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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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7
미국의 수도 워싱턴 인근 북버지니아 사는 이경주 시인이 한국 조선문학사가 제정하는 2009년 조선문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조선문인상은 매년 해당 연도에 가장 활발하게 창작활동하고 문인회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문인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올해 82세의 이경주 시인의 왕성한 활동에 미주 한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경주 시인은 수상 소감으로 이런 귀한 상을 받게 돼 기쁘다며 앞으로 창작활동에 더욱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함경북도 성진군 출생인 이경주 시인은 고려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시 사관학교 수료 후 중위로 복무한 이씨는 전상으로 명예 제대를 한 후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조선문학에 1951년도에 시로 등단한다. 그리고 1995년 미국 버지니아에 이민 온 후 2003년 조선문학에 시 ‘바위’ 등으로 등단했다. 2005년 3월 시집 ‘그루터기에 핀 손다리’ 2008년 8월 시집 ‘노을 진 들녘에 선 사슴의 노래’, 2008년 11월 시집 ‘낙조에 구르는 조약돌’ 등을 펴낸 바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실향민으로 미국에 사는 이경주 시인의 시 세계를 찾아가본다.
이경주 시인은 어릴 적 막막 산골에서 자연을 벗 삼아 시인으로서의 꿈을 이뤄 나갔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경주: 저의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군입니다. 아주 시골 중에 시골이고,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20가호가 살았는가 기억됩니다. 이곳에는 정규 학교도 없고 흔히 말하는 분교도 아니지요. 초등학교 4학년 까지만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아주 시골인데 그곳에서 자라다가 아버지가 일찍 세상 떠나신 후 원적지인 함경남도 함흥에 왔어요. 함흥에서 성장했거든요. 함흥은 그때 신흥도시로서 교육도시이고, 작은 시에 많은 학교가 있는 교육열이 높은 도시였어요. 이곳에서 자라면서 꿈을 키웠지요.
이경주 시인은 어린 시절이지만 공산주의가 싫어서 북한을 떠났다고 한다.
이경주: 해방되어서 소위 이념 사상 때문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피부로 와 닫게 되고 그때 사실 어려서 잘 몰랐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과는 전혀 맞지를 않아서 북한사상을 배격하면서 더는 있지 못하게 됐지요.
이경주 시인은 어린 시절 함흥 3 13학생 운동을 겪으면서 성장했으며, 혈혈단신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넘어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크단다.
이경주: 사실 회고하니까!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추억이 없어요. 너무 일찍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고향이 그립고 향수에 젖어서 80 넘어서 지금까지도 늘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그립습니다. 언제 고향에 가 볼지 참 지금이래도 걸어서 가라면 천 리 길 만 리 길도 걸어서 가 보고 싶군요.
이경주 시인에게 망향에 대한 그리움이 시인되게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북한에서 숨어 살 때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활동은 미국에 이민 온 후부터라고 이야기한다.
이경주: 제가 사실상 한동안 북한에서 숨어서 지냈어요. 북한당국자들이 귀찮게 굴고 또 좀 잡혀 들어가 있기도 했어요. 잡혀 있다가 도망쳐 나와서 숨어 있었어요. 숨어 있는 동안에 그때 글을 쓰기 시작하다 보니까? 글의 묘미랄까 가슴으로 쓰는 글에 대해 칭송을 받았어요. 제가 미국에 이민 와서 시간이 있으니까? 고향을 생각하며 망향에 대한 시상이 우러나오고 그것을 표현하다 보니까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곳 한인 언론에 기고해 함께 나누게 되는 계기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점차 글을 쓰게 되고 제가 조선문학에 등단하게 된 것은 1951년도에 시로 등단했어요. 그리고 지난해에는 조선문학에 수필로도 등단했어요. 그래서 시인 수필가가 됐지요.
이경주 시인은 워싱턴 일원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문학창작을 지도하고 있다.
이경주: 워싱턴 중앙 시니어 센터와 메시아 평생 교육원에 나가서 문학창작을 가르치고 있어요. 중앙시니어 센터는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그리고 그동안 시집을 3권을 냈지요.
이경주 시인에게 실향의 한이 담긴 시가 많으냐고 물었다. 고향에 대한 향수가 가득하단다.
: 아무래도 시는 사실상 그리움과 아픔과 눈물 속에서 시상을 갖게 되고 그래서 시를 쓴 것 같아요. 저의 시에는 향수 그리움과 계절 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경주 시인의 첫 시집에 실린 ‘고향에 가면’ 들어본다.
구름만 내왕하는 고향
이정표조차 없는 삼팔선 북녘
만약 다시 고향에 가면
그 옛날 개구쟁이로 뛰놀던
동구 밖 금잔디에
원 없이 뒹굴리다.
돌배나무 우듬지에 걸린
꼬리 연도 찾아보고
콩서리 참외 서리
말썽 일던 밭고랑도 돌아보고
그러다 옛친구 만나며
손잡고 냇가에 발가벗고 물장구치리다.
버들개지 밑에 숨은 모래무지 버들붕어 쉿 쉿 쫓아 보리다.
덜커덩덜커덩 철 다리 구르며 목신 울음의 철마에 실려
정든 고향 찾는 길손 향해 높이 손을 흘들리라
채송화 맨드라미 나팔꽃 피고
담장이 넝쿨 뒤집어쓴
흙각담 황토 땅에
맨발 벗고 서서 흙내음 맡으며
거미줄 잠자리 채로 나비 잠자리도 잡으리
노을이 서산에 물들고
긴 그림자 키를 넘을 때
초가집 지붕 위로
흰 연기 머리 풀고
멀리 작은 교회당의 종소리 울리면
아련한 추억의 조약돌 찾아 말없이 걸으리
고향에 가면
이경주 시인은 지난해 10월 수필가로 등단했다. 이렇게 나이 들어 수필가로 등단한 소감을 물어봤다. 나이 들어 글과 함께해 행복하단다.
이경주: 새벽에 샘솟는 옹달샘 만난 토끼 가슴 같습니다. 그랬어요. 수필 자체는 생각나는 데로 형식 없이 써 나가는 산문이지요. 마치 구름 속에 달 가듯, 소슬바람에 오동잎 떨어지듯, 먹물 먹은 붓끝이 초소를 휘감는 듯, 편하게 쓰는 글 사람으로 치면 정말 성품 좋고 심성이 고운 소유자같이 시와 다르게 수필을 쓰게 되니까 좀 편안하고 또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그런 게 수필의 묘미가 아닌가 생각해서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계속해서 시와 수필을 같이 써 나가면서 남은 삶을 즐겨볼까 생각합니다.
실향민으로서 이경주 시인이 북한동포에게 전해주는 평화의 인사다.
이경주: 저도 80살이 넘었는데, 북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어려우니까? 같은 연대의 친구들은 타계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북한동포들의 삶의 현실을 뉴스를 통해 보는 거와 같이 어떤 면은 그 이상 더 처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저는 확신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북한에서 해방 후에 살았봤기 때문에 오죽했으면 제가 부모 형제 다 두고 혈혈단신으로 북한을 나와 남한에서 사고무친 어려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짐작합니다. 북한생활이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굶어 죽는 그 현실을 실제로 남한이나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은 그런 실상을 잘 이해 하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고 있지요. 사실상 지금 현실은 너무나 참담하고 암담하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북한동포들의 삶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 될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로 물론 더 끈질기고 힘들게 악착같이 견디다가 우리 남북이 통일되는 날 같이 만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또 그날이 이루어지기를 신에게 기도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의 위정자들이 하는 것이 너무나 악랄하고 저들이 스스로 자승자박하는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그런 현실로 보고 있습니다. 핵이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핵은 사람을 죽이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북한 동포들에게 말로라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좀 더 참고 이를 악물고 기다리고 통일이 되는 날까지 참고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경주 시인은 세계실향민들에게 희망을 품자고 말한다.
이경주: 실향은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실향민들! 말 자체로 고향을 잃은 몸이 아닙니까? 우리가 그 실향민들의 아픔을 일일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픔 참 간고등어와 같이 고등어휘에 소금을 뿌려서 썩지 않도록 말리는 그런 심정으로 참고 견디고 모질게 모질게 힘들더라도 참아 다시 고향을 밟을 그날을 생각하며, 아직도 희망이 있어요. 무슨 희망이냐고요. 고향을 바라보고 고향에 갈 수 있다. 언젠가는 고향에 가는 희망이 있으니까? 그 희망의 줄을 놓지 말고 힘차게 굳세게 살기를 실향민의 한 사람으로서 바랄 뿐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실향민으로 미국에 사는 이경주 시인의 시 세계를 찾아가봤다. 세계의 한국인 기획,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함경북도 성진군 출생인 이경주 시인은 고려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시 사관학교 수료 후 중위로 복무한 이씨는 전상으로 명예 제대를 한 후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조선문학에 1951년도에 시로 등단한다. 그리고 1995년 미국 버지니아에 이민 온 후 2003년 조선문학에 시 ‘바위’ 등으로 등단했다. 2005년 3월 시집 ‘그루터기에 핀 손다리’ 2008년 8월 시집 ‘노을 진 들녘에 선 사슴의 노래’, 2008년 11월 시집 ‘낙조에 구르는 조약돌’ 등을 펴낸 바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실향민으로 미국에 사는 이경주 시인의 시 세계를 찾아가본다.
이경주 시인은 어릴 적 막막 산골에서 자연을 벗 삼아 시인으로서의 꿈을 이뤄 나갔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경주: 저의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군입니다. 아주 시골 중에 시골이고,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20가호가 살았는가 기억됩니다. 이곳에는 정규 학교도 없고 흔히 말하는 분교도 아니지요. 초등학교 4학년 까지만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아주 시골인데 그곳에서 자라다가 아버지가 일찍 세상 떠나신 후 원적지인 함경남도 함흥에 왔어요. 함흥에서 성장했거든요. 함흥은 그때 신흥도시로서 교육도시이고, 작은 시에 많은 학교가 있는 교육열이 높은 도시였어요. 이곳에서 자라면서 꿈을 키웠지요.
이경주 시인은 어린 시절이지만 공산주의가 싫어서 북한을 떠났다고 한다.
이경주: 해방되어서 소위 이념 사상 때문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피부로 와 닫게 되고 그때 사실 어려서 잘 몰랐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과는 전혀 맞지를 않아서 북한사상을 배격하면서 더는 있지 못하게 됐지요.
이경주 시인은 어린 시절 함흥 3 13학생 운동을 겪으면서 성장했으며, 혈혈단신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넘어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크단다.
이경주: 사실 회고하니까!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추억이 없어요. 너무 일찍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고향이 그립고 향수에 젖어서 80 넘어서 지금까지도 늘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그립습니다. 언제 고향에 가 볼지 참 지금이래도 걸어서 가라면 천 리 길 만 리 길도 걸어서 가 보고 싶군요.
이경주 시인에게 망향에 대한 그리움이 시인되게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북한에서 숨어 살 때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활동은 미국에 이민 온 후부터라고 이야기한다.
이경주: 제가 사실상 한동안 북한에서 숨어서 지냈어요. 북한당국자들이 귀찮게 굴고 또 좀 잡혀 들어가 있기도 했어요. 잡혀 있다가 도망쳐 나와서 숨어 있었어요. 숨어 있는 동안에 그때 글을 쓰기 시작하다 보니까? 글의 묘미랄까 가슴으로 쓰는 글에 대해 칭송을 받았어요. 제가 미국에 이민 와서 시간이 있으니까? 고향을 생각하며 망향에 대한 시상이 우러나오고 그것을 표현하다 보니까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곳 한인 언론에 기고해 함께 나누게 되는 계기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점차 글을 쓰게 되고 제가 조선문학에 등단하게 된 것은 1951년도에 시로 등단했어요. 그리고 지난해에는 조선문학에 수필로도 등단했어요. 그래서 시인 수필가가 됐지요.
이경주 시인은 워싱턴 일원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문학창작을 지도하고 있다.
이경주: 워싱턴 중앙 시니어 센터와 메시아 평생 교육원에 나가서 문학창작을 가르치고 있어요. 중앙시니어 센터는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그리고 그동안 시집을 3권을 냈지요.
이경주 시인에게 실향의 한이 담긴 시가 많으냐고 물었다. 고향에 대한 향수가 가득하단다.
: 아무래도 시는 사실상 그리움과 아픔과 눈물 속에서 시상을 갖게 되고 그래서 시를 쓴 것 같아요. 저의 시에는 향수 그리움과 계절 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경주 시인의 첫 시집에 실린 ‘고향에 가면’ 들어본다.
구름만 내왕하는 고향
이정표조차 없는 삼팔선 북녘
만약 다시 고향에 가면
그 옛날 개구쟁이로 뛰놀던
동구 밖 금잔디에
원 없이 뒹굴리다.
돌배나무 우듬지에 걸린
꼬리 연도 찾아보고
콩서리 참외 서리
말썽 일던 밭고랑도 돌아보고
그러다 옛친구 만나며
손잡고 냇가에 발가벗고 물장구치리다.
버들개지 밑에 숨은 모래무지 버들붕어 쉿 쉿 쫓아 보리다.
덜커덩덜커덩 철 다리 구르며 목신 울음의 철마에 실려
정든 고향 찾는 길손 향해 높이 손을 흘들리라
채송화 맨드라미 나팔꽃 피고
담장이 넝쿨 뒤집어쓴
흙각담 황토 땅에
맨발 벗고 서서 흙내음 맡으며
거미줄 잠자리 채로 나비 잠자리도 잡으리
노을이 서산에 물들고
긴 그림자 키를 넘을 때
초가집 지붕 위로
흰 연기 머리 풀고
멀리 작은 교회당의 종소리 울리면
아련한 추억의 조약돌 찾아 말없이 걸으리
고향에 가면
이경주 시인은 지난해 10월 수필가로 등단했다. 이렇게 나이 들어 수필가로 등단한 소감을 물어봤다. 나이 들어 글과 함께해 행복하단다.
이경주: 새벽에 샘솟는 옹달샘 만난 토끼 가슴 같습니다. 그랬어요. 수필 자체는 생각나는 데로 형식 없이 써 나가는 산문이지요. 마치 구름 속에 달 가듯, 소슬바람에 오동잎 떨어지듯, 먹물 먹은 붓끝이 초소를 휘감는 듯, 편하게 쓰는 글 사람으로 치면 정말 성품 좋고 심성이 고운 소유자같이 시와 다르게 수필을 쓰게 되니까 좀 편안하고 또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그런 게 수필의 묘미가 아닌가 생각해서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계속해서 시와 수필을 같이 써 나가면서 남은 삶을 즐겨볼까 생각합니다.
실향민으로서 이경주 시인이 북한동포에게 전해주는 평화의 인사다.
이경주: 저도 80살이 넘었는데, 북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어려우니까? 같은 연대의 친구들은 타계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북한동포들의 삶의 현실을 뉴스를 통해 보는 거와 같이 어떤 면은 그 이상 더 처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저는 확신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북한에서 해방 후에 살았봤기 때문에 오죽했으면 제가 부모 형제 다 두고 혈혈단신으로 북한을 나와 남한에서 사고무친 어려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짐작합니다. 북한생활이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굶어 죽는 그 현실을 실제로 남한이나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은 그런 실상을 잘 이해 하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고 있지요. 사실상 지금 현실은 너무나 참담하고 암담하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북한동포들의 삶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 될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로 물론 더 끈질기고 힘들게 악착같이 견디다가 우리 남북이 통일되는 날 같이 만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또 그날이 이루어지기를 신에게 기도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의 위정자들이 하는 것이 너무나 악랄하고 저들이 스스로 자승자박하는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그런 현실로 보고 있습니다. 핵이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핵은 사람을 죽이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북한 동포들에게 말로라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좀 더 참고 이를 악물고 기다리고 통일이 되는 날까지 참고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경주 시인은 세계실향민들에게 희망을 품자고 말한다.
이경주: 실향은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실향민들! 말 자체로 고향을 잃은 몸이 아닙니까? 우리가 그 실향민들의 아픔을 일일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픔 참 간고등어와 같이 고등어휘에 소금을 뿌려서 썩지 않도록 말리는 그런 심정으로 참고 견디고 모질게 모질게 힘들더라도 참아 다시 고향을 밟을 그날을 생각하며, 아직도 희망이 있어요. 무슨 희망이냐고요. 고향을 바라보고 고향에 갈 수 있다. 언젠가는 고향에 가는 희망이 있으니까? 그 희망의 줄을 놓지 말고 힘차게 굳세게 살기를 실향민의 한 사람으로서 바랄 뿐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실향민으로 미국에 사는 이경주 시인의 시 세계를 찾아가봤다. 세계의 한국인 기획,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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