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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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1
워싱턴 일원에서 소외된 곳에 위로와 한인사회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랑의 콘서트’를 여는 단체가 있어 주위의 칭송을 받고 있다. 바로 워싱턴 일원에 사는 동포들로 구성된 ‘워싱턴 조이 밴드’로 6년 전에 시작되어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돕기 위한 사랑의 콘서트와 이국땅에서 외롭게 보내는 노인들을 위한 사랑의 공연을 펼치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조이 밴드의 김성수 단장으로부터 활동의 이모저모를 알아본다.
워싱턴 조이 밴드를 이끄는 김성수 단장은 교회 목회자이자 음악인으로 동포사회 속에 음악을 전수하는 파수꾼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에서도 직장인들로 구성된 에바다 노래 선교단의 단원으로 공연활동에도 열성이었다고 한다.
김성수: 우리가 준비해 간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또 함께 부르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심신을 위로하고 다시 재충전할 수 있도록 공연했습니다.
김성수 단장은 한국에 있을 때 활동한 ‘에바다 노래선교단’에 대해서도 설명해 준다.
김성수: 1970년도부터 80년도까지 활동을 했고요. 그 선교단체는 나름대로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진 단체인데요. 테이프도 제작 보급도 했고, 1년에 몇 번씩 세종문화회관에서 정기공연도 하고 초 교파적인 그런 음악 선교단체입니다.
김성수 단장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지만, 대중 악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김성수: 다루는 악기는 기타, 베이스 기타, 키보드, 드럼 등 이런 리듬악기 건반악기를 전공한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배워서 요즈음 이야기하면 실용음악이라고 하는데요. 한국에서는 이 실용음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이 당시는 클래식 음악이 굉장히 한국에서 붐이 일어났는데 저는 그 당시는 클래식은 하지 않았고, 오늘날 이야기하면 현대 악기이지요. 그런 것들을 일부러 배웠습니다.
김성수 단장은 1970년 당시에는 클래식 악기가 대중화하던 때에 대중 악기로 교회 공연에서도 활동했다고 들려준다.
김성수: 클래식 악기는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까지 나서서 하기보다는 저는 현대 악기를 하기로 했어요. 그때 당시 드럼이나 기타를 치면 이상하게 생각했던 바로 70년대 80년대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클래식보다 대중성이 있는 악기들을 선호하곤 하는데 그때 대중적인 악기를 배우면서 교회 선교단을 나갈 때도 대중 악기를 사용했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리듬악기이기 때문에 대중들의 호흡을 맞추는 데는 아주 호응이 좋았고 저도 좋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한편, 현대 악기를 원하지 않는 교회도 있어 합창단만 가는 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성수 단장이 ‘워싱턴 조이 밴드’를 만들게 된 동기를 들려준다.
김성수: 이민 생활이 힘들지 않습니까? 아침 일찍 일을 나갔다. 저녁 늦게 들어오는 생활인데, 이렇게 일하는 것 외에 마음에 어떤 힘든 거라든지, 이민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없잖아요. 제가 기타나 드럼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동기는 기타를 치면서 같이 노래를 부르다 보니까? 마음의 응어리를 풀기도 하고요. 노래가 끝난 이후에는 서로 이민생활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이 시간이 유익하고 기다려지고 그랬어요.
김 단장은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공연을 나가게 됐다고 말한다
김성수: 우리만 이렇게 모여서 즐거움을 갖는 것보다는 소외된 곳에 가서 같이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주로 노인아파트, 양로원, 데이 케어센터에 가서 공연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갈 때 다과나 음료나 떡 과일 등을 가지고 가서 같이 노래도 하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서로 음식을 나누면서 대화도 하면서 느낀 것이 한인사회에서 정말 이런 공연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 이후부터 계속 진행해온 것이지요.
김성수 단장에게 ‘워싱턴 조이 밴드’의 단원 구성에 대해 물어봤다.
: 조이 밴드는 주부들로 구성된 밴드 팀이 있고요. 또 한팀은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진 팀 등 두 팀으로 되어 있는데요. 주부들로 구성된 조이 밴드는 사역이 한인커뮤니티에 속한 할머니 할아버지 등 소외된 곳을 찾아가 사랑을 나누고, 포근한 손길을 마음에 담아 사역하는 팀으로, 이분들은 어찌 보면 전문성을 가진 분들보다도 더 많이 활동하게 되지요. 우리 주변에 이웃사랑이 필요로하는 분들이 많아서 음악적인 기교도 중요하겠지만 함께 시간을 나누고 이야기하고 그분들의 애로사항이라든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그런 아픔, 이런 것을 들어주고 나눌 수 있는 사역이기 때문에 이민사회 속에서는 더 많이 활동해야 하고 필요한 팀이라 생각합니다.
조이 밴드는 단순한 위문 공연도 하지만 후원할 단체를 위해 모금 활동도 하고 있다고 김 단장은 전한다.
김성수: 정기 연주회는 1년에 한 번이나 두 번 하고 있고요. 작년에는 글러벌 어린이 재단 즉, 세계 30여 개국의 결식아동을 돕는 후원하는 단체예요. 이 단체를 후원하기 위해서 자선 음악회를 가졌고요. 한 5천여 달러를 후원했습니다. 재작년에는 워싱턴 디시를 비롯해서 메릴랜드 버지니아에 사는 폭력피해여성들을 돕는 ‘한미여성재단’ 단체가 있는데 한 3,000달러를 모금해 전달했고요.
김성수 단장에게 공연할 때의 반응은 어떤지 물어봤다. 외로움으로 한없이 우는 사람들이 있어 눈시울이 뜨거울 때도 있다고 전한다.
김성수: 주부들이 연주하니까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노래를 부를 때 같이 박수를 치기도 하고 또 빠른 템포의 노래를 할 때는 나와서 춤을 추기도 하고 느린 템포의 노래를 할 때는 옛날의 향수를 생각하면서 서로 같이 노래 하기도 하고 또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누기도 하지요. 심지어는 30년 넘게 고향에 가지 못하신 분도 많이 않습니까? 가족하고 오래 떨어져 있는 분들은 동요를 부를 때는 휠체어에 않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노래하면서 보게 돼요. 우리는 단순히 1시간 와서 공연하고 나눔을 갖고 가지만 이분들에게는 이 시간이 잊어버렸던 시간을 되찾기도 하고 또 자기 가슴 안에 가지고 있는 상처라든지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김성수 단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통일 후에 북한에 가서 공연하고 싶고 세계 한인들이 불러주면 어디든지 가서 공연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김성수: 통일이 된다면 올라가서 같이 통일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또 서로 음악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런 일에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워싱턴 조이 밴드 팀 안에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이 있는데요. 이 팀을 최소의 팀으로 구성해서 전 세계 어디에서 불러 준다면 복음을 들고 밴드와 함께 기쁨과 감동을 드릴 수 있는 그런 공연을 할 수 있도록 계획 중에 있습니다
김 단장에게 미래의 단원들 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도 물어봤다.
김성수: 일단은 함께 활동하려면 이 활동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하고요. 우리가 음악 활동을 하면서 소외되고 아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 하는데 동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보고요. 아무래도 음악이니까 음악적인 소질이 있어야겠고 음악적 소질이 조금 부족하다고 하면 연습해서라도 참가할 수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조이 밴드 김성수 단장으로부터 활동의 악단의 이모저모를 알아봤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조이 밴드의 김성수 단장으로부터 활동의 이모저모를 알아본다.
워싱턴 조이 밴드를 이끄는 김성수 단장은 교회 목회자이자 음악인으로 동포사회 속에 음악을 전수하는 파수꾼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에서도 직장인들로 구성된 에바다 노래 선교단의 단원으로 공연활동에도 열성이었다고 한다.
김성수: 우리가 준비해 간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또 함께 부르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심신을 위로하고 다시 재충전할 수 있도록 공연했습니다.
김성수 단장은 한국에 있을 때 활동한 ‘에바다 노래선교단’에 대해서도 설명해 준다.
김성수: 1970년도부터 80년도까지 활동을 했고요. 그 선교단체는 나름대로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진 단체인데요. 테이프도 제작 보급도 했고, 1년에 몇 번씩 세종문화회관에서 정기공연도 하고 초 교파적인 그런 음악 선교단체입니다.
김성수 단장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지만, 대중 악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김성수: 다루는 악기는 기타, 베이스 기타, 키보드, 드럼 등 이런 리듬악기 건반악기를 전공한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배워서 요즈음 이야기하면 실용음악이라고 하는데요. 한국에서는 이 실용음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이 당시는 클래식 음악이 굉장히 한국에서 붐이 일어났는데 저는 그 당시는 클래식은 하지 않았고, 오늘날 이야기하면 현대 악기이지요. 그런 것들을 일부러 배웠습니다.
김성수 단장은 1970년 당시에는 클래식 악기가 대중화하던 때에 대중 악기로 교회 공연에서도 활동했다고 들려준다.
김성수: 클래식 악기는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까지 나서서 하기보다는 저는 현대 악기를 하기로 했어요. 그때 당시 드럼이나 기타를 치면 이상하게 생각했던 바로 70년대 80년대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클래식보다 대중성이 있는 악기들을 선호하곤 하는데 그때 대중적인 악기를 배우면서 교회 선교단을 나갈 때도 대중 악기를 사용했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리듬악기이기 때문에 대중들의 호흡을 맞추는 데는 아주 호응이 좋았고 저도 좋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한편, 현대 악기를 원하지 않는 교회도 있어 합창단만 가는 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성수 단장이 ‘워싱턴 조이 밴드’를 만들게 된 동기를 들려준다.
김성수: 이민 생활이 힘들지 않습니까? 아침 일찍 일을 나갔다. 저녁 늦게 들어오는 생활인데, 이렇게 일하는 것 외에 마음에 어떤 힘든 거라든지, 이민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없잖아요. 제가 기타나 드럼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동기는 기타를 치면서 같이 노래를 부르다 보니까? 마음의 응어리를 풀기도 하고요. 노래가 끝난 이후에는 서로 이민생활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이 시간이 유익하고 기다려지고 그랬어요.
김 단장은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공연을 나가게 됐다고 말한다
김성수: 우리만 이렇게 모여서 즐거움을 갖는 것보다는 소외된 곳에 가서 같이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주로 노인아파트, 양로원, 데이 케어센터에 가서 공연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갈 때 다과나 음료나 떡 과일 등을 가지고 가서 같이 노래도 하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서로 음식을 나누면서 대화도 하면서 느낀 것이 한인사회에서 정말 이런 공연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 이후부터 계속 진행해온 것이지요.
김성수 단장에게 ‘워싱턴 조이 밴드’의 단원 구성에 대해 물어봤다.
: 조이 밴드는 주부들로 구성된 밴드 팀이 있고요. 또 한팀은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진 팀 등 두 팀으로 되어 있는데요. 주부들로 구성된 조이 밴드는 사역이 한인커뮤니티에 속한 할머니 할아버지 등 소외된 곳을 찾아가 사랑을 나누고, 포근한 손길을 마음에 담아 사역하는 팀으로, 이분들은 어찌 보면 전문성을 가진 분들보다도 더 많이 활동하게 되지요. 우리 주변에 이웃사랑이 필요로하는 분들이 많아서 음악적인 기교도 중요하겠지만 함께 시간을 나누고 이야기하고 그분들의 애로사항이라든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그런 아픔, 이런 것을 들어주고 나눌 수 있는 사역이기 때문에 이민사회 속에서는 더 많이 활동해야 하고 필요한 팀이라 생각합니다.
조이 밴드는 단순한 위문 공연도 하지만 후원할 단체를 위해 모금 활동도 하고 있다고 김 단장은 전한다.
김성수: 정기 연주회는 1년에 한 번이나 두 번 하고 있고요. 작년에는 글러벌 어린이 재단 즉, 세계 30여 개국의 결식아동을 돕는 후원하는 단체예요. 이 단체를 후원하기 위해서 자선 음악회를 가졌고요. 한 5천여 달러를 후원했습니다. 재작년에는 워싱턴 디시를 비롯해서 메릴랜드 버지니아에 사는 폭력피해여성들을 돕는 ‘한미여성재단’ 단체가 있는데 한 3,000달러를 모금해 전달했고요.
김성수 단장에게 공연할 때의 반응은 어떤지 물어봤다. 외로움으로 한없이 우는 사람들이 있어 눈시울이 뜨거울 때도 있다고 전한다.
김성수: 주부들이 연주하니까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노래를 부를 때 같이 박수를 치기도 하고 또 빠른 템포의 노래를 할 때는 나와서 춤을 추기도 하고 느린 템포의 노래를 할 때는 옛날의 향수를 생각하면서 서로 같이 노래 하기도 하고 또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누기도 하지요. 심지어는 30년 넘게 고향에 가지 못하신 분도 많이 않습니까? 가족하고 오래 떨어져 있는 분들은 동요를 부를 때는 휠체어에 않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노래하면서 보게 돼요. 우리는 단순히 1시간 와서 공연하고 나눔을 갖고 가지만 이분들에게는 이 시간이 잊어버렸던 시간을 되찾기도 하고 또 자기 가슴 안에 가지고 있는 상처라든지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김성수 단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통일 후에 북한에 가서 공연하고 싶고 세계 한인들이 불러주면 어디든지 가서 공연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김성수: 통일이 된다면 올라가서 같이 통일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또 서로 음악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런 일에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워싱턴 조이 밴드 팀 안에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이 있는데요. 이 팀을 최소의 팀으로 구성해서 전 세계 어디에서 불러 준다면 복음을 들고 밴드와 함께 기쁨과 감동을 드릴 수 있는 그런 공연을 할 수 있도록 계획 중에 있습니다
김 단장에게 미래의 단원들 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도 물어봤다.
김성수: 일단은 함께 활동하려면 이 활동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하고요. 우리가 음악 활동을 하면서 소외되고 아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 하는데 동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보고요. 아무래도 음악이니까 음악적인 소질이 있어야겠고 음악적 소질이 조금 부족하다고 하면 연습해서라도 참가할 수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조이 밴드 김성수 단장으로부터 활동의 악단의 이모저모를 알아봤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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