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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6.25전쟁 특수부대원 출신 장인규 워싱턴 8240 전우회장

2012-06-29

사진제공: 워싱턴 8240전우회

625 전쟁 당시 특수 부대원으로 활약한 장인규 워싱턴 8240 전우회장.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거나 실종된 한미 양국의 특수부대원들을 기리는 625 특수부대원 추모비 제막식이 지난 15일 노스캐롤라이나, 파옛빌에 있는 특수부대 박물관에서 열렸다.

추모비는 한국전 당시 주한 유엔군 유격부대였던 8240부대 출신의 한인들과 미국 대원 중 전사했거나 실종된 이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미 육군 역사 센터가 건립을 주도했다.

이 비에는 한미 양국의 국기와 함께 주한 국제 연합 유격 군(1951-1954)이라는 비명에 ‘북한에서 전투작전을 수행한 용감한 한국의 유격대원들과 미국의 특수부대원을 기리며,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라는 추모의 글이 새겨져 있다. 자랑스러운 8240 전우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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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역사 센터가 건립한 625 특수부대원 추모비. 영어와 한국어로 추모의 글이 새겨져 있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625 62주년을 맞아 625 전쟁 당시 특수 부대원으로 활약한 장인규 워싱턴 8240 전우회장으로부터 625전쟁 당시의 증언을 듣는다.

장인규 회장은 북한에서 많은 젊은이가 남한으로 피난 내려와 내 고향은 내가 지킨다는 각오로 각종 전투에 참가했고, 당시 북한 지역에 유격대원으로 참가한 8240부대가 있다고 설명해준다.

장인규 회장: 제가 근무한 곳은 8240 유격 군 부대였고요. 주로 적진지에 가서 정보를 수집해오는 것이 임무였거든요. 그래서 적의 동향을 파악하는 거예요.

장인규 워싱턴 8240 전우회장은 1951년 당시를 회고한다. 돛단배 타고 적진에 가서 전투하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장인규 회장: 전투는 저녁때 주로 했는데 그 당시는 배가 기계 배가 아니고, 돛단배였어요. 지금은 아마 그런 배가 없을 겁니다. 엔진이 부착되지 않은 배라서 전투하러 가다 바람이 반대 방향에서 불면, 바람 때문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원대 복귀하던 때도 있었어요. 저녁에 들어가 인민군과 전투를 했어요. 새벽녘이 되면 후퇴하고요. 황해도 연백 해성에 주로 많이 다녔는데 거기는 낮에는 인민공화국이고, 밤에는 8240 유격대 세상이었습니다. 당시 해성 면에 치안 맡은 사람들이 10리 이상 되는 곳에서 낮에 내려와 몇 시간 동안 활동하다가 해지기 전에 북쪽으로 올라가요. 625 당시 매일 그런 일이 계속됐습니다.

장인규 회장은, 전우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도 전쟁 당시를 생각하면 보고픈 전우들의 얼굴이 떠오른단다.

장인규 회장: 전우들이 많이 죽었어요.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고 많이들 죽었지요. 나이 많아서 죽고, 지금으로서는 별로 알 수가 없어요. 한국에 나가서 찾아봤는데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장인규 회장에게 이곳 워싱턴 인근에 사는 8240 전우회 회원들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설명해 달라고 했다. 전쟁 당시의 이야기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단다.

장인규 회장: 여기 8240 유격대 출신이 한 10여 명 되요. 볼티모어, 워싱턴 지역에요. 매달 모여서 옛날 고생하던 이야기, 전쟁 수행하던 이야기, 식사하고 덕담 나누다가 헤어지곤 하지요.

장인규 회장은 625전쟁 62년을 맞으면서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생존해 있는 대원들이 건강 때문에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인규 회장: 8240 유격대대원에 관한 뉴스가 지역 신문에 몇 번 보도 됐었어요. 신문 보고 모였었는데 한 10명이 넘었었는데 2분이 죽고, 10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분들이 나이가 많아서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기념비 제막식 할 때도 건강 때문에 못 가시고 저 혼자 갔었어요.

장인규 회장은 625 특수부대원 기념비에 새겨진 참 의미도 들려준다.

장인규 회장: 비문에 소위 군번 없이 싸워서 이름 없이 죽어간 영혼들과 아직까지 생사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입니다. (북한에서 전투작전을 수행한 용감한 한국의 유격대원들과 미국의 특수 부대원들을 기리며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장인규 회장은 추모비 제막식 소식도 전해 준다.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특수부대원의 자녀인 한국계 모니카 스토이 씨의 공로가 크다고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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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수부대원 추모비 제막식에서 기념 촬영 (왼쪽에서 첫 번째가 장인규 회장).

장인규 회장: 모니카 스토이 씨의 아버지가 특수부대 동키 부대장이셨는데 2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위험한데 전투에 참가했는데도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모니카 씨가 추모비 건립 기금을 내어 제막식을 하게 됐지요.

장인규 회장은 625 특수부대원 추모비 제막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을 지켜내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에 참가한 전우들을 회상하게 해 준다면서 앞으로 워싱턴 지역에 기념비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단다.

장인규 회장: 미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굉장히 의미 있게 생각하고요. 옛날을 회상하게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워싱턴 지역에 기념비를 만들고 싶은데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워싱턴 지역에 기념비를 만들어 많은 분에게 잊혀진 군번 없는 사람들의 625전쟁 당시에 행한 공적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장인규 회장은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 그리고 전 세계에 사는 한인 2세에게 625전쟁은 어떤 전쟁인지도 들려준다.

장인규 회장: 북에 있는 사람들 지금도 625전쟁이 북침이라고 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른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625전쟁은 남침 전쟁이지 북침은 절대로 아니었어요. 왜 그런고 하니 그때 당시 일요일 새벽에 한국 군인들이 많이 휴가들 가서 영내에는 군인들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군대에서 나와서 짚 차에 스피커를 틀어 놓고 휴가 장병들 원대 복귀하라고 스피커 방송을 625 나던 날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방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젊은 사람들은 625전쟁은 북침전쟁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요. 한국에서 젊은이에게 어떻게 교육을 시켰는지 젊은이들이 625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거지반 다인 것 같아요. 그것이 안타깝고요. 또 통일전쟁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적화통일 전쟁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김일성이가 소련 스탈린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스탈린 앞에 가서, 김일성이 8일 동안이면 남한을 다 정복시킨다고 그런 소리를 해서 결국은 전쟁을 일으켰는데 김일성이 마음대로 안 된 거지요. 사실은 요.

장인규 회장은 한국 젊은이에게 625의 참 비극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세계의 기수로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인규 회장: 625전쟁은 세계의 어느 전쟁치고 제일 가난한 그때 전쟁이 나서 먹을 것 없고, 입을 것도 없고, 왜냐하면 일본 속국 지내면서 다 수탈당하고 참 어려운 때에 전쟁이 일어나서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어디를 가든지 전쟁고아들, 거지들, 그래서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암울하게 생각을 하고 참 어려웠던 시기였었지요.

장인규 회장은 자랑스러운 한국을 이끌어 갈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국가를 위해 봉사할 것도 당부한다.

장인규 회장: 그 당시 8240 유격대원들은 북한에서 피난 나왔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우리 고향은 우리가 탈환시킨다는 마음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이북에 들어가서 정보를 빼오고 전투를 했는데, 지금 후세 젊은이들도 이런 것을 알아서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대한민국에 어려움이 닥치면 자진해서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그런 젊은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장인규 회장은 8240 유격대원으로 61 고지 전투 참가는 지금도 잊지 못한단다.

장인규 회장: 51년도에 8240부대가 61 고지 전투에 참가했었어요. 거기서 중대장이 전사하는 큰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때 굉장했습니다. 배를 타고 들어가서 전투하는 약점이 후퇴할 때 취약해요. 이민 군들이 투입해 내려오면은 기계 배가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움을 많이 겪고 사격도 많이 받고 그랬죠. 그때 중대장이 전사한 전투가 어려웠던 전투로 기억이 나요.

장인규 회장은 생존한 전우들이 바라는 것은 8240 부대가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인규 회장: 인정이라도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대원도 그렇게 바라면서 살고 있는데, 그분들이 몸은 늙고 대부분 웰페어, 정부에서 주는 연금 타고 계시기 때문에 어렵게 살아요. 그래 그분들의 생활 개선이 향상되는 것이 첫 번째 바람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625 62주년을 맞아 625 전쟁 당시 특수 부대원으로 활약한 장인규 워싱턴 8240 전우회장으로부터 625전쟁 당시의 증언을 들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