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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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3
탈북인 최초로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가 있다. 그는 1979년 서부 군사분계선을 넘어 탈북한 북한 인민군 부 소대장 출신 안찬일 씨다. 삼팔선 지뢰밭을 헤집고 살아, 자유를 찾은 행운을 맞았지만, 아직도 어둠에 갇힌 북한동포를 생각하면 가슴 아프단다. 저 북쪽 북한땅을 바라보기라도 하면 가슴을 친단다. 그리고 북녘 땅에 자유와 평화가 깃드는 그날을 위해 밤낮으로 힘쓰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세계북한인총연맹 안찬일 총재의 삶의 역정 1부 ‘탈북으로 자유를 쟁취했다.’를 함께한다.
안찬일 씨는 1979년 7월 27일 서부 군사분계선을 넘어 탈북했다. 당시 젊고 유망한 북한군인으로 왜 북한을 탈출하게 됐냐고 물었다.
안찬일: 그렇게 높은 직은 아니었고요. 어쩌든 그 병사로서는 9년을 근무했으니까요. 비교적 군 복무기간이 길었고 고참까지 올라가서 사회로 제대해 나가느냐! 마느냐! 군에 계속 남느냐! 또 대학으로 가느냐! 그런 갈림길에서 북한을 탈출하게 됐습니다.
왜 남한으로 오려고 결심을 했을까 궁금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안찬일: 그때 사실 뭐 제가 북한을 탈출해 올 때는 30여 년 전이고 북한이 그때는 오늘날처럼 굶어 죽는 사람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든 북한사회가 잘못된 길로 간다는 것은 제 나이가 그때 25살밖에 안 됐지만, 어렴풋이 알게 됐고, 그래서 저는 그 군에 있으면서 노동당에 입당하고 나름대로 충성을 했는데 제대를 앞두고 사회로 나가야 해서 사회로 나가느니 군에 계속 있어야 하겠다. 그러려면 군관 학교를 나와야 하는데 군관학교를 희망했지만, 정치부에서 군관학교를 추천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대학을 가라 이렇게 대학을 추천해 줬습니다. 저는 사실 대학 1년을 다니다가 공부하기가 싫어서 군대에 와서 나름대로 혁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왔는데 다시 사회로 나가야 하는 환경에서 그때부터 북한사회가 상당히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으니까? 뭐! 좌절이 오고 그래서 저는 제 희망을 실현할 수 없는 이 사회에서 더는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서서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안찬일 씨에게 삼팔선 넘어 탈북 하던 때를 회고해 달라고 했다. 어떤 각오였을까?
안찬일: 제가 군에 있던 지역이 서부전선 판문점 우측 지역인데(남쪽에서 볼 때) 요즘 지뢰가 많이 흘러 내려오는 삼이천 그쪽 비무장지대 안에서 9년을 근무하다 보니까 그쪽 지리도 잘 알고 특히 그 지역은 고랑 포 제1 땅굴, 즉 북한이 남침용 재 1 땅굴이 74년 11월에 발견되면서 전 전선 휴전선 155마일에서 관심이 집중되던 지역이었습니다. 저는 남한으로 올 결심을 했지만 사실 남한으로 온다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철책에는 삼천삼백 볼트의 고압 전류가 흐르고 지뢰밭이고 그래서 그 4킬로미터의 비무장을 뚫고 남한 초소까지 간다. 즉 목숨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크지는 않았고, 그래서 저는 제가 가지고 있던 총에다 30발의 총알을 장전하면서 내가 이제 29명까지 나를 따라오면은 나의 동지들이었지만 나는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고 한발을 남겨서 자살할 수밖에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떠났는데 다행히 한 발도 쏘지 않았고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지뢰도 밟지 않고 휴전선을 넘어서 남쪽 국군 초소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탈북 하면서 고뇌가 많지 않았을까?. 정말 가야 하느냐 안가야 하느냐!
안찬일: 가장 큰 고뇌는 가족 문제입니다. 후방에 아버지와 동생들이 있었고 어머니는 제가 군 복무를 할 때 돌아가셨습니다. 만약에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아마 남쪽으로 올 생각을 안 했겠지요. 어떻게든 그 고통을 참고 그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썼을 텐데 일단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북쪽 체제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고 그래서 이제 휴전선을 넘기 전에 가족들의 희생을 좀 줄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만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가 썼습니다. 당원으로서 노동당 총 비서에서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그 목적은 가족들이 덜 희생을 당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썼지만, 오히려 그게 화근이 돼서 제가 후에 알아본 바로는 북한의 국가안전보위 부는 우리 가족을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 끌어갔습니다. 이것은 제가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이 사회주의는 원래 이런 것이 아니지 않느냐! 여러 가지 제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하면서 나는 그래서 남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합리화 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정당한 의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해서 저희 가족들이 희생당한 것,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제가 참 안타깝지만 뭐 오늘날 이뤄놓은 모든 것을 볼 때는 참 불가피한 희생이고 선택이었다. 이런 나름대로 위안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33년 전이지만 탈 북 당시 솔직히 북한은 어떤 나라였는지 물어봤다.
안찬일: 북한은 그 당시 제가 넘어오기 보름 전에 평양을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방에 근무하면서 평양에 갈 수 있었던 것은 평양 견학단이라는 데 모범적인 군인들을 뽑아서 가는 케이스로 가게 됐는데 그 당시 70년대 말이었고 평양은 사실 60년 말 70년대 초반까지는 그런대로 뭐 먹고 살만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양을 제가 79년 7월 초에 가 보니까? 상당히 백화점이나 상점의 줄이 너무 길게 늘어서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 뭔가 사회주의가 과거와는 다르게 다른 길로 가고 있다. 이런 판단을 하면서 저는 정치체제 면에서도 그 당시 김정일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 벌써 74년에 후계 체제가 등장해서 한 5년 지났으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당적지도나 뭐 유일적 지도체제니 하면서 2가지 선에서 북한주민을 정치조직을 통해서 통제가 강화되는 것 등을 보면서 저는 많은 의문점을 가지게 됐고 결국 이 사회를 내가 버려도 별로 손해 볼 것 없다. 나름대로 그런 판단이 섰습니다.
북한을 탈출하기 전 남한사회를 동경하게 된 배경도 물어봤다.
안찬일: 저는 휴전선에 근무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후방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그 당시는 남과 북이 심리전 방송을 하고 있다 보니까? 방송을 많이 들었고, 특히는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제가 있던 지역은 고랑포 지역 제 1 땅굴이 있었는데, 그 땅굴 지역에서 보면 가을이나 이런 때는 남쪽 지역에서 관광단이 많이 오곤 했습니다. 이 관광단을 보면 어른들뿐만 아니라 청소년들 심지어는 꼬마 어린이들까지 오는데 상당히 복장이 화려하고 칼라가 있고 아름답고 이런 걸 보면서 정치군관들이 말하기는 저 사람들은 전부 남한에서 부자들만 온다. 이렇게 말하지마는 그 숫자가 연간으로 따지면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계속 오는데 모든 사람이 부자일 수 있는가! 이런 의문도 들었고 그래서 아무래도 그런 시각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볼 수 있었다는 것, 남한 방송을 들었는데 남한 방송을 100% 믿을 수는 없지만 어쩌든 그 북한체제가 말하는 그런 것과는 다른 그런 진실한 국제적인 뉴스나 이런 것들을 들으면서 확실히 북한만이 아닌 또 다른 세계가 남쪽 땅에 존재할 것이라는 이런 희망과 기대를 가지게 됐습니다.
남한에서 처음으로 느낀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안찬일: 남한에 도착한 첫 순간부터 국군을 만날 때부터 상당히 놀라운 장면들을 많이 느꼈고 친절하고 그런 데에 대해서 충격을 받았는데 자유라고 할 때 제가 여러 가지 자유를 많이 느꼈지만,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는데 제가 사고 싶은 물건들, 그 당시 뭐 북한군에서는 손목시계라든지 추리닝 이라든지 이런 것을 상당히 가지는 것이 군인들의 그 당시 소망이었는데 남쪽에 와 보니까? 백화점에 갔을 때 손목시계니 추리닝이니 하는 것은 너무나 흔하게 쌓여 있고 그래서 뭐 남한사람들은 그런 것을 신기하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산 물건도 추리닝을 예쁜걸 산 기억이 있는데 그런 걸 보면서 특히 남대문 시장 등을 관광시켜주는데 과연 북한에서는 평양 백화점의 줄이 너무 길고 줄 서도 사실 상품 한두 개 얻어 사기가 어려웠는데 남대문시장 이런 데에서는 상품이 너무 많아서 다 팔릴까 이런 걱정이 들 정도로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걸 보면서 그 당시 남과 북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걸 확실히 느꼈습니다.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접해보고 불러봤던 노래도 물어봤다.
안찬일: 그때 제가 배운 노래를 가끔 부릅니다만 최병걸이란 가수가 부른 노랩니다. 난 진정 몰랐었네 ! 제목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노래 가사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만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데로 걸어도---가사가 이랬습니다. 제가 북한을 떠나올 때 발길을 돌리려고 했지만 돌릴 수 없이 남쪽 땅으로 온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그 노래가 인상이 깊었고 그때 노래방 같은 곳도 없었는데 회식을 할 때 노래 부를 기회가 있고 사람들이 노래 부르라고 자꾸 시키면 제가 그 노래를 자주 불렀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세계북한인총연맹 안찬일 총재의 삶의 역정 1부 ‘탈북으로 자유를 쟁취했다.’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세계북한인총연맹 안찬일 총재의 삶의 역정 1부 ‘탈북으로 자유를 쟁취했다.’를 함께한다.
안찬일 씨는 1979년 7월 27일 서부 군사분계선을 넘어 탈북했다. 당시 젊고 유망한 북한군인으로 왜 북한을 탈출하게 됐냐고 물었다.
안찬일: 그렇게 높은 직은 아니었고요. 어쩌든 그 병사로서는 9년을 근무했으니까요. 비교적 군 복무기간이 길었고 고참까지 올라가서 사회로 제대해 나가느냐! 마느냐! 군에 계속 남느냐! 또 대학으로 가느냐! 그런 갈림길에서 북한을 탈출하게 됐습니다.
왜 남한으로 오려고 결심을 했을까 궁금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안찬일: 그때 사실 뭐 제가 북한을 탈출해 올 때는 30여 년 전이고 북한이 그때는 오늘날처럼 굶어 죽는 사람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든 북한사회가 잘못된 길로 간다는 것은 제 나이가 그때 25살밖에 안 됐지만, 어렴풋이 알게 됐고, 그래서 저는 그 군에 있으면서 노동당에 입당하고 나름대로 충성을 했는데 제대를 앞두고 사회로 나가야 해서 사회로 나가느니 군에 계속 있어야 하겠다. 그러려면 군관 학교를 나와야 하는데 군관학교를 희망했지만, 정치부에서 군관학교를 추천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대학을 가라 이렇게 대학을 추천해 줬습니다. 저는 사실 대학 1년을 다니다가 공부하기가 싫어서 군대에 와서 나름대로 혁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왔는데 다시 사회로 나가야 하는 환경에서 그때부터 북한사회가 상당히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으니까? 뭐! 좌절이 오고 그래서 저는 제 희망을 실현할 수 없는 이 사회에서 더는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서서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안찬일 씨에게 삼팔선 넘어 탈북 하던 때를 회고해 달라고 했다. 어떤 각오였을까?
안찬일: 제가 군에 있던 지역이 서부전선 판문점 우측 지역인데(남쪽에서 볼 때) 요즘 지뢰가 많이 흘러 내려오는 삼이천 그쪽 비무장지대 안에서 9년을 근무하다 보니까 그쪽 지리도 잘 알고 특히 그 지역은 고랑 포 제1 땅굴, 즉 북한이 남침용 재 1 땅굴이 74년 11월에 발견되면서 전 전선 휴전선 155마일에서 관심이 집중되던 지역이었습니다. 저는 남한으로 올 결심을 했지만 사실 남한으로 온다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철책에는 삼천삼백 볼트의 고압 전류가 흐르고 지뢰밭이고 그래서 그 4킬로미터의 비무장을 뚫고 남한 초소까지 간다. 즉 목숨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크지는 않았고, 그래서 저는 제가 가지고 있던 총에다 30발의 총알을 장전하면서 내가 이제 29명까지 나를 따라오면은 나의 동지들이었지만 나는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고 한발을 남겨서 자살할 수밖에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떠났는데 다행히 한 발도 쏘지 않았고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지뢰도 밟지 않고 휴전선을 넘어서 남쪽 국군 초소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탈북 하면서 고뇌가 많지 않았을까?. 정말 가야 하느냐 안가야 하느냐!
안찬일: 가장 큰 고뇌는 가족 문제입니다. 후방에 아버지와 동생들이 있었고 어머니는 제가 군 복무를 할 때 돌아가셨습니다. 만약에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아마 남쪽으로 올 생각을 안 했겠지요. 어떻게든 그 고통을 참고 그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썼을 텐데 일단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북쪽 체제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고 그래서 이제 휴전선을 넘기 전에 가족들의 희생을 좀 줄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만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가 썼습니다. 당원으로서 노동당 총 비서에서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그 목적은 가족들이 덜 희생을 당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썼지만, 오히려 그게 화근이 돼서 제가 후에 알아본 바로는 북한의 국가안전보위 부는 우리 가족을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 끌어갔습니다. 이것은 제가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이 사회주의는 원래 이런 것이 아니지 않느냐! 여러 가지 제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하면서 나는 그래서 남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합리화 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정당한 의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해서 저희 가족들이 희생당한 것,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제가 참 안타깝지만 뭐 오늘날 이뤄놓은 모든 것을 볼 때는 참 불가피한 희생이고 선택이었다. 이런 나름대로 위안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33년 전이지만 탈 북 당시 솔직히 북한은 어떤 나라였는지 물어봤다.
안찬일: 북한은 그 당시 제가 넘어오기 보름 전에 평양을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방에 근무하면서 평양에 갈 수 있었던 것은 평양 견학단이라는 데 모범적인 군인들을 뽑아서 가는 케이스로 가게 됐는데 그 당시 70년대 말이었고 평양은 사실 60년 말 70년대 초반까지는 그런대로 뭐 먹고 살만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양을 제가 79년 7월 초에 가 보니까? 상당히 백화점이나 상점의 줄이 너무 길게 늘어서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 뭔가 사회주의가 과거와는 다르게 다른 길로 가고 있다. 이런 판단을 하면서 저는 정치체제 면에서도 그 당시 김정일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 벌써 74년에 후계 체제가 등장해서 한 5년 지났으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당적지도나 뭐 유일적 지도체제니 하면서 2가지 선에서 북한주민을 정치조직을 통해서 통제가 강화되는 것 등을 보면서 저는 많은 의문점을 가지게 됐고 결국 이 사회를 내가 버려도 별로 손해 볼 것 없다. 나름대로 그런 판단이 섰습니다.
북한을 탈출하기 전 남한사회를 동경하게 된 배경도 물어봤다.
안찬일: 저는 휴전선에 근무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후방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그 당시는 남과 북이 심리전 방송을 하고 있다 보니까? 방송을 많이 들었고, 특히는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제가 있던 지역은 고랑포 지역 제 1 땅굴이 있었는데, 그 땅굴 지역에서 보면 가을이나 이런 때는 남쪽 지역에서 관광단이 많이 오곤 했습니다. 이 관광단을 보면 어른들뿐만 아니라 청소년들 심지어는 꼬마 어린이들까지 오는데 상당히 복장이 화려하고 칼라가 있고 아름답고 이런 걸 보면서 정치군관들이 말하기는 저 사람들은 전부 남한에서 부자들만 온다. 이렇게 말하지마는 그 숫자가 연간으로 따지면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계속 오는데 모든 사람이 부자일 수 있는가! 이런 의문도 들었고 그래서 아무래도 그런 시각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볼 수 있었다는 것, 남한 방송을 들었는데 남한 방송을 100% 믿을 수는 없지만 어쩌든 그 북한체제가 말하는 그런 것과는 다른 그런 진실한 국제적인 뉴스나 이런 것들을 들으면서 확실히 북한만이 아닌 또 다른 세계가 남쪽 땅에 존재할 것이라는 이런 희망과 기대를 가지게 됐습니다.
남한에서 처음으로 느낀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안찬일: 남한에 도착한 첫 순간부터 국군을 만날 때부터 상당히 놀라운 장면들을 많이 느꼈고 친절하고 그런 데에 대해서 충격을 받았는데 자유라고 할 때 제가 여러 가지 자유를 많이 느꼈지만,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는데 제가 사고 싶은 물건들, 그 당시 뭐 북한군에서는 손목시계라든지 추리닝 이라든지 이런 것을 상당히 가지는 것이 군인들의 그 당시 소망이었는데 남쪽에 와 보니까? 백화점에 갔을 때 손목시계니 추리닝이니 하는 것은 너무나 흔하게 쌓여 있고 그래서 뭐 남한사람들은 그런 것을 신기하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산 물건도 추리닝을 예쁜걸 산 기억이 있는데 그런 걸 보면서 특히 남대문 시장 등을 관광시켜주는데 과연 북한에서는 평양 백화점의 줄이 너무 길고 줄 서도 사실 상품 한두 개 얻어 사기가 어려웠는데 남대문시장 이런 데에서는 상품이 너무 많아서 다 팔릴까 이런 걱정이 들 정도로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걸 보면서 그 당시 남과 북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걸 확실히 느꼈습니다.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접해보고 불러봤던 노래도 물어봤다.
안찬일: 그때 제가 배운 노래를 가끔 부릅니다만 최병걸이란 가수가 부른 노랩니다. 난 진정 몰랐었네 ! 제목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노래 가사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만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데로 걸어도---가사가 이랬습니다. 제가 북한을 떠나올 때 발길을 돌리려고 했지만 돌릴 수 없이 남쪽 땅으로 온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그 노래가 인상이 깊었고 그때 노래방 같은 곳도 없었는데 회식을 할 때 노래 부를 기회가 있고 사람들이 노래 부르라고 자꾸 시키면 제가 그 노래를 자주 불렀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세계북한인총연맹 안찬일 총재의 삶의 역정 1부 ‘탈북으로 자유를 쟁취했다.’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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