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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설날특집: 고향 그리워하는 해외 실향민들

2011-02-04
오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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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PHOTO/이현기

실향민들의 소망을 담은 글과 물품들이 걸려있는 자유의 다리.

2011년 2월 3일은 민족 고유의 명절 설날입니다. 설날을 맞아 한국에서는 민족의 대이동으로 어린 시절의 향수가 어린 고향을 찾아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또 해외에 사는 한인들도 가까운 이웃끼리 떡국을 나누며 한국 전통의 설날을 기렸습니다. 그러나 명절에도 1천만 실향민들과 2만여 명의 탈북자들은 그리운 고향을 밟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지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설날특집, 오늘은 고향을 그리는 해외 실향민들의 이야기로 함께합니다.

40여 년 동안 미국 생활을 한 실향민, 뉴욕 한인교회 장철우 목사는 고향을 떠나온 지 66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고향 땅의 모습이 선하다며 그리워합니다.

장 철우 목사: 이렇게 산천에 눈이 덮인 것을 보니까? 고향 생각이 더욱 납니다. 제 고향은 평안북도 운산 북진이라는 산골이지만 금이 많이 나는 곳인데 앞에도 뒤에도 산이 우뚝우뚝 솟은 그런 산악지대입니다. 1945년에 해방되어서 저희가 70이 넘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남겨두고 이제 저희들이 몇 달만 있으면 돌아옵니다 말씀드렸던 것이 벌써 66년이나 됐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다 돌아가셨겠지만 저의 기억에 떠오르는 그 흰 눈이 덮인 제 고향에 어린 시절 썰매를 타고 썰매에서 형들과 같이 내려오던 생각이 간절합니다.

장철우 목사는 통일이 돼 고향 땅에서 형제들과 얼싸 안고 통일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 가장 큰 소원입니다.

장 철우: 언제면 할머니 할아버지 묻혀 있는 산소를 돌아볼 수 있을까? 모든 생물은 귀소본능을 가졌다고 하는데 자기가 태어난 곳 자기의 고향을 가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본능입니다. 눈만 감으면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지 했는데 벌써 제 나이가 70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아 있을 동안에 고향을 보리라고 저는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루속히 조국의 통일되어서 그야말로 남북이 겨누던 총부리를 다 거두고 서로서로 형제들이 얼싸안고 통일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 고향 산천에서 다시 한번 통일의 잔치를 벌일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더욱이 우리 북한에 동족들이 추위에 배고픔에 굶주려서 죽어간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 더욱 가슴 아픕니다. 하루속히 우리 조국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축복된 땅에서 다시는 동족상잔이 없고 굶어 죽어가는 인권유린의 탄압에서 속히 벗어나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그날을 오기를 기도합니다.

호주에 사는 실향민 김 할아버지는 14살 때 고향을 떠나 어느덧 6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고향 언저리에서 다정한 친구들과 놀던 생각이 난다고 회고합니다.

김 할아버지: 저는 고향에서 국민학교에 다녔고요. 중학교는 장현에 있는 학교에 다녔어요. 중학교 입학해서 1학년 다니다가 왔어요. 내 웃동네에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하고 놀던 생각이 지금 50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친구의 꿈을 꾸고 그래요.

김 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친구에게 띄우는 편지입니다.

김 할아버지: 혹 이 방송을 들을는지 몰라도 친구 연 군이거든요. 제가 얼마 전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올해나 후년에 한번 북한에 가려고 하는데 살아서 꼭 한번 만나기 바란다. 그리고 내 조카도 찾으러 가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을 주선해주고 또 형님들은 살아 있는지 몰라도 한 번 꼭 만나서 옛날이야기 하면서 우리 즐거운 시간 갖기를 바란다. 꼭 한번 만나보자!

개성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어린 시절 미역 냉국을 먹던 일을 지금도 그리워합니다.

김 할머니: 우리 어렸을 때 생각하면 용수산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병, 커다란 병을 들고 뛰어가서 산의 물을 담아와서 미역 냉국을 타 먹곤 했는데 그 당시는 냉장고도 없던 시절 아닙니까? 산에 가서 그 물을 떠다가 미역냉국 말아서 점심 먹고 참 깨끗하고 좋은 곳입니다. 철로 길 넘어가면은 과수원도 많고 땅콩밭도 많습니다.

김 할머니가 북한에 있는 동생에게 띄우는 사연입니다.

김 할머니: 살아 있어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을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언니로서 이날까지 동생들과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살았었는데 용케도 오래 사셔서 87세까지 엄마도 아빠도 사셨단다. 늘 너희를 그리워하시면서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단다. 빨리 통일이 돼서 살아 있으면 만났으면 좋겠는데 나도 70살이 넘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통일이 되기를 기원한다. 지금 만나면 얼굴이나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기 전에 만날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하루속히 통일되기를 기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게 해주시면 만날 수 있을 텐데 기도하는 길밖에는 없구나. 살아 있다면 몸 건강이 있기를 바란다.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에 사는 한 할아버지는 나 죽거든 고향에 가까운 강변에 뿌려 달라며 향수를 달랩니다.

한 할아버지: 지금 북한땅에서 아픔과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계시는 고향의 많은 어르신과 사랑하는 친구들 언젠가는 다가올 통일의 그날까지 여러분 잘 참아내시고 건강하시기를 두손모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캐나다에 사는 이 할아버지는 고향이 어떻게 변했는지 가보고 싶다고 고향 그리는 마음을 전합니다.

이 할아버지: 고향은 용천이니까 가끔 여름방학 때나 겨울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면 시골 우리 고향 친구들이 줄줄이 따라다니던 일이 생각나서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을 해보고 살아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생각만 자꾸 나요. 제가 어렸을 때 놀던 동내가 생각나고 같이 놀던 친구들이 생각나는데, 항상 가지고 있는 제 마음입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황 할아버지는 새로운 해에 고향 땅을 밟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황 할아버지: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크지요. 특히 이 설날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 생각하면 속히 통일돼야겠는데 실상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새로운 해를 맞아 새로운 소망 가운데 건강한 몸을 유지하면서 고향 땅을 밟을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최상의 우리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보스턴에 사는 김 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나온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수 없어 마음 아프다고 이야기합니다.

김 할아버지: 다 돌아가시고 없을 거예요. 한 번 가서 찾아보려고 했더니 영 못 찿겠더라고요. 우리 조카랑 다 있는데요. 죽기 전에 통일되면 한 번 가서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버지니아에 사는 김 할아버지 고향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 최전방 전투에 참가해 희망도 가져 봤지만, 어언 60년이 훨씬 넘어 이제는 고향 가는 것은 포기했다고 마음 아픈 이야기 들려줍니다.

김 할아버지: 제가 찾는 사람들은 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윗사람들인데 다 돌아가셨고 그래서 고향 가기도 싫고요. 갈 생각도 없어요. 저는 잊어버리고 삽니다. 옛날에는 최전방에서 전쟁에 참가하고 제일 먼저 고향에 갈 거라고 후방에 가지도 않고 전쟁터에 지키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 가지고 어느 날 몇 시 몇 분까지 고향에 간다고 기억을 했어요. 내일 모래면 고향에 간다고 생각을 하고 그런데 이렇게 됐으니 어떻게 가겠습니까?

이경주 시인의 망향시 귀소 함께 듣습니다.

귀소(歸巢) 귀소의 본능을 가진 많은 동물들이 있다. 그 중에도 모천회귀성(母川回歸性)이 강한 연어는 망망대해 태평양에서 떼 지어 활개 치며 바다를 노래하다가 산란기가 되면 천문 항해를 하면서 자기가 탄생한 담수 하천을 찾아올라 가서 산란을 하고 거기서 죽는다고 한다.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북쪽으로 둔다고 하며 철새들도 계절 딸아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간다. 난 곳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 돌아간다는 말로 사람에게는 귀향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고향하면 아무래도 어머니 뱃속에서 고고의 울음소리 내며 태어난 안태, 조상의 삶의 오랜 때가 묻어 있고 부모와 형제의 따뜻한 사랑의 울타리 속에서 꽃피고 새우는 동산을 누비며 동무들과 천진 낭만하게 일곱 색 무지개 꿈을 키우던 곳을 말할 것 같다. 도랑에서 세추내(미꾸라지를 이르는 함흥지방의 사투리)를 쫓으며 동산에서 다람쥐, 산새 둥지를 뒤지며 훌쩍거리는 콧물을 손등으로 훔치던 곳. 거기에 무궁화, 노랑 개나니 울타리 안에 작은 학교 운동장이 있고, 교회당의 나무 종탑에서 “천당 만당”종소리가 울러 퍼지고, 아침저녁 까맣게 연기에 그을은 나무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초가지붕을 안개처럼 덮으며 봄 여름 가을 겨울 지침이 없이 뛰놀며 자란 곳 어머니 품같이 아늑한 그 곳이 내 고향이리. 명절이 되면 우리에게는 특별한 민족성이 발동한다. 객지에 생활근거를 두고 집과 고향을 떠나 살던 식객(食客)들 모두 고향에 귀소 한다. 곧 설날이 다가온다. 아무리 교통이 불편하고 힘들지라도 여러 날 전부터 고향엘 갈 준비로 들떠 있다. 포근한 고향에 내려가 부모형제 일가친척을 만나며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정다운 벗들과 추억을 벗기며 윷놀이 고스톱 등,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으로 객지의 회포를 푼다. 모두들 고향이 있기 때문에 평화하고 행복하다. 그런데 내게는 이런 아늑하고 평화한 고향이 없다. 그래서 남들이 찾아가는 고향이 늘 허기지게 고프다. 지학(志學)17세에 등진 고향, 삼팔선에 한탕강이 남북을 가르고 지금은 155마일 녹 쓴 철책이 휴전선으로 가로막아 넘을 수 업고 바라 볼 수 없는 그리움의 고향! 수십 성상 눈물 속에 그리던, 성천강(城川江)이 시내를 가르마 타고 반롱산(盤龍山) 구천각(九天閣)의 낭만이 있고 오로리(五老里) 백리 길 신흥철도 변의 능금나무, 금강산을 분재한 것 같은 귀주사(歸住寺) 절경, 서호만(西湖灣) 해수욕장 금모래에 파도가 출렁이고 유, 초, 중, 고, 대학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교육의 문화도시, 그리고 함흥차사(咸興差使)로 유병한 그곳이 내 고향 함흥! 수륙만리 태평양 건너 미국 땅 한 귀퉁이에서 어언 망구(望九)을 넘긴 나이에 어찌 고향 갈 요행을 바랄 수 있으려만 그래도 매몰찬 향수를 잊지 못해 오늘도 눈 감고 안태의 고향을 그리며 한탄의 눈물을 흘린다. 설 명절이 다가오니 고향의 그리움이 더 절절하게 그리워진다. 얼마나 이 땅에 발을 붙이고 더 살 수 있을 찌 한 해 한 해 백발이 짙어가며 줄음 살이 깊은 고랑같이 패어가며 눈과 귀가 어두워가는 신세라 서럽고 가련함이 눈가에 잔잔한 눈물이 맺힌다. 지금이라도 고향에 갈 수 만 있다면 태평양을 걸어서 넘고 철조망을 넘어 사지가 찢기더라도 연어와 같이 귀소하여 고향 산천에 뼈를 묻고 싶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설날특집, 오늘은 고향을 그리는 해외 실향민들의 이야기로 함께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 진행에 RFA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