학을 가려고 코리아 헤럴드 학원에 다녔어요. 거기를 쫓아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영어는 뭐 문제가 없었고 그렇게 준비하다가 마지막 때 부족한 것은 가정교사를 (수학, 화학 등) 몇 달 동안 고용해서 공부도 했습니다.
강영우 박사가 도전으로 꿈을 이룬 이야기는 계속된다.
강영우: 그때 어려웠던 것은 저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도 당시에는 장애인들을 받아주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서 연세대학교에 입학해서 열심히 공부했죠. 연세대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일반 학생들하고 경쟁한다는 것은 무섭고 겁이 났던 거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일반 학생들을 의식하지 않고 제가 어떻게든지 ALL ‘A’(만점)를 받아야겠다는 그런 목표를 세우고 도전해서 1학년 들어가서 바로 전 학년 ALL ‘A’ 우등생을 첫 학기 둘째 학기 받았습니다. 그리고서 동아리에 들어가서 활동하려고 하는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거절을 당했어요. 그래서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또 내가 나의 동아리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 해서 시각 장애인으로는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독서 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독서 동아리가 연세자유교양회로 지금 42년간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인재들이 많이 나와서 현재 연세대학교에 교수만 6명이 배출됐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1972년 문교부가 실시하는 유학시험에 합격해,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는 처음이다. 바로 강 박사는 도전의 힘으로 미국 유학을 가게 된다. 유학 오기까지의 어려웠던 이야기다.
강영우: 그때 한국은 장애인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없었던 때이고 그리고 정부조차도 불평등 법적 조항을 만들어 놓고도 그게 왜 있어야 하는지 그것조차도 모르던 그런 시대였지요. 그런데 장애인은 그 시험을 보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던 거지요. 그때 한미재단의 유학지도 부장으로 있던 이유상 박사 (현재 애틀랜타 거주)가 머리를 써서 교육부 장관에게 없애달라는 청원서를 한미재단과 연세대학교가 함께 제출해서 당시 민관식 장관께서 허락해서 제가 한국 장애인 최초의 정규 유학생이 될 수 있었던 거지요.
일반인도 어려운 미국 유학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다.
강영우: 저는 1972년 2월 21일 날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5일 후인 2월 26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그리고 그해 8월까지는 교육부 불평등 조항 때문에 수속을 못했다가 불평등 조항이 없어진 다음 8월 28일에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1972년 9월 5일 피치버그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일 어려웠던 것은 제가 자유롭게 학교를 통학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저를 안내해서 처음에는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때의 저의 아내는 임신 중 이었거든요. 그리고 그 이듬해 73년 4월 23일 날 지금 안과 의사인 큰아들이 태어났어요. 태어나니까? 제일 큰 문제가 아내가 저를 데려다 줄 수 없게 된 거지요. 그래서 제가 지팡이를 가지고 배워서 통학하면서 독립적으로 한 것인데 그것이 축복이 됐어요.
강영우 박사는 미국 대학원 시절 미국 친구의 우정어린 도움을 받았단다. 그리고 강 박사는 피치버그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며, 두 아들을 얻는 축복을 받았다고 자랑한다.
강영우: 많은 사람이 제가 시각 장애인인 데 대한 CONFESSION(동참하는 마음)을 가지고 도와주시겠다고 하는 분들, 그래서 저는 저의 은인들이 많습니다. 훗날 펜실베니아 주지사, 법무장관 되어 오늘까지도 가장 가까운 친구 중의 하나인 리처드 손버그 전 법무장관도 그때 검사장으로 있을 때 길에서 만나 RIDE를 줘서 만나게 된 거죠. 점자 책 같은 것은 분량이 많아서 읽기가 어려우니까? 주로 들어서 공부를 하는 거지요.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제가 노트를 빌렸던 친구 센트럴 로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교수로 있는 친구보다 제가 공부를 더 잘했어요. 노트를 빌려서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 점수는 제가 잘 나오고 졸업 박사학위도 제가 가장 먼저 받았습니다. 그래서 참 감사하고 그때에 큰아들 태어나고 둘째아들은 졸업 후 2개월 후에 태어나서 피치 버그에 유학시절에는 학위만 따는 것이 아니라 두 아들을 얻어서 두 아들의 고향이고 저희에게도 영원한 마음의 고향입니다.
강영우 박사는 오늘의 성공이 있기까지 큰 힘은 신앙이라고 들려준다.
강영우: 신앙에서 나온 겁니다. 내가 가장 바닥에 떨어졌을 때 제 모습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고 오히려 영광을 가리고 있지만 먼 훗날 전문인이 되고 자녀도 잘 길러놓으면 그때부터는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그런 목적이 있었고, 그렇게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는 눈뜬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만 멋 훗날에는 눈뜬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유익을 주는 그런 삶을 산다는 그런 목표를 정해놓고 거기에 도전하는 그런 삶을 산 건데 그것이 어릴 때부터 내려진 신앙의 뿌리로 시작된 거지요.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고아로 시각 장애를 딛고 전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의 도전 삶의 이야기 1부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고아로 시각 장애를 딛고 전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의 도전 삶 이야기 1부’를 함께한다.
강영우 박사, 그는 1944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해 중학교 시절 사고로 실명한 후, 어머니와 누나를 잃고, 일찍 맹인 소년 가장으로 온갖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도전 삶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로 세계인의 마음을 울린다.
강영우: 1957년에서 1961년 4년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가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축구공에 눈을 맞아서 망막박리 망막이 찢어지게 되는 원인이 됐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NATIONAL MEDICAL CENTER(국립의료원)에서 덴마크에서 오신 나슨 박사님이 2년 동안을 수술도하고 절대 안정하는 등 치료를 했는데 성과가 없었고,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다는 실명선고를 받게 됐지요. 그리고 저의 어머니가 보통 때처럼 면회를 왔을 때 그 선언을 제가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된데요. 한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드렸더니 어머니가 충격이 너무 커서 집에 가시다가 의사에게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집에서 8시간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2년 사이 양친과 시력을 잃게 되고, 4남매가 있었는데 누나가 제일 나이가 많으니까? 누나가 평화시장에 있는 봉제공장 직공으로 취직해서 생계비를 벌어오는 동안에 저는 기도로 눈을 고치려고 2년을 보내지요. 그러다가 눈도 고치지 못하고, 누나는 과로로 세상을 떠나면서 불행이 시작됐는데, 저의 3남매가 제가 공장에도 갈 수 없고 살아갈 방법이 없어 여동생은 고아원에 보내고 남동생을 남의 집 철물점으로 보냈으며 저는 맹인 재활센터로 이렇게 세 식구가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가장 아래로 떨어졌던 때에 거기서 출발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강영우 박사에게 어떻게 장애를 극복하는 힘이 나왔는지 물어봤다. 행운의 석은옥 여사와의 만남이라고 들려준다.
강영우: 제가 맹인이 돼서 맹학교 중등부 1학년에 들어갔을 때는 18살로 5년 지각생으로 시작됐는데 5년 지각생이 된 게 좋은 면은 그만큼 제가 중학교 1학년이지만 18살 성숙했지요. 그래서 대학을 가는 분명한 목적을 세우고 그다음에 공부하는 데는 당시 점자 도서가 전혀 없고 참고서도 하나도 없고 그럴 때였어요. 그때에 오늘의 제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제 아내가 숙명여자대학교 영문과 1학년 생으로 만났는데 적십자가 청년봉사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대학생들을 맹학교에 데려와서 봉사 할 때에 그 대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지 말고 참고서를 읽어달라고 해서 참고서 읽어주고 또 모르는 것은 가르쳐 달라고 하고 그래서 대학생들에게 배우기 시작하고, 제 아내가 그 당시 유학을 가려고 코리아 헤럴드 학원에 다녔어요. 거기를 쫓아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영어는 뭐 문제가 없었고 그렇게 준비하다가 마지막 때 부족한 것은 가정교사를 (수학, 화학 등) 몇 달 동안 고용해서 공부도 했습니다.
강영우 박사가 도전으로 꿈을 이룬 이야기는 계속된다.
강영우: 그때 어려웠던 것은 저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도 당시에는 장애인들을 받아주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서 연세대학교에 입학해서 열심히 공부했죠. 연세대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일반 학생들하고 경쟁한다는 것은 무섭고 겁이 났던 거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일반 학생들을 의식하지 않고 제가 어떻게든지 ALL ‘A’(만점)를 받아야겠다는 그런 목표를 세우고 도전해서 1학년 들어가서 바로 전 학년 ALL ‘A’ 우등생을 첫 학기 둘째 학기 받았습니다. 그리고서 동아리에 들어가서 활동하려고 하는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거절을 당했어요. 그래서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또 내가 나의 동아리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 해서 시각 장애인으로는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독서 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독서 동아리가 연세자유교양회로 지금 42년간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인재들이 많이 나와서 현재 연세대학교에 교수만 6명이 배출됐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1972년 문교부가 실시하는 유학시험에 합격해,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는 처음이다. 바로 강 박사는 도전의 힘으로 미국 유학을 가게 된다. 유학 오기까지의 어려웠던 이야기다.
강영우: 그때 한국은 장애인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없었던 때이고 그리고 정부조차도 불평등 법적 조항을 만들어 놓고도 그게 왜 있어야 하는지 그것조차도 모르던 그런 시대였지요. 그런데 장애인은 그 시험을 보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던 거지요. 그때 한미재단의 유학지도 부장으로 있던 이유상 박사 (현재 애틀랜타 거주)가 머리를 써서 교육부 장관에게 없애달라는 청원서를 한미재단과 연세대학교가 함께 제출해서 당시 민관식 장관께서 허락해서 제가 한국 장애인 최초의 정규 유학생이 될 수 있었던 거지요.
일반인도 어려운 미국 유학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다.
강영우: 저는 1972년 2월 21일 날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5일 후인 2월 26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그리고 그해 8월까지는 교육부 불평등 조항 때문에 수속을 못했다가 불평등 조항이 없어진 다음 8월 28일에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1972년 9월 5일 피치버그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일 어려웠던 것은 제가 자유롭게 학교를 통학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저를 안내해서 처음에는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때의 저의 아내는 임신 중 이었거든요. 그리고 그 이듬해 73년 4월 23일 날 지금 안과 의사인 큰아들이 태어났어요. 태어나니까? 제일 큰 문제가 아내가 저를 데려다 줄 수 없게 된 거지요. 그래서 제가 지팡이를 가지고 배워서 통학하면서 독립적으로 한 것인데 그것이 축복이 됐어요.
강영우 박사는 미국 대학원 시절 미국 친구의 우정어린 도움을 받았단다. 그리고 강 박사는 피치버그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며, 두 아들을 얻는 축복을 받았다고 자랑한다.
강영우: 많은 사람이 제가 시각 장애인인 데 대한 CONFESSION(동참하는 마음)을 가지고 도와주시겠다고 하는 분들, 그래서 저는 저의 은인들이 많습니다. 훗날 펜실베니아 주지사, 법무장관 되어 오늘까지도 가장 가까운 친구 중의 하나인 리처드 손버그 전 법무장관도 그때 검사장으로 있을 때 길에서 만나 RIDE를 줘서 만나게 된 거죠. 점자 책 같은 것은 분량이 많아서 읽기가 어려우니까? 주로 들어서 공부를 하는 거지요.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제가 노트를 빌렸던 친구 센트럴 로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교수로 있는 친구보다 제가 공부를 더 잘했어요. 노트를 빌려서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 점수는 제가 잘 나오고 졸업 박사학위도 제가 가장 먼저 받았습니다. 그래서 참 감사하고 그때에 큰아들 태어나고 둘째아들은 졸업 후 2개월 후에 태어나서 피치 버그에 유학시절에는 학위만 따는 것이 아니라 두 아들을 얻어서 두 아들의 고향이고 저희에게도 영원한 마음의 고향입니다.
강영우 박사는 오늘의 성공이 있기까지 큰 힘은 신앙이라고 들려준다.
강영우: 신앙에서 나온 겁니다. 내가 가장 바닥에 떨어졌을 때 제 모습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고 오히려 영광을 가리고 있지만 먼 훗날 전문인이 되고 자녀도 잘 길러놓으면 그때부터는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그런 목적이 있었고, 그렇게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는 눈뜬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만 멋 훗날에는 눈뜬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유익을 주는 그런 삶을 산다는 그런 목표를 정해놓고 거기에 도전하는 그런 삶을 산 건데 그것이 어릴 때부터 내려진 신앙의 뿌리로 시작된 거지요.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고아로 시각 장애를 딛고 전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의 도전 삶의 이야기 1부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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