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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워싱턴 로펌 전종준 변호사의 삶의 역정① - 부모 사랑으로 희망의 돛을 달다

201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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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제공

계명대학교에서 강연을 하는 전종준 변호사.

‘2등해서 서러운 사람들’ ‘남이 안 하는 거 해봐’ 제목만 봐도 아주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쓴 전종준 변호사는 인권 변호사로서, 그리고 이민 전문 변호사로서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영어 때문에 사법고시를 낙방한 사람이 어떻게 미국에서 미국 말로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었을까? 바로 전종준 변호사의 인생역정에서 보듯 ‘이등 해서 서러운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고, 전 세계 한인들과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학창시절 쓰라린 패배를 딛고 일어서 워싱턴 로펌(법무법인) 대표로 꿈을 이룬 ‘전종준 변호사의 삶의 역정 1부’ ‘부모 사랑으로 희망의 돛을 달았다.’를 함께한다.

전종준 씨의 학창 시절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법고시 바람이 불어 예비고사도 떨어지자 재수해서 서울도 아닌 지방대학으로 유학 갔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종준: 저희 집안 어른 중에 전정구 변호사님이라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 옛날에 어렵다는 사법고시와 행정고시에 합격하신 서울대학교 상대를 졸업하신 분인데 저희 집안 어르신들이 그분이 있어서 굉장히 든든히 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전정구 아저씨처럼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사법고시 공부를 해 변호사가 되겠다는 어떻게 보면 망상에 빠져서 고등학교 공부를 소홀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예비고사 시험에서도 떨어지고 재수해서 그다음에 또 시험을 봤는데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못 가고 지방대학에 가게 됐던 것입니다.

전종준 씨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대학교 낙방에도 야단보다는 사랑과 믿음으로 격려해 주신 부모님께서 2등 인생의 항로를 바꿔줬는지도 모른다.

전종준: 저의 어머니는 항상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새벽기도 가시고 제가 대학에 떨어졌을 때도 괜찮다 너는 할 수 있다. 내가 너를 전적으로 믿는다. 그리고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신다고 항상 믿음으로 저를 키워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아마 어머니 기도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항상 저에게 보는 게 정이요. 혀 밑에 정이라 즉 자꾸 봐야 하고 자꾸 말을 해야 정이 간다. 자주 나에게 와서 말해주는 게 효도다 말씀해 주셔서 저와 항상 대화하기를 즐기시고 제가 고등학교 때 고시공부하겠다고 책 사달라고 할 때 종로서적에 가서 법률 책을 사 주시고 자식을 믿어주시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시고 야단보다는 항상 힘을 보태주신 부모님의 사랑 때문에 제가 오늘날보다 성숙한 사람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전 변호사는 대구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입학식 때 이영식 총장의 연설에 감동했다고 한다. 이 총장의 한마디가 어쩌면 2등 인생을 1 둥 인생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전종준: 앞에서 말한 전정구 변호사님은 서울 상대를 나왔는데 저도 어떤 의미에서는 서울 상대를 나왔는데 서울에서 상당히 먼 대학 즉 지방대학을 가게 됐는데 입학식 날 무료하게 대구의 한국사회사업대학 지금은 대구대학의 전신인데요. 별 의미 없이 입학식에 갔는데 단상 위에서 백발의 노인께서 반은 연설이고 반은 야단치는 식으로 “남이 안 하는 거 해봐”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 저는 깜짝 놀라서 그 말을 듣고 갑자기 가슴이 찡해지고 전기에 감전된 것 같더라고요. 아 그래 남이 안 하는 것 나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이 지금까지 저의 좌우명이 되었고 제가 이번에 책을 쓴 자서전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전종준 씨는 한국사회사업대학 1학년 때 2등 인생을 청산하고 1등으로 장학금도 받았단다. 그리고 ‘나도 하면 된다.’는 깨달음을 가졌다고 한다.

전종준: 대구에 가서 공부하는데요. 법과 과목을 듣는데 제가 고등학교 때 이미 본 과목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야! 미리 공부한 것이 참 효도 노릇을 한다는 깨달음도 있었는데요. 그러다가 첫 학기에 1등을 해서 장학금을 받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 깨달은 게 참 공부도 습관이구나 공부도 열심히 하다 보면 계속 잘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때 또 각 대학 단과 별로 체육대회를 했는데 탁구선수로 나가서 1등을 해서 금메달을 받고 이렇게 모처럼 시작한 대학생활이 굉장히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하면 된다.’라는 깨달음을 알게 됐고, 그렇지만 한국 사회사업대학에는 법과대학이 없어서 1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서 단국대학 법대에 편입하게 됐습니다.

전 씨는 한국사회사업대학 시절에 받은 장학금으로 친척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는 참 젊음의 희망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전종준: 그때 제 기억으로는 과 수석으로 몇만 원을 받은 것 같은데 매우 고마워서 대구에 있는 친척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준비했는데, 선물 비용이 모자라더라고요. 처음에는 제가 장학금 받았다고 하니까? 대구에 있는 친척들이 믿지 않았어요.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져서 대구에 내려온 놈이 무슨 장학금을 받았나 하고 처음에는 믿지를 않아서 설명하느라 혼났는데 어쩌든 선물 사는데 여러 친척분 것을 사다 보니까? 돈이 부족해서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 마저 선물을 사서 나눠 줬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장학금을 타고 손해 보는 장사를 했는데 아 이런 손해 보는 장사를 해도 보람이 있구나 하는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전종준 씨에 2등의 꼬리표는 끝없이 따라다닌다. 사법고시에서 낙방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종준
: 저는 대학입시도 떨어졌고, 하도 떨어져 본 것이 많으니까? 그때만 해도 낙방하는데 익숙한 단계가 됐겠지요. 1970년 말만 해도 사법고시 시험에서 외국어 선택과목이 있었는데 거기서 과락 하면 일차시험에서 떨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 때 제대로 공부를 못했으니까? 기본이 없으니까? 영어가 잘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또 영어시험을 봤는데 떨어지고 그래서 영어를 피해서 일본어도 해보고 독어도 선택해보고 노력을 해 봤지만, 외국어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사법고시에 영어 때문에 떨어져서 저의 자서전 부재에 이렇게 달았습니다. ‘영어 때문에 사법고시 떨어지고 영어로 미국 변호사 된 전종준의 휴먼드라마’ 바로 이 부재가 일차 고시에 떨어진 사연 때문이었습니다.

2등 인생으로 사법고시에 떨어진 괴로움을 극복하는 단계로 미국 유학을 생각한다. 한 교수의 반대에도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직접 가겠다는 결단으로 유학길에 나선다.

전종준: 제가 보니까? 영어를 극복하지 않으면 변호사가 못 되겠더라고요. 그래 죽을 병에는 독약밖에 없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극약 처방으로 그러면 내가 미국 가서 영어를 극복해보자! 그래서 변호사가 되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고 영어를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을 가겠다고 부모님에게 말씀드렸더니 네가 하고 싶으면 해봐라! 그런데 한 교수님은 집에 새는 바가지 밖에 나가도 센다고 비관적인 이야기를 해 줬지만, 저에게는 미국행 선택이 저의 앞날을 보장하는 새로운 희망이라고 믿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못한 영어공부 미국에서는 잘할 수 있었을까? 그는 영어공부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그리고 영어가 축복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전종준: 처음 미국에 오면 영어와 문화적 차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저는 답답했지만, 배짱을 가지고 영어를 친구로 삼고 도전했습니다. 제가 영어 공부하는 방법의 하나는 성경공부에 많이 참석했고요. 성경공부에서 미국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이지만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는 귀가 뚫려야 말을 한다고 하지 않아요. 저는 TV가 선생이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 미국 뉴스 방송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무조건 자꾸 들어서 귀를 뚫게 했고요. 그다음에 왜 연애하면 사랑에 미친다고 하잖아요. 영어도 그렇게 미쳐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미친 듯이 영어를 많이 외웠습니다. 처음에는 영어가 저주같이 느껴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영어가 축복같이 느껴질 때 아 영어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전 씨에게 미국 유학시절의 이야기도 들어봤다! 토플시험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삶 때문에 극복했다고 한다.

전종준: 그때 당시 대학원을 입학하려면 토플(TOEFL `TEST OF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즉 외국인을 위한 영어테스트) 점수가 550점이 넘어야 했습니다. 그때 대학원공부 허락받을 때 토플 점수 550점을 넘어야 한다는 조건을 받고 입학했습니다. 대학원 공부는 잘했는데 토플 점수가 500점 520점 530점까지 돼서 여러 번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 너무너무 안돼서 중간에 너무 힘들어서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습니다. 한국으로 가려니까? 그때 당시 김포공항에서 환송했던 사람들 얼굴이 눈에 보이고, 막말로 창피해서 못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참고 계속 공부했는데, 이제 마지막 학기가 끝나는데 토플 550점이 통과되지 않으면 다음 학기 등록이 안 되고 보따리 싸고 돌아 가야 하는 순간인데 저에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야 이번에 안되면 난 진짜 간다. 내가 부끄러운 것도 없다. 그래서 5년 동안의 토플 문제를 풀어보니까? 문제의 흐름이 보이더라고요. 그래 토플의 유형을 분석한 다음에 집중적으로 공략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험을 봤는데 극적으로 통과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은 나한테 지각하는 하나님으로 계시다라는 말을 하면서 그리고 끝에 저를 내려놓을 때 통과되는 것을 보고 아무리 좌절과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극복할 수 있구나 하는 큰 교훈을 얻게 됐습니다.

전종준 씨에게 미국 아내 크리스는 행운의 동반자이다. 대학원 시절 만났다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단다.

전종준: 저희 아내는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공부했고 저는 그때 정치학을 공부했는데 터키에서 온 친구가 행정학 석사 공부를 할 때 도서실에서 우연히 만나서 터키인 친구 소개로 인사하게 됐습니다. 어느 날 크리스가 친구가 이사 가는데 짐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해서 이삿짐 도와주다가 서로 눈이 맞아 그때부터 사귀게 됐는데 대학원에 다닐 때 크리스가 영어발음도 교정해주고 그때만 해도 80년대라서 한국에서는 타자기가 별로 없었는데 소위 그 한 손가락으로 치는 독수리 타법으로 했는데 저의 아내는 뭐 몇 분 안에 다 쳐내고 그래서 아내 덕분에 대학원 시절을 편하게 쉽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전종준 씨에게 미국여자와 결혼하는데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느냐고 물어봤다. 부모님은 전 씨의 의견을 존중했단다.

전종준: 아유 왜 없었겠습니까? 제가 여기서 석사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크리스가 시카고 공항까지 와서 환송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저는 미국 여자하고 결혼할 생각을 절대로 안 했기 때문에 좋은 남자를 만나라고 그랬더니 크리스가 BUT IT’S NOT YOU (그렇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즉 당신을 사랑한다.) 그 말을 하는데 어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그리고 한국으로 왔는데 한국에 왔더니 선이 밀려 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선을 안 봤고 제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참 벼락 맞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크리스가 제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석사 장교로 가기 직전에 부모님께 이야기했어요. 미국에서 사귀던 여자가 있는데 결혼하고 싶다. 그랬더니 군대 가기 바로 전에 아들의 심정을 이해하시고 그럼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강력히 반대를 안 하시더라고요. 그렇지만 군대 가서 마음이 변하면 이야기하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셔서 군대 가기 바로 전에 미국으로 전화해서 크리스에게 프러포즈하려고 전화했더니 크리스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가고 없더라고요. 그 사무실 직장상사에게 대신 프러포즈를 했는데 지금도 크리스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프러포즈를 직장 상사에게 했다고, 그렇게 해서 석사장교를 마치고 크리스가 한국에 와서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갔습니다.

전 씨가 캘리포니아에서 로스쿨, 즉 법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이야기도 들어보자! 항상 마지막에 하나님이 도와주셨단다.

전종준: 제가 석사를 마치고 한국 가기 전에 미주리대학 정치학박사 과정 입학을 하고 떠났습니다. 미국 여자와 결혼을 했으니까? 미국의 로스쿨 입학하자 해서 로스쿨을 입학했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1986년도 캘리포니아 로스쿨 들어가기가 참 어려워서 10개 학교에 입학서류를 보냈는데 7개 학교에서 거절됐고, 2개 대학은 기다리라고 하고 마지막 하나 남은 게 산타클라라 대학인데 나중에 극적으로 입학이 돼서 참 제 인생의 하나님은 꼭 진짜 지각하시는 하나님처럼 기다릴 때까지 기다리게 하고 통과돼서 극적으로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스쿨에 입학해서 법률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2등 인생의 항로는 끝없이 펼쳐진다. 변호사 시험에 또 낙방하게 된다. 그리고는 워싱턴 DC에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다. 변호사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게 된다. 그 당시의 이야기다.

전종준: 제가 로스쿨을 졸업하고 7월에 보통 시험을 보는데 시험을 보러 갔는데 시험장소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이상하다. 아무도 없지. 그런데 저쪽에서 손짓해서 보니까? 시험장소가 두 개 있는데 작년에는 제가 있는 곳에서 보았고, 이번에는 다른 장소에서 보는 것을 모른 거예요. 그래서 손짓하는 곳으로 간신이 뛰어가서 시험을 치렀는데 나중에 결과를 알아보니까? 간신이 떨어졌더라고요. 시험에 떨어지면서 그 당시 워싱턴 DC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하려고 석사과정에 입학신청해 놨는데 승인됐다는 편지를 받고 그 계기로 제가 워싱턴으로 이주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하나의 변장된 축복, 시험에 떨어졌지만, 저에게 새로운 더 나은 길이 열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워싱턴 DC에 와서 시험을 보는데 그때도 변호사 시험 볼 때도 토플 시험처럼 지난 몇 년 동안 변호사 시험 표본 문제를 분석했더니 변호사 시험도 패턴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걸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혹 예외적으로 다른 부분에서 나올지 모르니까? 나머지 부분도 다 빈틈없이 공부해서 시험을 봤는데 그때 제 생각으로는 내가 수석 하는 것 아닌가라고 건방진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변호사 시험 발표할 때는 한국처럼 수석자 누구 그렇게 발표를 안 하더라고요. 통과됐는지 통과 되지 않았는지 그것만 이야기하니까? 그래서 워싱턴 DC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아메리카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하면서 워싱턴 DC에서 정착하게 됐습니다.

전 씨가 세계 한인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이야기다.

전종준: 일등은 소수이지요. 저는 2등이라고 생각합니다. 2등이지만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한 우리는 일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니라 포기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다. 자신을 믿어줄 만큼 성공한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어로 FINISHING IS BETTER THAN STUDY (일의 마침이 시작보다 낫다.) 그래서 어떤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도전해서 마치면 여러분의 꿈이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학창시절 쓰라린 패배를 딛고 일어서 워싱턴 로펌 대표로 꿈을 이룬 ‘전종준 변호사의 삶의 역정 1부’ ‘부모 사랑으로 희망의 돛을 달았다.’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