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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서양화가 김숙자 씨① "젊음으로 그림 세계를 걷는다"

201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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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PHOTO/이현기

자신의 화실에서 작품 구상 하고 있는 서양화가 김숙자 씨.

올해 71살인 서양화가 김숙자 씨에게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김숙자 씨가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다섯 살 때니 벌써 66년째 작품 활동 중이다. 젊을 때나 나이 들어서나 그의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돈다. 바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미술의 대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2009년 미국의 대표 현대미술 작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최근에는 월드 와이드 아트 북 (WORLDWIDE ART BOOK) 출판사가 선정, 발간하는 ‘2010년의 대가’(INTERNATIONAL CONTEMPORARY MASTERS OF 2010) 초대작가(INVITED ARTIST)로 초청받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명실상부 미술계가 인정하는 ‘대가’가 된 것이다. 재미동포로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일원에서 활동하는 서양화가 김숙자 씨의 그림세계, 제1부 ‘젊음으로 그림 세계를 걷는다 ‘를 함께한다.

서양화가 김숙자 씨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가 그려준 그림을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어린 시절 방바닥에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리다 부모의 꾸중을 들으면서 화가로서 재질을 키워나갔는지도 모른다. 김숙자 씨의 어린 시절 회고다.

김숙자: 제 기억으로는 3-4살 때에 아버지가 그려주신 그림 ‘벌거벗은 아기가 손가락 빠는’ 그림을 보고 아주 좋아서 아하하 하며 웃던 일, 또 아버지가 싸리 빗자루에서 싸릿대 하나 빼서 지게 만들고 놀아 주시던 일, 또 제가 벽에나 방바닥에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리던 일, 그래서 부모님께서 연필과 종이를 주시고 나중에는 크레용을 사 주셨던 일, 또 그 재료로 집, 사람 꽃, 모자 등을 그리다가는 밖으로 나가 땅바닥에 흰 돌이나 나무 똥 가리로 땅을 파면서 그리다가 꾸중을 듣던 일 들이 생각납니다.

김숙자 씨는 국민학교 1학년 때 그림을 그려 담임선생님으로 부터 동그라미 넷을 받아 교실 벽에 걸어놓고 칭찬을 받았단다.

김숙자: 저는 어렸을 때에 이웃 애들과 숨바꼭질과 소꿉장난도 하며 잘 어울리면서 컸습니다. 그러는 중에 충주 교현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1학년 때 미술 시간에는 학교 뒷동산에 올라가 학교와 운동장을 그렸지요. 담임 윤 선생님께서 그림을 보시고 놀라시며 동그라미 넷을 둘러서 벽에다 걸고 칭찬해 주셨지요. 저는 그 후에 더욱 열심히 그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에 어떻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림을 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국민학교 2학년 때에 그린 분홍색 작약 꽃이 우리 학교 대표로 충청북도 도청에서 열리는 미술전시회에 출품되었습니다.

김숙자 씨는 미술 외에 다른 예능에도 자질이 있어 연극도 했단다

김숙자: 저는 연극에도 흥미가 많아서 학예회 때에 연극, 봄 소식에서 개나리꽃 역할, 할아버지와 즐거운 놀이에서 큰 손녀 역할, 숨바꼭질에서 꼴짜역 등을 하며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주일학교에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나 저의 아버지가 담임교사일 때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김숙자 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으며 중학교 입학 때 국가고사를 치른 경험도 들려준다.

김숙자: 625전쟁 수복 후에는 6학년이 되었는데 이때 입학시험이 국가고사로 치러지기 때문에 밤, 낮으로 시험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이 국가고사가 없어졌지요. 저는 500점 만점에 302점으로 충주여자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김숙자 씨의 미술 세계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중학교 때 충주지역 미술전시회에서 가을 풍경으로 우수상을 받는다. 그러나 첫 수상작품이 분실되어 지금도 보고 싶단다.

김숙자: 중학교 미술 선생님은 교감 겸 미술과 붓글씨를 가르치시는 이상훈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비너스와 다른 석고들을 준비해 놓고 특별활동 시간에 뎃상을 가르치셨지요. 붓글씨 시간에는 5분씩 눈을 감고 명상을 시킵니다. 제가 2학년이 되든 해에 충주시내 중, 고등학교 미술전시회에 저의 작품 ‘볏단을 쌓은 가을 풍경’과 ‘낙엽이 지는 풍경’ 두 점을 출품했는데 각각 우수상과 입선의 상을 받았습니다.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50리 떨어진 수완보에서 열리는 미술전시회에 찬조 작품으로 보낸 것이 오는 도중에 분실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가을이 오면 그 두 작품이 보고 싶습니다.

김숙자 씨는 할아버지가 한일합방에 반대해 일본순사에게 쫓겨 성공회에 피신하다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수녀원에 지원하기도 했다.

김숙자: 저의 집 형편이 어려워 저는 수녀원 입학을 지원했는데 그곳에서 소식 오기를 아직 너무 어리니 좀 더 커서 결정하면 받아 주겠다고 하는 소식이 왔지요. 그때 저는 충주여자중학교를 졸업했고 충주여자고등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고 반에서는 문화부장이 되었지요. 그러나 1학년 말쯤에 수업료를 못 내서 쫓겨 다녔습니다.

김숙자 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간호학교 길을 택한다.

김숙자: 저는 공부할 길만 있다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마음으로 입학원서와 신부님의 추천서를 제출하고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하였고 기숙사에 입사했습니다.

김숙자 씨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숙자: 이 학교는 제칠 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재단에서 운영하는 규율이 철저하고 우리 자신이 하는 일들은 남을 도우며 몸을 치료하는 것만이 아니라 영혼을 구하는 크나큰 사명감으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열심히 배우게 했습니다.

김숙자 씨가 고통의 아픔을 끈질긴 인내로 이겨낸 이야기다.

김숙자: 저는 간호사와 조산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배우고 실습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저는 힘들었던지 왼쪽 발목이 붉게 붓고 아프기 시작해 두 달간이나 실습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근화 원장님의 좋은 치료와 미제 치료 약 그리고 선배들이 해준 수 치료들, 그보다 더 큰 하나님 은혜로 관절이 완전히 낳았습니다. 3월이 졸업이었는데 두 달간의 실습을 마치고 5월에야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김숙자 씨의 그림세계는 끝없이 펼쳐져 간다. 바로 간호사 공부 중에도 그림을 그려 환자들을 위로해 주었다.

김숙자: 저는 학생 시절에 공부와 실습만 끝나면 수채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지요. 환자 방에 꽃이 있으면 그것을 그려 환자에게 주기도 하면서, 내가 졸업 후에는 꼭 홍익대학을 가서 그림을 전공하리라는 마음을 굳게 가졌습니다. 이때 병원에서는 과마다 연구 발표가 1달간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제가 붓글씨와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과마다 불러 다니며 1달간 쓰고 그리고 해서 도와 드렸지요

김숙자 씨는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고아원에서 양호교사로 일하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으로 옮겨 일한다.

김숙자: 저는 1959년에 서울 위생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2-3개월간 성애 고아원에서 양호교사로 고아들을 치료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성애 유치원에서 미술 지도도 했습니다. 같은 해 이근화 원장님의 추천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김숙자 씨가 이렇게 간호사로 일하면서도 그림공부에 혼신을 다한 열정은 바로 인간 승리의 이야기다

김숙자: 1960년 2월 어느 날 야근을 하다가 신문에서 서라벌 예술대학 장학생 선발이란 기사를 보고 내일 아침에 원서를 내야지 하는 결심을 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시험 날은 가까이 다가오고 마음만 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지요. “하나님 저는 임시 공무원으로 봉급 500원입니다. 꼭 장학생으로 입학시켜 주십시오. 내복을 한 벌 사려던 돈으로 원서사고,사감 선생님께 500원을 꿨습니다. 불쌍히 여기사 꼭 그림 공부를 하게 해 주옵소서 ” 제가 날마다 그렇게 기도하는 동안에 시험 날이 왔습니다. 그날도 저는 밤새도록 전염병 환자들을 간호하다가 잠도 못 잔 채 시험장으로 갔습니다. 데생 시험은 전에 연습하던 비너스 석고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정신통일을 하여 열심히 그렸고 발표 날이 왔지요. 그날은 아침 근무가 되어 전화로 교무과 직원에게 부탁했는데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축하합니다. 장학생으로 합격했으니 입학식에 꼭 오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때 저는 수화기를 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뛰었지요. 그런데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4 19혁명이 났습니다. 그 후에 저는 5급 갑에 정식 공무원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복을 못 입은 채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되었습니다.

김숙자 씨 주경야독의 열정을 들으면 대가임을 짐작하게 한다.

김숙자: 저는 병원에서 야근하고 낮에는 열심히 기쁜 마음으로 배웠습니다. 봄, 가을이면 장질부사, 이질, 성홍열 등등의 환자들 여름철에는 뇌염 환자들, 여러 가지 전염병 환자들을 간호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세월도 빨리 지나고 졸업을 했습니다. 1963년에는 소원하던 홍익대학에 편입하여 서양화 유화를 전공하고 1965년 홍대를 졸업했습니다. 저는 더 연구해서 대가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홍익대학원을 7명의 합격자 중 유일무이하게 여학생으로 입학했지요. 저는 김원 지도 교수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중에 인체 해부학을 부전공으로 한 논문을 쓰기 위해 인체 해부학을 연구하기로 마음에 결정하고 교수님들께 부탁 했습니다. 노병호 내과 교수님과 장가영 해부학 교수님의 주선으로 1965년 1년간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인체 해부를 공부했습니다.

김숙자 씨의 첫 개인전 소식도 들어보자!

김숙자: 저는 홍익대학원과 같은 시기에 양쪽 학교를 오고 가면서 무척 바쁘게 그리고 기쁨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는 중에 목우회 공모전에 출품작 풍경 A가 입선되어 경복궁 미술관에서 1달간 전시되었고, 1967년에는 유순한 간호과장님의 주선으로 메디칼 센터에 있는 SCANDINAVIAN HOUSE에서 저의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김숙자 씨는 1967년 석사학위를 받은 후 미술 연구소를 열고 학생들을 지도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사정 등 더 그림공부의 꿈을 위해 이민을 생각하게 된다

김숙자: 저는 불광동에 미술 연구소를 열고 ‘샛별 미술실’이란 간판을 걸었습니다. 저는 김명학 씨와 결혼했고 아들도 낳았습니다. 어린이들을 유치원 식으로 가르치고 그림지도를 하여 여러 미술대회에 참가시켰고 특선, 가작, 장려상, 입선 등의 상들을 타오게 했지요. 오후에는 중고생, 어른, 대학 입시생들을 지도했습니다. 저의 남편은 일본어 강사를 채용하여 일어학원을 했습니다. 그렇게 6-7년이 지나는 동안에 저의 대가의 꿈은 점점 멀어만 가고 경제 사정도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캐나다나 미국 등의 이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서양화가 김숙자 씨의 그림세계, 제1부 ‘젊음으로 그림 세계를 걷는다 ‘를 함께했다. 다음 시간에는 김숙자 씨가 미국에서 본격적인 미술가의 길을 걷는 제2부 '노력은 꿈을 이룬다.' 편이 방송된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