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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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살때 자전거와 도보로 한국의 산천을 두루다니며 스케치 기행을 시작했다. 지금은 미국에 거주하며 지구촌을 누비면서
수묵화로 비경을 화폭에 담는 한국화가가 있다. 바로 독도 화가로 잘 알려진 권용섭 씨다. 권씨는 자연을 즉석에서 생생하게 화첩에
올린 지 30여 년, 그 세월속에서 영근 달필이 촬영이 금지된 북한 스케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독도 화가 권용섭의 그림 세계 1부, 독도 사랑과 그의 그림세계를 찾아간다.
권용섭 씨는 수묵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독도를 위해서였단다. 그는 화가로서 남북을 넘나들며 독도를 홍보하고 있기에 세상에서 가장 분주한 화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을 찾아가보자! 기찻길도 없는 두메산골에서 자랐단다.
권용섭: 한반도 지도를 보면 고속도로와 철도가 미치지 않는 가장 두메산골이 저의 고향입니다. 세상의 개화를 끝까지 반대하여 기찻길 건설을 타지로 돌린 경북 의성 점곡이란 곳입니다. 이 고을에서 조선의 대 학자인 유성용대감이 태어나기도 한 유교와 선비의 사상의 고장이죠. 저는 이곳에서 학교 교육보다 사랑방에서 밥상머리교육을 더 중시했던 그런 양반고을에서 자랐습니다. ‘친구와는 명분 없이 타투지마라, 윗사람을 공경하고, 손님을 그냥 보내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느니라’와 같은 통제와 재제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마을 끝 길가 에 자리한 우리 집에는 늘 자고가는 길손들이 끊기지 않고 사람들과 우애는 좋았습니다. 대가족에 잦은 잔치와 제례의 경조사로 가계는 넉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권용섭 씨는 어린 시절 경쟁이란 개념을 모르고자라 어쩌면 세상살이가 나약하지만, 그 대신에 그림을 그리는 계기가 됐다고 이야기한다.
권용섭: 친구들과 씨름이나 뜀박질을 하다가 친구를 이기는 날이면 미안해 안절부절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남들과 견주지 않는 혼자 하는 놀이가 바로 그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이 아무리 좋아도 요즘 처럼 미술학원을 보내 달라거나 미술도구를 사 달라는 때 장 부리거나 부모님에게 부탁은 더더욱 하지 못했습니다. 형님과 누나가 쓰다 남은 공책, 양지바른 마당에 앉아 작대기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나의 스케치북이었고 나의 그림 그리는 공부였습니다.
권용섭 씨가 시골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권용섭: 형님은 도회지로 유학을 떠나고 차례가 왔지만 저는 응석받이 막내로 부모가 계시는 고향을 멀리하는 게 걱정이였습니다. 고등학교는 자취를 하는 타지로 가야 하는데 걱정이었습니다. 이 무렵 시골에 합기도 도장이 생겼는데 모두가 무관심한 양반 동내 였으니 아무도 관원으로 지원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중학생인 나는 형님의 권유로 도장을 착실히 다녔습니다. 사범님과 시범단 파트너가 되기도 하며 도장 홍보에 주력했습니다. 우리는 직접 벽돌을 찍어 새로운 도장도 마련하며 도장을 이끌어가는 학생반 지도자가 되었기에 도회지 고등학교 진학을 하려는 나를 두고 사범님은 무척 섭섭해하시며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용섭이 너는 다른 학교에 가면 그날 교문 앞에 가서 패 거둬(때린다) 버릴 거 다 알았어"라고 했습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럼요 사범님을 배신하면 안 되죠" 하고 못 네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도장은 요즘처럼 무술, 운동보다는 국기에 대한 예의, 의리를 지키고 사회 약자를 위해 운동을 한다. 뭐 이런 사랑방 할아버지와 별반 다름없는 고리타분한 정신교육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범의 말씀을 떨치지 못한 것은 갑자기 우리 동내에 인문계 고등 학교가 설립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범님과 우애도 끊지 않고 부모, 조부님의 품속도 떠나지 않는 착실하고 조용한 시골청년으로 자란것입니다. 그렇게 사회 경험이 필요한 사춘기 학창시절을 경쟁이 필요 없는 두메산골에서 딩굴며 인격도야를 한 것입니다.
권용섭 씨는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뛰놀며 콩서리 머루를 따 먹던 정서가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권용섭: 보약은 몰랐지만, 배추뿌리와 고구마, 감자, 콩서리 머루랑 달래를 따 먹으며 배를 채웠던 것이 지금 선호하는 웰빙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정서와 에너지와 지식으로 미국생활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란한 도회지와 글로발 경쟁력, 그런 거창한 희망은 예나 지금이나 저에게 아직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길이 저게는 가장 숭고하며 행복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출세와 경쟁으로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현실보다 뒤의 생활이 얼마나 여유로운지 모를 겁니다. 헛기침하시는 양반 할아버지 교육이 훨씬 진리라고 느껴집니다. 손가락질 받는 부자보다. 밥 한 끼도 소중한 대접이 되어 고마워하는 현실이 행복합니다. 지금 누가 내 자리, 내 집을 탐낸다면 저는 그대로 또 물려 줄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직장을 가져보지 못한 백수입니다. 그런데 지나온 날들은 얼마나 바쁘고 화려했던지 그래서 사람들은 저를 두고 '화백'이라 부르는가 봅니다. 어쩌면 저에게 화백이란 말은 아마 화려한 백수라는 뜻이 아닌가 여깁니다. 이렇게 경쟁을 두려워하며, 바탕은 소심한 것 같아 큰일을 하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권용섭 씨의 수묵화와의 인연은 호야 등잔불 밑에서 형 친구의 그림을 따라 그리던 것에서 시작된다.
권용섭: 제가 그리는 수묵화가 바로 그런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법입니다. 그런 수묵화를 그리게 된 동기도 역시 시골환경과 가난에서 얻은 우연입니다. 중학교 때 일입니다. 도회지 나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이 친구의 화선지 그림 한 점을 가져왔기에 벽에다 붙여 두고 따라 그리는데 매료된 것입니다. 밤새 그림을 그리기는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색깔이 원본과 너무 다른 색이 나온 것입니다. 이유는 그 당시 방에 등불은 전기가 아니라 '호야'라는 남포등이었습니다. 그래서 채색을 무시하고 먹물로만 짙고 옅은 농담법을 자연히 터득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있어 두메산골의 가난이 준 선물로 행운의 시작이었습니다. 수묵화는 데생처럼 정확히 잘 그리려고 해서는 재미가 없습니다. 밤새도록 정신이 무아경지에 빠지서 묵희(먹장난)를 즐겨 다루어야만 이룰 수 있는 기법입니다.
독도 화가 권용섭 씨에게는 호기심으로 가득찬 젊은 시절이 있다. 어디를 가든지 남이 안 하는 것을 시도한 것이 바로 독도 화가로서의 활동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권용섭: 매사에 호기심으로 시작하는 탐구정신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동내를 가도 그 뒷산 꼭대기를 정복하기를 즐겼고 구석구석 들어가 보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 성장했습니다. 결국, 남들이 가지 않은 금강산, 독도에 가기를 시도한 것도 그런 모험심의 토대였던 것 같습니다.
권용섭 씨의 독도 사랑은 조용하게 실질적으로 한국이 지배하는 영토임을 강조하는 운동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권용섭: "독도는 우리 땅"이라며 악을 쓰며 시위를 하여 일본의 감정을 돋구는 독도운동이 아니라 그림전시로 일본인을 설득하며 독도가 '한국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입각 시키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고 봅니다. 평양에서도 느슨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독도홍보도 했습니다. 매사가 감정 대립으로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렵잖습니까?
권용섭 씨에게 독도 화가로서의 포부를 물어봤다. 일제 강점기 때 온몸으로 총탄을 막은 선열들을 생각하면 독도 화가로서 전율을 느낀다고 말한다.
권용섭: 언제부터 인가 독도는 애국, 영토을 지키려는 한국인의 자존심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삼일운동 하면 일본을 연상하게 되는데 아직도 일본은 한반도의 찬탈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독도를 향한 집요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도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은 곧 조국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망언과 욕망을분개하기보다 우리는 이참에 더욱더 돈독한 애국정신을 키워 가야 할 것입니다. 특히 정치적인 일로 우리 민간에서 막무가내로 불을 지필 필요는 없고 단결과 독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권용섭 씨의 독도 사랑의 뿌리는 ‘권용섭의 국토기행’이라는 한국 오지의 산수를 담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권용섭: 제가 독도를 그리기 전에는 '권용섭의 국토기행'이라는 신문 리포터를 위해 한국의 오지에 산수 소재를 찾아 편람 해 왔습니다. 제주, 설악, 백두산까지 남한 구석구석을 다니며 화첩 200여 권을 채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6.25사변으로 끊긴 한국 산수화의 절정 금강산을 마음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90년대 초부터 휴전선 비무장지대, 백두산, 회령을 기웃거리며 멀리서나마 북한땅을그렸습니다. '98년 새해 아침 방송국 한 프로에서 나에게 황당한 희망을 물어왔습니다. 그 대답은 금강산 스케치였고 정말 그 해 1998년 11월 저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여러 화우와 미술협회에 동행을 권장했으나 이때 북한은 상당한 베일 속에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결국 저 혼자 실향민들과 금강산기행을 시작했습니다. 꿈과 노랫말로만 들었던 만물상을 지나서 천선대 같은 금강산 꼭대기에는 제가 남측사람으로서는 처녀봉을 처음으로 정복한 것 같았습니다. 다시 찾은 한국의 산수의 진경을 현지에서 100여 점을 전시까지 하게 됩니다.
권용섭 씨는 금강산에서 화폭에 담을 때 북한군에게 경고를 받기도 했단다.
권용섭: 이렇게 요란을 떨며 북한의 금강산을 휘젓고 산을 다니다 보니 본의 아니게 까다로운 촬영통제 안내원과의 접촉과 북한군을 칼 든 강도처럼 위협적으로 그렸다고 불려 가는 등 몇 번이나 경고를 받기도 해 굴욕적 합의 개방임을 느끼고 몇 달만 열고 다시 중단했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결국, 몇 해 전 우리 관광객이 북한군에 의해 사살되는 비극이 생기고야 금강산 관광이 종료된 것이잖습니까? 가슴 아픈 일도 많았지만, 아무튼 저에게는 꿈꾸던 대로 한국 산수화의 맥을 잇기 위해 모든 행사를 원대로 했던 행운이었습니다.
권용섭 씨는 금강산 산행에서 귀중한 한국 산수를 얻었다고 자랑한다.
권용섭: 근대 미술계에 최초로 금강산을 사생하여 한국 전통의 실지풍경을 발표한 것입니다. 당시는 한국 산수가 중국의 산수를 따 온 관념산수가 성행되어 한국산수의 정통성이 희박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미술계의 커다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이보다 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독도 화가 권용섭의 그림 세계 1부, 독도 사랑과 그의 그림세계를 찾아봤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독도 화가 권용섭의 그림 세계 1부, 독도 사랑과 그의 그림세계를 찾아간다.
권용섭 씨는 수묵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독도를 위해서였단다. 그는 화가로서 남북을 넘나들며 독도를 홍보하고 있기에 세상에서 가장 분주한 화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을 찾아가보자! 기찻길도 없는 두메산골에서 자랐단다.
권용섭: 한반도 지도를 보면 고속도로와 철도가 미치지 않는 가장 두메산골이 저의 고향입니다. 세상의 개화를 끝까지 반대하여 기찻길 건설을 타지로 돌린 경북 의성 점곡이란 곳입니다. 이 고을에서 조선의 대 학자인 유성용대감이 태어나기도 한 유교와 선비의 사상의 고장이죠. 저는 이곳에서 학교 교육보다 사랑방에서 밥상머리교육을 더 중시했던 그런 양반고을에서 자랐습니다. ‘친구와는 명분 없이 타투지마라, 윗사람을 공경하고, 손님을 그냥 보내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느니라’와 같은 통제와 재제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마을 끝 길가 에 자리한 우리 집에는 늘 자고가는 길손들이 끊기지 않고 사람들과 우애는 좋았습니다. 대가족에 잦은 잔치와 제례의 경조사로 가계는 넉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권용섭 씨는 어린 시절 경쟁이란 개념을 모르고자라 어쩌면 세상살이가 나약하지만, 그 대신에 그림을 그리는 계기가 됐다고 이야기한다.
권용섭: 친구들과 씨름이나 뜀박질을 하다가 친구를 이기는 날이면 미안해 안절부절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남들과 견주지 않는 혼자 하는 놀이가 바로 그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이 아무리 좋아도 요즘 처럼 미술학원을 보내 달라거나 미술도구를 사 달라는 때 장 부리거나 부모님에게 부탁은 더더욱 하지 못했습니다. 형님과 누나가 쓰다 남은 공책, 양지바른 마당에 앉아 작대기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나의 스케치북이었고 나의 그림 그리는 공부였습니다.
권용섭 씨가 시골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권용섭: 형님은 도회지로 유학을 떠나고 차례가 왔지만 저는 응석받이 막내로 부모가 계시는 고향을 멀리하는 게 걱정이였습니다. 고등학교는 자취를 하는 타지로 가야 하는데 걱정이었습니다. 이 무렵 시골에 합기도 도장이 생겼는데 모두가 무관심한 양반 동내 였으니 아무도 관원으로 지원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중학생인 나는 형님의 권유로 도장을 착실히 다녔습니다. 사범님과 시범단 파트너가 되기도 하며 도장 홍보에 주력했습니다. 우리는 직접 벽돌을 찍어 새로운 도장도 마련하며 도장을 이끌어가는 학생반 지도자가 되었기에 도회지 고등학교 진학을 하려는 나를 두고 사범님은 무척 섭섭해하시며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용섭이 너는 다른 학교에 가면 그날 교문 앞에 가서 패 거둬(때린다) 버릴 거 다 알았어"라고 했습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럼요 사범님을 배신하면 안 되죠" 하고 못 네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도장은 요즘처럼 무술, 운동보다는 국기에 대한 예의, 의리를 지키고 사회 약자를 위해 운동을 한다. 뭐 이런 사랑방 할아버지와 별반 다름없는 고리타분한 정신교육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범의 말씀을 떨치지 못한 것은 갑자기 우리 동내에 인문계 고등 학교가 설립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범님과 우애도 끊지 않고 부모, 조부님의 품속도 떠나지 않는 착실하고 조용한 시골청년으로 자란것입니다. 그렇게 사회 경험이 필요한 사춘기 학창시절을 경쟁이 필요 없는 두메산골에서 딩굴며 인격도야를 한 것입니다.
권용섭 씨는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뛰놀며 콩서리 머루를 따 먹던 정서가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권용섭: 보약은 몰랐지만, 배추뿌리와 고구마, 감자, 콩서리 머루랑 달래를 따 먹으며 배를 채웠던 것이 지금 선호하는 웰빙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정서와 에너지와 지식으로 미국생활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란한 도회지와 글로발 경쟁력, 그런 거창한 희망은 예나 지금이나 저에게 아직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길이 저게는 가장 숭고하며 행복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출세와 경쟁으로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현실보다 뒤의 생활이 얼마나 여유로운지 모를 겁니다. 헛기침하시는 양반 할아버지 교육이 훨씬 진리라고 느껴집니다. 손가락질 받는 부자보다. 밥 한 끼도 소중한 대접이 되어 고마워하는 현실이 행복합니다. 지금 누가 내 자리, 내 집을 탐낸다면 저는 그대로 또 물려 줄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직장을 가져보지 못한 백수입니다. 그런데 지나온 날들은 얼마나 바쁘고 화려했던지 그래서 사람들은 저를 두고 '화백'이라 부르는가 봅니다. 어쩌면 저에게 화백이란 말은 아마 화려한 백수라는 뜻이 아닌가 여깁니다. 이렇게 경쟁을 두려워하며, 바탕은 소심한 것 같아 큰일을 하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권용섭 씨의 수묵화와의 인연은 호야 등잔불 밑에서 형 친구의 그림을 따라 그리던 것에서 시작된다.
권용섭: 제가 그리는 수묵화가 바로 그런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법입니다. 그런 수묵화를 그리게 된 동기도 역시 시골환경과 가난에서 얻은 우연입니다. 중학교 때 일입니다. 도회지 나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이 친구의 화선지 그림 한 점을 가져왔기에 벽에다 붙여 두고 따라 그리는데 매료된 것입니다. 밤새 그림을 그리기는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색깔이 원본과 너무 다른 색이 나온 것입니다. 이유는 그 당시 방에 등불은 전기가 아니라 '호야'라는 남포등이었습니다. 그래서 채색을 무시하고 먹물로만 짙고 옅은 농담법을 자연히 터득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있어 두메산골의 가난이 준 선물로 행운의 시작이었습니다. 수묵화는 데생처럼 정확히 잘 그리려고 해서는 재미가 없습니다. 밤새도록 정신이 무아경지에 빠지서 묵희(먹장난)를 즐겨 다루어야만 이룰 수 있는 기법입니다.
독도 화가 권용섭 씨에게는 호기심으로 가득찬 젊은 시절이 있다. 어디를 가든지 남이 안 하는 것을 시도한 것이 바로 독도 화가로서의 활동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권용섭: 매사에 호기심으로 시작하는 탐구정신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동내를 가도 그 뒷산 꼭대기를 정복하기를 즐겼고 구석구석 들어가 보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 성장했습니다. 결국, 남들이 가지 않은 금강산, 독도에 가기를 시도한 것도 그런 모험심의 토대였던 것 같습니다.
권용섭 씨의 독도 사랑은 조용하게 실질적으로 한국이 지배하는 영토임을 강조하는 운동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권용섭: "독도는 우리 땅"이라며 악을 쓰며 시위를 하여 일본의 감정을 돋구는 독도운동이 아니라 그림전시로 일본인을 설득하며 독도가 '한국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입각 시키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고 봅니다. 평양에서도 느슨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독도홍보도 했습니다. 매사가 감정 대립으로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렵잖습니까?
권용섭 씨에게 독도 화가로서의 포부를 물어봤다. 일제 강점기 때 온몸으로 총탄을 막은 선열들을 생각하면 독도 화가로서 전율을 느낀다고 말한다.
권용섭: 언제부터 인가 독도는 애국, 영토을 지키려는 한국인의 자존심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삼일운동 하면 일본을 연상하게 되는데 아직도 일본은 한반도의 찬탈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독도를 향한 집요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도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은 곧 조국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망언과 욕망을분개하기보다 우리는 이참에 더욱더 돈독한 애국정신을 키워 가야 할 것입니다. 특히 정치적인 일로 우리 민간에서 막무가내로 불을 지필 필요는 없고 단결과 독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권용섭 씨의 독도 사랑의 뿌리는 ‘권용섭의 국토기행’이라는 한국 오지의 산수를 담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권용섭: 제가 독도를 그리기 전에는 '권용섭의 국토기행'이라는 신문 리포터를 위해 한국의 오지에 산수 소재를 찾아 편람 해 왔습니다. 제주, 설악, 백두산까지 남한 구석구석을 다니며 화첩 200여 권을 채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6.25사변으로 끊긴 한국 산수화의 절정 금강산을 마음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90년대 초부터 휴전선 비무장지대, 백두산, 회령을 기웃거리며 멀리서나마 북한땅을그렸습니다. '98년 새해 아침 방송국 한 프로에서 나에게 황당한 희망을 물어왔습니다. 그 대답은 금강산 스케치였고 정말 그 해 1998년 11월 저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여러 화우와 미술협회에 동행을 권장했으나 이때 북한은 상당한 베일 속에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결국 저 혼자 실향민들과 금강산기행을 시작했습니다. 꿈과 노랫말로만 들었던 만물상을 지나서 천선대 같은 금강산 꼭대기에는 제가 남측사람으로서는 처녀봉을 처음으로 정복한 것 같았습니다. 다시 찾은 한국의 산수의 진경을 현지에서 100여 점을 전시까지 하게 됩니다.
권용섭 씨는 금강산에서 화폭에 담을 때 북한군에게 경고를 받기도 했단다.
권용섭: 이렇게 요란을 떨며 북한의 금강산을 휘젓고 산을 다니다 보니 본의 아니게 까다로운 촬영통제 안내원과의 접촉과 북한군을 칼 든 강도처럼 위협적으로 그렸다고 불려 가는 등 몇 번이나 경고를 받기도 해 굴욕적 합의 개방임을 느끼고 몇 달만 열고 다시 중단했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결국, 몇 해 전 우리 관광객이 북한군에 의해 사살되는 비극이 생기고야 금강산 관광이 종료된 것이잖습니까? 가슴 아픈 일도 많았지만, 아무튼 저에게는 꿈꾸던 대로 한국 산수화의 맥을 잇기 위해 모든 행사를 원대로 했던 행운이었습니다.
권용섭 씨는 금강산 산행에서 귀중한 한국 산수를 얻었다고 자랑한다.
권용섭: 근대 미술계에 최초로 금강산을 사생하여 한국 전통의 실지풍경을 발표한 것입니다. 당시는 한국 산수가 중국의 산수를 따 온 관념산수가 성행되어 한국산수의 정통성이 희박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미술계의 커다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이보다 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독도 화가 권용섭의 그림 세계 1부, 독도 사랑과 그의 그림세계를 찾아봤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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