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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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중남부의 휴스턴은 미국 텍사스 주의 가장 큰 도시이며, 미국 전체로는 네 번째로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도시이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이 휴스턴에서 우리 농악을 보급하며 행사 때마다 행사의 흥을 돋우며 한국의 문화를 전하는 단체가 있어 칭송을 받고 있다. 바로 평균 70세 나이의 어른 신들로 구성된 ‘휴스턴 농악단’이다. 휴스턴 농악단은 휴스턴에서 행해지는 크고 작은 행사에 한인들의 대표로 참가해 큰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어 박수 갈채를 보낸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7 순 후반의 나이에도 젊음을 구가하며 휴스턴 농악단의 단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상진 옹의 삶의 현장을 찾아간다.
이상진 단장이 한국의 멋이 담긴 농악을 언제부터 접했을까? 어린 시절 논농사 일을 돕던 때 벌써 꽹과리 쳤다고 한다. 이 단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저의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으로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2살 때 꿈꾼 것도 기억하고 있어요. 6살 때 아버님가 돌아가시고 형님이 일본 징용으로 끌려가 제가 어렸음에도 집에 가장으로 일찍이 동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7-8살째 어른들 논농사하는데 끼어서 꽹과리를 쳤던 이억이 납니다. 논물이 무릎까지 차서 옷을 다 적시면서 신 나게 꽹과리를 쳤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신바람이 납니다.
이상진 단장은 어린 시절 서울에서 한국 만담의 선구자인 장소팔 고춘자 씨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소문이 전해져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는 그 시절 어른들의 향수가 아닌가 싶다.
: 홍성중학을 가까스로 졸업했습니다. 서울 사촌 누이 집에 올라와서 공부하는 도중에 제가 꽹과리를 조금 친다는 소문이 나서 그 소문을 듣고 주위 분들이 저를 장소팔 고춘자 악극단에 들어가 배우라 해서 농악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 소문이 어머니에게 전해져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와 얼마나 저를 두들겨 팼는지 ‘네가 공부는 않고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 였습니다. 그때 당시 1주일에 한 두 번씩 나가서 공부하면서 꽹과리를 조금 배웠고 그 당시 장소팔 고춘자 씨로부터 배운 한 토막의 만담을 들려 드릴까 합니다.
이상진 단장의 한 토막의 만담이다.
: 진주라 천리 길을 내려왔다고!
한국 초창기 만담가로서 당시 장소팔 고춘자 씨는 어떤 분들이었는지 물어봤다. 이상진 단장은 어린 시절 그분들은 천재였다고 회고한다.
: 장소팔 고춘자 씨는 내가 지금 회고해도 천재라고 볼 수 있어요. 우리는 그분들을 발 벗고도 못 따라가요. 만담 등을 하실 때 넙슥 넙슥 하시는 말씀이었는데 정말 우리에게는 구수하게 들리면서 무어라 말씀드릴 바가 없네요. 아버님가 장에 갔다 오다 자기를 낳다고해서 장소팔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런 말씀을 하실 적에 정말 구수하고도 뭐라고 말할 수 없네요.
서울에서 학교 다니다가 방학 때 집에 가면 농악과 함께한 이야기이다. 어린 학창 시절이지만 흥을 돋우는데 신명 났다고 한다.
: 그렇게 어머니에게 두들겨 맞았지만 제가 농악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고향 사람들이 전해 듣고 명절 때 시골에 가면 그분들이 오라고 해서 같이 신이 나게 농악도 하고 정월 대보름이면 저를 앞장세워서 농악공연을 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도 어린 시절의 생각이 나는데 거의 70년이 다 되어 가지요.
이상진 단장은 16살에 6 25를 맞습니다. 운명의 시작일까? 시흥에서 미군 지프를 만난 것이 오늘의 미국에 살게 되는 동기가 된다.
: 그때 16살이었습니다. 제가 625때 한 일을 기억하면 14 후퇴 때 시흥까지 걸어서 내려갔었어요. 시흥에서 미군 지프가 지나가기에 손을 흔들었더니 미군 지프가 삐—하고 서더군요. 타라고 해서 그 지프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저를 싣고 자기들의 부대로 갔어요. 거기 주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경기도 연천인가 하는 미국부대로 기억합니다.
이상진 단장은 1957년 군에 입대했지만 우연한 일치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 57년도에 군에 입대했지요. 군에 입대해서 훈련소 8주를 졸업하고 다시 전라도 상무대에 포병학교에 갔습니다. 그때에 포병학교 65기 졸업반에 62명이 카추샤로 차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거기에 62명의 한 사람으로 끼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카추샤로 오게 된 거지요. 카추샤에 배치가 됐는데 저는 전방으로 소원했습니다. 전방으로 가게 되면 전에 있던 부대로 갈까 해서 지원했는데 다행히 제가 있던 부대가 아니고 바로 옆 부대로 배치받아서 근무하고 제대를 했지요. 그러니까 1959년도에 제대했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군에 있을 때는 주로 쿡으로 근무했으며 전역한 이후에도 쿡으로 한국과 월남 그리고 미국 관광선 그리고 휴스턴 생활까지 이어진다. 기나긴 젊은 시절 이 단장이 살아온 이야기이다.
: 제가 군에 입대해서 쿡으로 일을 많이 했지요. 그래서 나중엔 장교 클럽에서 일하게 됐고요. 제대한 후 다시 7사단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67년도에 월남을 갔었지요. 월남 갈 때 어느 회사에 배속되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월남 시장 개척이라고 해서 월남에 가서 취직했습니다. 취직하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마치 미군 해군 배 수리회사에 들어갔었지요. 그래서 거기 67년도에 배속을 받아서 70년도에 한국으로 나왔지요. 한국에 나와서 또다시 할 것이 없으니까? 그때 당시에 세운상가에 풍전호텔이 개관됐었습니다. 그래서 풍전호텔에 70년도에 개관할 때 일을 했지요. 그리고 다시 안양관광호텔 요리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안양관광호텔에서 71년도 72년도까지 근무를 하고 72년도에 관광선으로 왔습니다. 마이애미 포세돈 회사에 취직했지요. 그리고 거기서 74년도까지 여객선을 탔습니다. 그다음에 제가 미국에 온 동기는 그 배에서 휴가를 맞아서 미국 본토에 올라왔지요. 그때 당시에 휴스턴으로 왔습니다. 제 생각에 육지에 머물 생각을 하고 라마다 호텔에 취직 했었지요. 그래 라마다 호텔 지배인이 저를 잘 보았습니다. 그래서 74년도에 라마다 호텔에 취직해서 몇 년 근무를 했지요. 그러다 77년도에 하비 힐튼 호텔 개관식이 있었는데 거기 요리사 장의 명을 받았습니다.
이상진 단장이 미국에서 농악을 다시 시작하던 이야기를 들어보자!
76년도에 휴스턴에 한인들이 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무얼 해야만 조금 신이 나는 것을 할 수 있을까? 교포들이 얘기 해서 농익을 한번 시작해 볼까 해서 농악을 시작했습니다. 시작했는데 별로 빛을 못 봤어요. 그래서 중단을 했습니다.
이 단장은 1994년이 되어서야 정식 농악단을 구성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48년 만에 꽹과리를 다시 잡는 기쁨이 있었지만 처음 시작은 미비했다고 설명해준다.
: 휴스턴에서 농악을 시작한 것은 정착한 지 2년 만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농악을 시작해 보려 했으나 준비가 않 돼 포기하고 지내다가 동포사회가 커지면서 한인사회에 한국문화를 주류사회에 소개하는데 농악의 절실함을 깨닫고 분위기가 조성되어 드디어 94년 정식으로 단원들을 모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48년 만에 꽹과리를 다시 잡은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말이 창단이지 모든 준비가 부족해 제대로 준비도 못한 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18명의 단원이 모여 매일 연습을 하면서 빵과 라면을 먹으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때는 각자 호주머니를 털어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고 의상과 장비도 제일 싼 것으로 구입하여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아 더욱 힘들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주류사회 각종 행사에 한인사회 대표로 출전하면서 우리의 수고가 한인사회에 소개되면서 농악단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한인사회 발전과 더불어 농악단 발전을 위해 한인사회가 후원들을 해 줘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10여년 전 부터는 한인사회가 저희의 활동을 위하여 매년 후원을 해 주시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 책임감으로 더욱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휴스턴 농악단의 자랑을 들려준다!
: 휴스턴 한인 농악단 역사가 이제 18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50대였던 단원들이 이제 70 중반 80에 가까워졌습니다. 18명으로 시작했던 단원들의 숫자도 여자 10명 남자 20명으로 늘어 모두 30여 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휴스턴 농악단이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도 자랑한다.
: 저희의 활동이 본국에까지 인정되어 2002년 제 개인의 국무총리표창을 받은 바 있으며 2004년도에는 휴스턴 농악단 단체 이름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는 영광도 있었습니다. 또한, 지난해에는 제 개인의 대통령 표창을 받는 영광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덕분과 여러분의 후원 힘으로 모두 이뤄진 것 같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후세대 들에게 농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 2009년 한국 경기도 광명농악단이 이 휴스턴을 방문해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학생들로 구성된 농악단의 공연을 보면서 우리도 젊은이들에 대한 농악단 구성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학생으로부터 고등학생으로 구성해서 한 10여 명을 가르친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이 학생들이 대학을 가게 되니까! 모두가 다 흩어지게 되더군요. 그래서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또 젊은이들을 다시 구성하는 중입니다.
이상진 단장은 이제는 일 년에 15회 정도 공연하는 단체로 성장했다고 들려준다.
: 휴스턴 농악단 활동은 주로 미 주류사회 각종 행사 참여와 아시아 커뮤니티 행사에 한인사회 대표로 참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년에 활동하는 횟수는 대강 15회 정도 됩니다. 저희가 주로 하는 공연은 사물놀이와 마당놀이로 사물놀이는 주로 실내에서 하고 마당놀이는 야외에서 행사하고 있습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행진하는 공연 시는 지쳐서 낙오하는 분들도 생겨서 차들이 와서 실어가는 때도 있어, 후세에게 우리 고유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각 교회와 한인 학교 학생들의 지도 요청이 들어와 교실을 열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미흡한 상태라 안타깝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휴스턴 농악단 공연에 많은 외국인의 큰 호응을 받고 있다고 전한다.
: 1년에 한 번 씩 4월 인터내셔날 문화행사가 있는데 70개국 80여 개국의 각종문화가 참가합니다. 시가행진도 있고, 무대공연도 있습니다. 이 행사에 우리가 농악을 치고 나가면 저게 어느 나라냐! 코리아다 하면은 코리아 원더풀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나오고 사람들이 우리 농악에만 정신을 쏟고 몰려들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 이 늙은이들이라도 가슴이 정말 뾰개지는 것 같아요. 코리아 원더풀 소리를 들으면 더는 우리는 바라볼 게 없다. 이것으로서 우리 조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것이 큰 행사라는 것을 생각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환영해주고 칭찬을 해주는 그 힘으로 우리 회원들은 기가 죽지 않고 버텨 나가는 것 같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7 순 후반의 나이에도 젊음을 구가하며 휴스턴 농악단의 단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상진 옹의 삶의 현장을 찾았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7 순 후반의 나이에도 젊음을 구가하며 휴스턴 농악단의 단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상진 옹의 삶의 현장을 찾아간다.
이상진 단장이 한국의 멋이 담긴 농악을 언제부터 접했을까? 어린 시절 논농사 일을 돕던 때 벌써 꽹과리 쳤다고 한다. 이 단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저의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으로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2살 때 꿈꾼 것도 기억하고 있어요. 6살 때 아버님가 돌아가시고 형님이 일본 징용으로 끌려가 제가 어렸음에도 집에 가장으로 일찍이 동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7-8살째 어른들 논농사하는데 끼어서 꽹과리를 쳤던 이억이 납니다. 논물이 무릎까지 차서 옷을 다 적시면서 신 나게 꽹과리를 쳤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신바람이 납니다.
이상진 단장은 어린 시절 서울에서 한국 만담의 선구자인 장소팔 고춘자 씨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소문이 전해져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는 그 시절 어른들의 향수가 아닌가 싶다.
: 홍성중학을 가까스로 졸업했습니다. 서울 사촌 누이 집에 올라와서 공부하는 도중에 제가 꽹과리를 조금 친다는 소문이 나서 그 소문을 듣고 주위 분들이 저를 장소팔 고춘자 악극단에 들어가 배우라 해서 농악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 소문이 어머니에게 전해져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와 얼마나 저를 두들겨 팼는지 ‘네가 공부는 않고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 였습니다. 그때 당시 1주일에 한 두 번씩 나가서 공부하면서 꽹과리를 조금 배웠고 그 당시 장소팔 고춘자 씨로부터 배운 한 토막의 만담을 들려 드릴까 합니다.
이상진 단장의 한 토막의 만담이다.
: 진주라 천리 길을 내려왔다고!
한국 초창기 만담가로서 당시 장소팔 고춘자 씨는 어떤 분들이었는지 물어봤다. 이상진 단장은 어린 시절 그분들은 천재였다고 회고한다.
: 장소팔 고춘자 씨는 내가 지금 회고해도 천재라고 볼 수 있어요. 우리는 그분들을 발 벗고도 못 따라가요. 만담 등을 하실 때 넙슥 넙슥 하시는 말씀이었는데 정말 우리에게는 구수하게 들리면서 무어라 말씀드릴 바가 없네요. 아버님가 장에 갔다 오다 자기를 낳다고해서 장소팔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런 말씀을 하실 적에 정말 구수하고도 뭐라고 말할 수 없네요.
서울에서 학교 다니다가 방학 때 집에 가면 농악과 함께한 이야기이다. 어린 학창 시절이지만 흥을 돋우는데 신명 났다고 한다.
: 그렇게 어머니에게 두들겨 맞았지만 제가 농악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고향 사람들이 전해 듣고 명절 때 시골에 가면 그분들이 오라고 해서 같이 신이 나게 농악도 하고 정월 대보름이면 저를 앞장세워서 농악공연을 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도 어린 시절의 생각이 나는데 거의 70년이 다 되어 가지요.
이상진 단장은 16살에 6 25를 맞습니다. 운명의 시작일까? 시흥에서 미군 지프를 만난 것이 오늘의 미국에 살게 되는 동기가 된다.
: 그때 16살이었습니다. 제가 625때 한 일을 기억하면 14 후퇴 때 시흥까지 걸어서 내려갔었어요. 시흥에서 미군 지프가 지나가기에 손을 흔들었더니 미군 지프가 삐—하고 서더군요. 타라고 해서 그 지프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저를 싣고 자기들의 부대로 갔어요. 거기 주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경기도 연천인가 하는 미국부대로 기억합니다.
이상진 단장은 1957년 군에 입대했지만 우연한 일치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 57년도에 군에 입대했지요. 군에 입대해서 훈련소 8주를 졸업하고 다시 전라도 상무대에 포병학교에 갔습니다. 그때에 포병학교 65기 졸업반에 62명이 카추샤로 차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거기에 62명의 한 사람으로 끼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카추샤로 오게 된 거지요. 카추샤에 배치가 됐는데 저는 전방으로 소원했습니다. 전방으로 가게 되면 전에 있던 부대로 갈까 해서 지원했는데 다행히 제가 있던 부대가 아니고 바로 옆 부대로 배치받아서 근무하고 제대를 했지요. 그러니까 1959년도에 제대했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군에 있을 때는 주로 쿡으로 근무했으며 전역한 이후에도 쿡으로 한국과 월남 그리고 미국 관광선 그리고 휴스턴 생활까지 이어진다. 기나긴 젊은 시절 이 단장이 살아온 이야기이다.
: 제가 군에 입대해서 쿡으로 일을 많이 했지요. 그래서 나중엔 장교 클럽에서 일하게 됐고요. 제대한 후 다시 7사단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67년도에 월남을 갔었지요. 월남 갈 때 어느 회사에 배속되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월남 시장 개척이라고 해서 월남에 가서 취직했습니다. 취직하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마치 미군 해군 배 수리회사에 들어갔었지요. 그래서 거기 67년도에 배속을 받아서 70년도에 한국으로 나왔지요. 한국에 나와서 또다시 할 것이 없으니까? 그때 당시에 세운상가에 풍전호텔이 개관됐었습니다. 그래서 풍전호텔에 70년도에 개관할 때 일을 했지요. 그리고 다시 안양관광호텔 요리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안양관광호텔에서 71년도 72년도까지 근무를 하고 72년도에 관광선으로 왔습니다. 마이애미 포세돈 회사에 취직했지요. 그리고 거기서 74년도까지 여객선을 탔습니다. 그다음에 제가 미국에 온 동기는 그 배에서 휴가를 맞아서 미국 본토에 올라왔지요. 그때 당시에 휴스턴으로 왔습니다. 제 생각에 육지에 머물 생각을 하고 라마다 호텔에 취직 했었지요. 그래 라마다 호텔 지배인이 저를 잘 보았습니다. 그래서 74년도에 라마다 호텔에 취직해서 몇 년 근무를 했지요. 그러다 77년도에 하비 힐튼 호텔 개관식이 있었는데 거기 요리사 장의 명을 받았습니다.
이상진 단장이 미국에서 농악을 다시 시작하던 이야기를 들어보자!
76년도에 휴스턴에 한인들이 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무얼 해야만 조금 신이 나는 것을 할 수 있을까? 교포들이 얘기 해서 농익을 한번 시작해 볼까 해서 농악을 시작했습니다. 시작했는데 별로 빛을 못 봤어요. 그래서 중단을 했습니다.
이 단장은 1994년이 되어서야 정식 농악단을 구성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48년 만에 꽹과리를 다시 잡는 기쁨이 있었지만 처음 시작은 미비했다고 설명해준다.
: 휴스턴에서 농악을 시작한 것은 정착한 지 2년 만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농악을 시작해 보려 했으나 준비가 않 돼 포기하고 지내다가 동포사회가 커지면서 한인사회에 한국문화를 주류사회에 소개하는데 농악의 절실함을 깨닫고 분위기가 조성되어 드디어 94년 정식으로 단원들을 모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48년 만에 꽹과리를 다시 잡은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말이 창단이지 모든 준비가 부족해 제대로 준비도 못한 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18명의 단원이 모여 매일 연습을 하면서 빵과 라면을 먹으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때는 각자 호주머니를 털어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고 의상과 장비도 제일 싼 것으로 구입하여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아 더욱 힘들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주류사회 각종 행사에 한인사회 대표로 출전하면서 우리의 수고가 한인사회에 소개되면서 농악단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한인사회 발전과 더불어 농악단 발전을 위해 한인사회가 후원들을 해 줘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10여년 전 부터는 한인사회가 저희의 활동을 위하여 매년 후원을 해 주시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 책임감으로 더욱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휴스턴 농악단의 자랑을 들려준다!
: 휴스턴 한인 농악단 역사가 이제 18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50대였던 단원들이 이제 70 중반 80에 가까워졌습니다. 18명으로 시작했던 단원들의 숫자도 여자 10명 남자 20명으로 늘어 모두 30여 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휴스턴 농악단이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도 자랑한다.
: 저희의 활동이 본국에까지 인정되어 2002년 제 개인의 국무총리표창을 받은 바 있으며 2004년도에는 휴스턴 농악단 단체 이름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는 영광도 있었습니다. 또한, 지난해에는 제 개인의 대통령 표창을 받는 영광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덕분과 여러분의 후원 힘으로 모두 이뤄진 것 같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후세대 들에게 농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 2009년 한국 경기도 광명농악단이 이 휴스턴을 방문해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학생들로 구성된 농악단의 공연을 보면서 우리도 젊은이들에 대한 농악단 구성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학생으로부터 고등학생으로 구성해서 한 10여 명을 가르친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이 학생들이 대학을 가게 되니까! 모두가 다 흩어지게 되더군요. 그래서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또 젊은이들을 다시 구성하는 중입니다.
이상진 단장은 이제는 일 년에 15회 정도 공연하는 단체로 성장했다고 들려준다.
: 휴스턴 농악단 활동은 주로 미 주류사회 각종 행사 참여와 아시아 커뮤니티 행사에 한인사회 대표로 참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년에 활동하는 횟수는 대강 15회 정도 됩니다. 저희가 주로 하는 공연은 사물놀이와 마당놀이로 사물놀이는 주로 실내에서 하고 마당놀이는 야외에서 행사하고 있습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행진하는 공연 시는 지쳐서 낙오하는 분들도 생겨서 차들이 와서 실어가는 때도 있어, 후세에게 우리 고유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각 교회와 한인 학교 학생들의 지도 요청이 들어와 교실을 열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미흡한 상태라 안타깝습니다.
이상진 단장은 휴스턴 농악단 공연에 많은 외국인의 큰 호응을 받고 있다고 전한다.
: 1년에 한 번 씩 4월 인터내셔날 문화행사가 있는데 70개국 80여 개국의 각종문화가 참가합니다. 시가행진도 있고, 무대공연도 있습니다. 이 행사에 우리가 농악을 치고 나가면 저게 어느 나라냐! 코리아다 하면은 코리아 원더풀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나오고 사람들이 우리 농악에만 정신을 쏟고 몰려들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 이 늙은이들이라도 가슴이 정말 뾰개지는 것 같아요. 코리아 원더풀 소리를 들으면 더는 우리는 바라볼 게 없다. 이것으로서 우리 조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것이 큰 행사라는 것을 생각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환영해주고 칭찬을 해주는 그 힘으로 우리 회원들은 기가 죽지 않고 버텨 나가는 것 같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7 순 후반의 나이에도 젊음을 구가하며 휴스턴 농악단의 단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상진 옹의 삶의 현장을 찾았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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